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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남의 비밀
    2002-04-29 12:02:16   read : 270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3:1-8절 // 02/04/28
    최근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대개 주인공의 출생에 대한 비밀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가을동화'의 경우,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국밥집 딸인 신애와 윤교수집 은서가 뒤바뀌게 되면서 14년동안 신애는 은서의 삶을 살고, 은서는 신애의 삶을 살면서 전개되는 얘기였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14년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던 시간을 접고, 원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은서가 국밥집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밥집 딸 신애가 대학교수집의 딸로 산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두 사람 모두 두 번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미 지나간 드라마의 내용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 '가을동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얘기를 우리는 주변에서 실제로 들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아이가 뒤바뀌는 사건을 통해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 말입니다.

    이런 경우 당사자들은 한동안 상당한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변환경이 바뀌고, 부모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모가 바뀌었다는 말은 실제 친부모를 만난 것이지만 그 아이의 경우를 두고 생각한다면 부모도 분명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월이 흘러가면 비록 많은 것이 바뀌었다할지라도 대부분은 그 환경에 적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출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서의 '새로운 출생'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주변 환경이 바뀌거나, 살아온 삶의 터전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색다른 출생에 대한 비밀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의 관원인 사람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전혀 색다른 출생에 대한 비밀은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바리새인이며 유대의 관원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의 신분이 뭐 그리 중요하냐?"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의 관원이라해서 청년 예수를 찾아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종교적인 지식과 신념을 가지고 예수와 대결하기 위해 찾아갔다면 오히려 당당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간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누가 보아도 훌륭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고, 엄격한 종교생활에 익숙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청년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집 둘째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부모들을 대상으로 특강시간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참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도 조르는통에 그 특강시간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강의 중에 저에게 다가와서 "초등학교 다닐 때 늘 100점 받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제 기억에 중학교나 고등학교때면 몰라도 적어도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100점을 받아보지 못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강의가 끝날 때까지 '100점짜리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강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원래 대답은 '아니라'고 해야 정석인데 제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으니 본인이 강의하는데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조금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한 이후로 저에게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저희 집 큰 아이가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어학원에서 배운 문제를 가지고 저에게 물어오면 저는 '모른다'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 아이는 제가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위기를 모면하겠습니까? '설교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슬쩍 미룹니다. 아니면 곁눈질로 일단 해답부터 보고 역으로 문제를 풀어서 대답을 해 주곤 합니다. 옛말에 "할아버지도 손자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니고데모가 청년 예수를 찾아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니고데모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열심이었고, 성경에 관한 한 박식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니고데모는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박사나 철학박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자존심을 버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완벽하게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버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찾아간 시점이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밤을 택해 예수를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리새인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밤을 택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즘은 밤낮이 따로 없습니다. 과거엔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습니다.비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친근감이랄까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낮이건, 밤이건 CC TV가 작동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앞에 쓰레기를 누군가가 자꾸 버리니까 'CC TV 작동 중'이라고 써 붙이자고 제안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밤이라고 해서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밤이면 자신을 가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밤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교훈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음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얘기며, 성전을 청결케 했던 얘기를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 앞에서도 유대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아니 관심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분을 만나 그분께 자신의 고민을 말하고, 그분과 교제하기를 원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주가 장애인주일이었는데 요즘 장애인에 대해 얘기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찌라도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공감하는 것과 그것을 위해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란 말입니다. 시(市)로부터 행정적인 문제가 아직 해결되어지지 않아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온유한학교 설립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市)의 관계자들도 늘상 하는 얘기가 근본적으로 장애인학교 설립에 반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자꾸 제동을 걸고 이유를 붙여서 우리가 추진하려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아는 것과 그 일을 위해 결단하는 것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우리들의 가정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홀로 예수를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정을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직접 주님께 나아와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니고데모 뿐입니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갖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주께로 나온 사람은 니고데모 뿐이었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입을 열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서 니고데모가 비록 예수께 나아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랍비'라고 했습니다.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표적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인식은 없었지만 그에게는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적용하려는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표적에 대한 얘기는 니고데모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표적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은 니고데모에게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예수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에는 적용하려는 노력들이 없습니다. 그저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종교 난에 '기독교'라는 석자를 쓰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적용을 하려 들지 않습니까? 그것을 적용하려면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저의 아내가 집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장롱이나 책상의 위치를 바꾸자고 제의합니다. 저희 집은 굉장히 어둡습니다. 그래서 대낮에도 형광등을 켜지 않으면 캄캄한 밤입니다. 더구나 여름이면 굉장히 덥습니다. 요 며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면서 아내는 저에게 현관입구에 있는 책장의 위치를 좀 바꾸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시원해 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책장이 창문을 가로막고 있어서 더더욱 어두운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책장을 정리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귀찮아서'입니다. 책장을 옮기면 좀더 환해지고, 좀더 시원해지는 줄은 알지만 그렇게 하려면 많은 것을 끄집어내고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결코 만만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 와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삶에 참고 정도로만 삼으려 할 뿐입니다. 사실 대화 중에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조언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참고하겠노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대개 참고하겠노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에 그것을 실제로 반영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저 형식적인 대답이었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에 수산물을 교회에서 좀 팔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하신 분이 저에게 여전도회 회장님을 좀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교회로 전화를 했기 때문에 여전도회 회장님을 바꾸어 줄 수도 없었지만 교회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에 대해 별로 긍정적이지 못한 저로서는 마땅히 거절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락처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대뜸하는 말이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분들 중에서 자기들에게 전화를 해 준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섬뜩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거절할 양으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그럴는지 모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참고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들은 후에 그것을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삶에 있어서 그 어떤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며 우리가 열린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된 생명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표적 때문에 주께 나아왔지만 이미 그는 열린 마음으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니고데모의 상태를 진단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즉 지금의 상태로는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본문을 보면 굉장히 차분하게 전개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순간은 굉장히 충격적이고도 긴박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금 너의 현재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누굽니까?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유대인중에서도 바리새인은 최고의 종교적 열심과 선행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흠도 티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이 순간 얼마나 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에도 종교적으로 열심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에 적극적이고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합니다. 모임이란 모임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헌금하는 일도 앞장서서하고 섬기는 일에도 남다른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인 제가 그분께 다가가서 '지금 상태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충격적이며 실망감에 사로잡히겠습니까?

