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리로다 2002-03-25 17:29:48 read : 283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엡1장3-10) // 2002.03.23
은혜를 망각하고 원망하지 말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은혜 입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바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 깨닫지 못하는 사람, 도 있고, 은혜를 받아놓고도 망각하고 잊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은혜를 받은 것으로 매일 매순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가 우화적인 단편을 썼는데 그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딸아 안심해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앉은뱅이도, 절름발이도, 창녀도, 소경도 치유해 주셨던 그런 장면들을 보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너무 안타까우셔서“너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내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느냐.”그러니까 그 술주정뱅이가 예수님에게 신세타령을 합니다.“나는 과거에 절름발이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움으로 말미암아 내가 절름발이 일 때는 구걸이라도 하고 살았는데 사지가 멀쩡해지니까 나를 도와주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내가 다리가 다 낳아서 걸어다녔지만 나에게 변변한 직업도 없었고 또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무나 낙담이 되고 실망이 되어서 다시 이렇게 술을 먹고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에게 원망을 하더랍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한 창녀를 만났습니다. 창녀를 만난 예수님께서“내가 너를 그 불행한 자리에서 구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왜 다시 이 불행한 자리에 들어와서 사느냐.”고 했을 때 그 창녀는“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지만 나는 그 창녀의 소굴에서 빠져나와서 제대로 살아갈 길이 막연했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하면서 예수님을 원망하더랍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한 부랑자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막 두들겨 패고 있는 부랑자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책망하면서“네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했을 때 그 부랑자는“주님께서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지만 내가 눈을 뜨고 보니까 이 세상에 아니꼽고 더럽고 마음 상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행패를 부립니다.”하면서 눈을 뜨게 해준 예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원망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때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된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는데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받은 바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새 생활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전환시켜 나가야 될 줄 믿습니다.
1951년에 죽은 불란서 사람 「알렌」은 철학자요 평론가였는데 "행복론"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과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대비시키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복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축복으로 잘못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축복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② 하나님의 축복은 순수하고 무조건적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것은 앞뒤에 조건이 붙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③인간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것은 조건적이기 때문에 환경과 시간에 따라 없어져 가고 감퇴되고 달과 같이 기울어지고 핀 꽃과 같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샘물처럼 마르지 아니하고 영속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④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나에게만 꼭 들어맞는, 마치 맞춤옷과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은사라고 설명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고새 인생’ 이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력을 의지하는 인생들입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자고새란 어떤 새입니까? 자고새는 이스라엘 광야에 사는 조류이며, 모양은 메추라기를 닮았기 때문에 사무엘상 26장 20절에서는 같은 히브리어를 메추라기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새는 (Partrige) 어리석은 새입니다. 남의 알을 잔뜩 모아 앉아서 온갖 고생을 하며 정성을 드립니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새들은 조금만 자라면 제 어미를 찾아 떠납니다. 그동안 자고새가 가지고 있었던 고생과 품어준 수고는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 이 자고새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제쳐두고 다른 것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자고새의 노력은 분명 어리석음이요. 착각입니다. 사람이 움켜쥐기만 한다고 해서 내 품에 있지 않고 떠나게 되어 있고 결국은 자신도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욕심은 거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고새 인생 이 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로 심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3-14까지의 [찬양]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후반부의 [기도]부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영적인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3절은 에베소서가 시작되는 가장 웅장한 서사시이며 감격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본문은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찬송합시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자기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찬양하고 성도들에게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양합시다!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축복 받은 성도들은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찬송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 주신 이에 대한 예의입니다. 노래방에서는 노래하는데 돈을 내고도 그렇게 목이 터져라고 부르면서, 교회에서는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라고 해도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고 감사한 마음도 없이 답답하게 찬송하는 교인들도 있지 않습니까? 찬송을 힘있게 부르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이미 주신 축복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할 이유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복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자인지, 은혜를 깨달은 자인지 그리고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의 뜻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지는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유명한 "개혁주의 예정론"이라는 책을 쓴 뵈트너라는 미국의 신학자는 은혜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은혜는 무가치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유롭고 과분한 사랑과 호의를 말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죄인 된 나를 향한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예수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도 은혜라는 용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존재 전부를 포기하심으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찬양의 내용이 되는 신령한 복
에베소서가 말하는 복은 결코 육신적인 복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적인 축복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더욱 중요한 복은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신령한 영적인 복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신령한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떠난 축복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신령한 복'을 샤머니즘이나 기복적인 뜻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풍성히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는 복받쳐 오르는 감격을 가지고 에베소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에베소서를 대할 때 '내 영혼이 찬송하리로다' 하는 감격적인 마음을 가질 때에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이 신령한 복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각각 어떻게 관련이 되고 있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4-6절까지는 성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으로, 과거적인 복, 즉 선택의 복이고
2> 7-12절까지는 성자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으로, 현재적인 복, 즉 구원의 복이고
3>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으로, 장차 누릴 복, 즉 통일됨의 복, 영생의 축복입니다.
