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이 아니라 부활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영성체험’ 2002-05-02 10:19:40 read : 234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는 부흥이 아니라 부활에 대해 말해야 한다. -백종국
▲백종국교수
경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의정치포럼 집행위원장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였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모두 기뻐하고 또 즐거워할 일이다.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고 또 희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 교회들이 이 부활의 아침을 즐거워할 만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활의 즐거움을 느끼기 힘든 강시(彊屍)와 같은 교회들이 적지않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죽음이 있어야 한다. 부활의 드라마는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죽음을 거치므로 나타난다. 부활 뒤에는 물론 영원한 새 생명이 있다. 우리 모두의 죽음이 다 부활을 맞는 것은 아니나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 때때로 사실은 죽어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강시(彊屍)라고 부른다. 만화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서 적지 아니 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죽어야할 것에는 살아있고 살아야할 것에는 죽어있는 교회들을 만나게 된다.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돈을 모으다 보니 구제와 선교에는 등한히 하는 교회들이 있다. 회개와 용서보다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독선과 저주로 끝없는 아귀다툼에 빠져있는 교회들도 있다. 목사나 장로 한 두 사람의 세속적 욕망을 위해 교회 전체가 고통에 빠뜨려지기도 하고, 가정은 파괴하더라도 오직 교회 일에만 충성하라는 주장을 듣기도 한다. 가끔씩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부도덕한 일 조차 서슴치 않고 해치우는 교회도 있다. 심지어 부활을 미신이나 종교적 상징쯤으로 주장하면서도 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한다. 복음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으면서도 세상에 대해서는 펄펄 살아있는 강시와 같은 이러한 교회들이 한국 교회에서 적지 아니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부활의 즐거움을 누리기는 고사하고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단지 고통을 줄뿐만 아니라 복음의 문을 가로막아 서서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이들도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한다. 물론 그럴 듯한 명분을 찾자면 얼마든지 있다. 목사나 장로의 권위, 교회의 전통, 교단의 명령 혹은 심지어는 현실의 불가피성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현실 교회의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끊임없이 죽고 불태워져야할 인간의 껍질이다.
사실 죽고 나면 어찌 다시 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데에서 이 비극이 싹트고 있다. 이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이다. 죽은 자는 결코 자신을 다시 살릴 수 없다. 다시 살리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그의 살아 계심을 믿는 다면 죽는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죽기를 두려워할 뿐 만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거의 발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임목사직에서 안 쫒겨나려고, 시무장로직을 유지해 보려고, 교회 재산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보려고, 교단이나 교단 기구를 장악해 보려고,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를 자기 자식이나 사위에게 넘겨보려고, 돈을 받고서야 자리를 옮기려고, 교회와 복음이야 죽든 말든 필사의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므로 강시들의 발버둥이라고 해야 옳다. 이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힘든 사람들이다.
우리는 부흥이 아니라 부활에 대해 말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 부흥이란 단어는 적절치 않다. 사실 우리 한국의 기독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전성기가 없지 않은가? 부흥이란 단어는 도리어 한국 교회의 물량적 성공제일주의를 부추기고 결국은 부활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에 쓰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인애과 공평과 정직의 나라의 부활에 대해 말해야 한다.
교회의 행동에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찾을 수 없다면 이런 교회는 아직 거듭난 교회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처지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먼저 모든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 죽어야 한다. 인간의 현실로는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먼저 정직하고 먼저 공평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백종국(경상대학교 교수, 공의정치포럼 집행위원장, jgback@nongae.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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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적 현상 탈출구 ‘영성체험’
(미래사회와 종교성 연구회 대중(영성)강좌)
■ 참된 영성 갈급은 ‘양심의 소리’ 세종대 이은선교수 주장 제기
“참된 영성은 온전성과 개방성,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래사회와 종교성연구회 주최로 지난 10일 서울흥사단강단에서 열린 대중(영성)강좌에서 세종대 이은선교수(종교/교육철학)가 이와 같이 주장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21세기 시민운동, 영성을 말한다’란 주제로 지난 3일부터 오는 6월 5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대중강좌에서 이은선교수는 “현대인들은 시장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모든 것을 상품의 매매가치로 평가하고 있으며 사람마저도 생명이 있는 유기체가 아닌 상품의 가치로 평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교수는 현대인들은 병리적 현상인 건강염려증과 자아도취증에 빠져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없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 충족 또는 학연, 지연 등 자기 동질집단의 유대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교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으로 인해 삶에 있어 허기와 좌절, 공허를 느끼며 순간적 쾌락을 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교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병리적 삶을 탈출하고 삶의 근원적인 치유와 회복을 갈구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의미의 신앙이 아닌 또 다른 영성의 체험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사회가 고도화 되는 미래사회에서는 ‘영성 체험’이 더욱 더 강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성 체험과 관련해 이은선교수는 “생명이 있는 모든 만물과 개인을 동떨어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이러한 만물과 자신을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을 영성 체험”이라고 설명했다. 참된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온전성’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개방성’, 그리고 이러한 영성이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참된 영성에 대한 갈급은 우리 양심의 고유한 목소리”라고 규정하고 “영성이 삶에서 지속적인 건강과 생명의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양육과 보살핌이 필요하며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영적각성이 이뤄지도록 해야한다”며 목회자와 교육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이교수는 “영성에 대한 갈급이 높아갈수록 참된 영성 보다는 사이비적이고 생명파괴적인 영성이 유행병처럼 번질 우려가 있다”며 경계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은선교수는 “신앙인이면서도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는 물욕과 권력, 쾌락 등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 뒤 “삶의 모든 과정에서 지속적인 영적 각성과 함께 타인과 세상을 배려할 줄 아는 영성을 체험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