    가끔 구원상담을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질 때 주로 대답하시는 내용이 '열심히 교회 다녀야지요,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해야지요'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럴 때 저는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분들이 당황해 하기도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열심히 공을 쌓아야 갈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열심히 공을 쌓은 것으로 말한다면 니고데모야 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살아온 바리새적인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되면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이 부정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종교적으로 흠 없이 살아온 그였는데 그런 정도의 삶의 방식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위치와 자존심을 뒤로하고 이곳까지 왔는데 뭔가 위로나 혹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은 못해 줄지언정 이렇게 면전에서 거절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만약 저나 여러분이었다면 아니 좀 덜 된 저였다면 '그래 혼자 천당 실컷 가라'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물러날 니고데모였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니고데모를 당황케 한 것은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의 인생은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환생도 아니고,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니고데모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말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질문은 지극히 어린아이 수준의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니고데모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이 질문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영적인 진리에 관해 아직 어두운 암흑가운데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난다'는 것을 단지 육적인 태어남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태어남에 대해 알 까닭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까지 두 번째 태어남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니고데모의 질문을 저급한 수준의 질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알기 전엔 그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이해는 되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있을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영적인 진리가 깨달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르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 자리를 떠났다면 그는 이제 다시 이 귀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취할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 깨달아지고 다 이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삼위일체'가 이해되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이 아닌 과학적 증명을 통해 밝혀내고 증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해 아무리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는 하지만 진화론이 더 과학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바치기 위해 산에서 아들을 향해 칼을 들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앉아 있으면 졸음만 올 뿐입니다. 그런데 아주 기가 막힌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 말은 너무도 잘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 참에 잠이나 자두어야겠다" 하고 깊은 시름에 잠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하여 여러분이 오늘 이시간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우리는 생명의 귀한 은혜를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진지하게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때 진정한 깨달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난관에 부딪힌 니고데모를 향해 주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5-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인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통해 주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에스겔서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6:25-27절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때 죄를 지은 경우 백성들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죄를 자백하면 제사장은 물을 뿌림으로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정말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한 그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사를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지내고 거기에 물을 뿌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물을 뿌리는 것을 통해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을 때 이 약속의 말씀을 니고데모로 하여금 생각나게 했으며 그로 인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이 한번의 출생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출생, 마음을 정결케 하는 출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물에 물을 뿌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물을 뿌리는 것이 없다면 진정으로 정결케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내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성령의 단비를 뿌리고 중심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가을동화에서 은서가 신애가 되고, 신애가 은서가 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연장에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출생을 의미합니다.

    알뜰 매장에 가면 재활용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매장에 올 때 망가졌거나 일부분이 훼손되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매장에 가지고 와서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쳐서 새 물건처럼 만들어 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고쳐도 우리는 그것을 '중고'라고 합니다. 새 물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 즉 재활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우리들의 삶이 엉망이었는데 이제 고쳐서 새롭게 잘 다듬어 매장에 내 놓은 그런 중고품이 아니란 말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과거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조폭에 가담했다가 그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감동 깊게 접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새롭게 사는 인생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출생이 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새로움이 아닌 영적인 새로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니고데모에게 당부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과 8절에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으로 다시금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바람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때문입니다. 즉 가지가 흔들린다든지 피부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든지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자기 마음중심에 성령의 물을 뿌리고 거듭난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주변영역에 놀라운 변화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같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뚱뚱한 사람이 날씬한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 생긴 얼굴이 하루아침에 미스코리아 같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의 영향력이 느껴지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그 주변사람들에게 풍성한 삶의 열매를 나타내 보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동일한 성품의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되고, 바뀌어진 또 다른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미워하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만했던 모습이 겸손한 모습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긍정적인 생각의 사람으로, 불평과 원망속에 놓여 있던 모습이 기쁨과 감사의 모습으로, 자기 정욕대로 살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인생으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삶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에서 타인을 생각하고 남에게 끊임없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 생애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모르시겠다구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중심,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자기 정욕과 고집대로 살고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거듭남의 증거가 있으십니까? 아니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의 모습으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계십니까? 이시간 여러분의 신앙과 삶을 연결시켜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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