신령한 복의 구조
3절 말씀은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가 주어입니다. 즉, 복의 근원이 성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복의 영역, 즉 그 복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그리스도 안'이며, 복의 내용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즉,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구절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신령한 복의 현장이면서 모든 복의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란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신령한 복은 논의되어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바울서신에 164회나 사용됩니다. 에베소서에만 30회나 쓰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바로 신령한 복을 가진 생명력 있는 삶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주어지는 신령한 복을 우리가 이 시간에 사모하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참으로 우리에게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마치 연극의 무대와도 같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연출자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입니다. 무대에 나가는 배우는 반드시 연출자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라는 무대 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기의 달란트 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주실 때는 거져 주셨지만 받은 이후엔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사43:2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은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거져 주신 것이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데 그것은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깜짝 놀랄만한 은혜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이며, 셋째는 하나님 자신이 은혜의 영광을 받고자 함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며, 감사와 감격으로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늘 이것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첫 번째 복은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그 세대와 지금 이 세대를 살아나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하나님을 배역하면서도, 무서운 징계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선민이라고 하는 자랑스런 의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7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 주셨는데, 다른 조건 때문에 선택해 주신 것이 아니고 비록 이스라엘은 작은 백성이지만, "내가 너를 기뻐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비록 작은 백성이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하나 있다고 하면 "내가 너를 기뻐해서, 사랑해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만큼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한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하셨다고 하시고 두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물을 지나가는 것처럼 이 풍랑의 세상을 지나가는 고통을 겪지만 그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고, 이 세상에 마치 불꽃과 같은 시련이 많은데 그 불꽃을 지나더라도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선택하시고 이렇게 보물처럼 간수하십니다.
먼저 내가 세상적인 행복을 얻고자 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이기에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내가 너를 선택했다. 너는 내 품속에서 보호를 받아라. 너는 물질적으로 복을 받아라. 너는 건강해라. 너의 후손은 형통해라. 너는 거저 평안히 복만 받아라" 이렇게 해서 선택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모든 축복 가운데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주어집니다. 축복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땅에 속한 복이든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든지 다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듯이 복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복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비와 공기와 햇빛은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땅에 속한 보편적인 복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하늘의 신령한 축복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은 가장 큰 은혜입니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할 때 그 형편을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의 장래의 가능성을 보시고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온갖 시련과 환난 중에서 또한 온갖 위험과 역경 중에서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사와 감격이 있고 여기에 우리의 자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우리를 선택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제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찬양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42장 8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최고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뿐입니다. 그 찬양을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까지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가 천국까지 가서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찬양 뿐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두 번째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복입니다.
본문 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죄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마치 병균과 같습니다. 사람은 죄의 병균으로 인하여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죽음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서운 형벌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 여기에 오직 길 하나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구속입니다. 오직 하나의 치료 방법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사형선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속옷과 의의 겉옷으로 입혀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악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관계를 하나로 이어 주신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로워서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피의 대가로 용서받았습니다.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애벌레 때를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애벌레 때일 때는 그것이 사는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땅을 기어다니며, 나무를 기어다니며, 풀과 잎을 뜯어먹어 댔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름답고 찬란한 나비로 변화되었을 때, 나비는 먹어야 살겠다고 열심히 땅을 기어다니며, 나무를 기어 다녔던 때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됩니다. 이제는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슬과 꽃가루와 꿀을 즐깁니다. 먹는 것도 사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한번 날 게 된 나비는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땅을 기거나 나무에 기어올라가지 않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풀이나 잎을 뜯어먹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누구입니까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 우리에게도 이러한 확실하고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모를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땅에 것만 생각하고 땅만을 바라보면서 땅에 것을 찾아 헤메였습니다. 세상에 눈이 어두워서 탐욕과 정욕에 빠져서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님을 통해서 거듭난 생명이 됩니다. 하늘의 속한 신령한 축복을 깨닫게 됩니다. 천국의 맛을 보게 됩니다. 말씀의 맛, 기도의 맛, 성령의 기쁨, 하늘의 소망과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의 영혼이 위엣 것을 생각하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을 바라봅니다. 이제 세상은 사라집니다.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름에 우는 매미는 여름에 불과 15일에서 20일을 살겠다고 땅 속에서 무려 7년에서 17년을 산다고 합니다. 모든 것에 조급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다가 매미가 되면, 그 15일에서 20일을 사는 것도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산천이 떠나가라고 밤낮 노래를 부르다가 죽습니다. 이것이 매미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 성도들이, 이 짧은 인생이 좀 괴롭다고, 좀 고생스럽다고, 좀 짜증스럽다고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찬송을 잊어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기도를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말씀을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기쁨을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감사를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은혜를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화평을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살기가 조금 힘들고 어렵고 괴롭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엡 2:1). 죄로 말미암아 영적 소경된 우리를 생명으로 살리시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엡 2:5). 이것은 기적이며 이적이자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동일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며 죄와 싸우게 하는 능력이자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를 강력하게 하는 능력!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더욱 ‘강력한 능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엡 1:19).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좋은 생각> 2000년 3월호에 마음의 평화 생각의 기쁨에서 "딱 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해도 딱 한 사람,
나를 의지하고 있는 그 사람의 삶이 무너질 것 같아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내일을 향해 바로 섭니다.
속은 일이 하도 많아 이제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딱 한 사람,
나를 철썩 같이 믿어 주는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그 동안 쌓인 의심을 걷어 내고
다시 모두 믿기로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강퍅하여 모든 사람을 미워하려 해도 딱 한 사람,
그 사람의 사랑이 밀물처럼 가슴으로 밀려와 그 동안 쌓인 미움들 씻어 내고
다시 내 앞의 모든 이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아프고 슬픈 일이 너무 많아 눈물만 흘리면서 살아갈 것 같지만 딱 한 사람,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 사람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닦고
혼자 조용히 웃어 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때문에 이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딱 한 사람,
나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다시 용기를 내어
새 일을 시작합니다.
세상을 향한 불평의 소리들이 높아 나도 같이 불평하면서 살고 싶지만 딱 한 사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평화가 그리워 모든 불평을 잠재우고
다시 감사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온 세상의 모든 사랑도 결국은 한 사람을 통해 찾아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한 사람이 되고 누군가가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면
온 세상이 좋은 일로만 가득하겠지요.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꼭 필요한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성례전 중에서 세례와 입교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세례(Baptism)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이 증명이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우리의 서약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의적으로 또한 공적으로 인치는 예식입니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갈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내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며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인침 입니다.
세례는 회개와, 용서의 예식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의 확증입니다. 회개하는 자녀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여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곧 세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례 받기 전에 반드시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머리에 부어지는 물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의 흘리신 보혈이며, 이 보혈의 뿌림을 받는 자는 그 보혈로 인하여 모든 죄가 씻김 받는 것입니다.
한 재판정에서 젊은 죄수가 극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백발의 한 노인이 죄수석으로 뛰어들더니 아들을 끌어안고 판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장님 우리에게 내리신 당신의 판결은 정당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당신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이 연로한 아버지는 자기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기의 못된 아들과 자기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우리’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죽을 죄인들의 수치와 치욕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시고 고통을 다 감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회개와 용서에 참여하는 예식이 성례전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실 때 역사하신 성령님 안에서 내가 변화된 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80세된 노인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이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년 후에 임종이 가까웠을 때 누군가가 나이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두 살입니다. 나는 80세에 세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례 받기 이전에 살았던 80년의 세월은 죽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겨우 두 살입니다”
칼빈은 ‘세례는 새 생명으로 인간을 재형성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의 세계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 안에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본 어느 마을에 만 두 살된 아이가 소아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음의 시간이 언제냐 문제였습니다. 목사가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가 끝나자 목사는 아이가 두 살 밖에 안됐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그림으로 된 성경책을 몇 권 구했는데, 아이는 유독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내 친구”라는 책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 책 그림 중에도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을 제일 좋아했고, 이 아이는 그 그림 속의 아이가 바로 자기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 후에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예수님의 품으로 간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의 어머니도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입장허가’입니다. 초대교회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도의 수에 넣지 않았고, 그들을 말씀의 예전에는 참여시켰으나, 다락방 예전 곧 성찬의 자리에는 그들을 모두다 퇴장시키고 나서 세례 받은 이들끼리 행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만큼 공동체 의식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일단 세례를 받고 나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한 형제, 한 재매로 여겼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의 성도가 되는 예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