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환희와 감동을 주는 교회 2002-03-25 17:32:47 read : 316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느헤미야 12 : 31-43(2002/03/22)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목사님이 설교학 강의 가운데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을 설교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표정 관리에 주의하십시오. 천국의 기쁨을 설교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십시오. 두 번째 가슴을 활짝 펴고 웃으십시오. 그 다음에 천국을 이야기하십시오." 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 다음에 말하기를 "지옥의 고통에 관하여 설교를 하시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특별한 표정을 연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지옥의 모습이니까요" 그랬답니다.
오늘 보니 스펄존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고뇌에 찬 얼굴을 환한 얼굴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웃을 수 있고, 감사 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편 126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의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우리는 기쁘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기쁨과 환희와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오늘 축복의 시간, 은혜의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마음이 열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의 의과대학의 프라이 박사는 40년 동안 웃음과 건강에 대하여 공부한 학자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분이 저술한 참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약으로서의 웃음} 이라는 책인데 그 책에서 웃음의 생리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밝혔습니다.
1. 뇌수체에서 엔돌핀이나 엔게팔린 같은 자연 진통제가 생성된다.
2. 부신에서 통증과 신경통과 같은 염증을 낫게 하는 신비한 화학물질이 나온다.
3. 동맥이 이완되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과 혈압이 낮아진다.
4. 웃음은 신체의 기관에 긴장 완화를 준다.
5. 웃음은 혈액내의 코티졸의 양을 줄여 준다.
6.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의 완화로 심장마비를 예방한다.
7. 웃음은 심장 박동수를 높여 혈액의 순환을 돕고 몸의 근육에 영향을 미친다.
8. 뇌졸중의 원인이 되는 순환계의 질환을 예방한다.
9, 암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킨다.
10. 3-4분의 웃음은 맥박을 증가시키고 혈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한다.
11. 가슴과 위장 어깨 주위의 상체 근육이 운동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의과대학의 의사가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웃음이 얼마나 큰 양약입니까? 여러분 웃으십시오. 얼굴을 펴십시오. 옛날 코미디 프로 중에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제목은 그런 면에서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꼭 웃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이 언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가를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많이 웃었을 때였습니다. '아 성도님들은 웃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고 설교자인 저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님들을 웃게 하고 즐겁게 할까? 도무지 제 생리하고는 맞지 않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시간만큼은 실컷 웃고 즐거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요? 교회는 축제가 있는 기쁨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든 감정들이 분출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황, 다행, 황당, 기쁨, 감사, 창피, 고독, 울화, 억울, 허탈
어떻게 할 때 이런 감정이 느껴집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방귀를 영어로 gas라고 하는데 그 단어를 사용하여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당황 :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데 gas가 나오려 할 때
다행 : 그 순간 먼저 뀐 사람의 냄새가 풍겨올 때
황당 : 그 사람의 냄새에 내 gas를 살짝 얹으려 했는데 소리나는 gas일 때
기쁨 : 혼자만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시원하게 한 방 날렸을 때
감수 : 역시 냄새가 지독했을 때 (음 나의 체취쯤이야--)
창피 :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탔을 때
고통 : 둘만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이 지독한 gas를 뀌었을 때
울화 : gas 뀐 사람이 내리고 그 사람의 채취를 혼자 느껴야 할 때
억울 : 그 사람의 체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타면서 얼굴을 찌푸릴 때
울분 : 엄마 손 잡고 올라간 꼬마가 나를 가리키며 "엄마 저 사람이 뀌었나봐" 할 때
허탈 : 엄마가 "누구나 gas는 뀔 수 있는 거야" 라며 꼬마를 달랠 때
만감 : 그러면서 그 엄마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살짝 미소를 전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비전의 지도자인 느혜미야를 통해서 52일 만에 성전을 건축한 후 에스라를 통해서 말씀의 부흥을 가져온 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합니다. 헌신할 때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 건축한 성전을 봉헌하는 낙성식하는 장면입니다. 성전 봉헌식이란 성벽과 성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예식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렬을 지어 성벽 위를 걸으면서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성벽건축을 방해했던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는 전에 어떻게 조롱하였습니까?"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란듯이 성벽 위를 행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성취해 나갈 때 방해하는 무리들의 말에 제한을 받지 말고 비전에 의해서 움직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성벽을 따라 행진하는데 그 행진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의 남단에 있는 분문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무리는 동쪽으로 한 무리는 서쪽으로 올라갔습니다. 동쪽으로 올라가는 무리는 에스라의 인도를 받았고, 서쪽으로 올라가는 무리는 느헤미야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성벽을 양쪽으로 타고 올라가서 북쪽에 있는 양문에서 합류하였습니다.
이 양문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에스라의 지휘아래 다 같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모습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분문에서 시작하여 한 팀은 에스라가, 또 한 팀은 느헤미야가 인솔하여 양문 앞에 이르니 그곳은 성가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리가 당도하자 찬송소리가 온 성에 울려 퍼지고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낙성식의 모습입니다.
낙성식의 꽃-즐거움
이 낙성식의 하이라이트를 43절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음으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무리들이 심히 즐거워하고,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고, 예루살렘의 그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기쁨의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멀리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환희와 축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돌아가실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웃음을 회복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가정에 평화가 옵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예배하는 이 성소가 기쁘지 않고 즐거움의 처소가 안 된다면 우리의 삶은 당연히 황폐하여 지고, 메마르고, 고통스럽게 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한 후 말씀을 통한 회복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을 얻고 즐거워하며 힘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이 본문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성취될 우리 덕일 교회의 비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21세기 비전이 성취되는 그 날,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으로, 모든 성도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교회로, 사람들을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오고 싶어하는 교회로, 사랑과 돌봄과 양육을 통해서 선교하는 구조를 담은 아름답고 신선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심령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냉랭한 믿음이 뜨거운 믿음으로, 식어진 가슴에 주님의 첫사랑이 채워지고, 비전과 열정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아 부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이 역량 컷 헌신한 후 성전을 주님 앞에 봉헌하는 그 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회자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춤을 추며 하늘의 하나님을 힘껏 찬양하는 그 날을 그려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이 우리가 이처럼 축제와 환희과 즐거움을 얻고 누리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진정한 헌신이 있을 때 그와 같은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시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성벽과 성문들과 도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기 전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몸을 정결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봉헌이라고 하는 말은 'Dedication'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치다,' 혹은 '주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성전과 성문을 바치기에 앞서서 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을 바쳤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니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풍성한 연보를 드렸던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그토록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을까? 고린도후서 8장 5절을 보시면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셨도다."
자신을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물질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진정한 헌신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었는데 옥합 속에 담겨 있는 향유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가룟유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방해하였습니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낫지 왜 그것을 허비하느냐?
똑같은 행위에 대해서 가룟 유다의 관점과 마리아의 관점은 180도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께 대한 순수한 헌신을 '허비' 라고 보는 것입니다. 소외 정의를 내세워 그와 같은 헌신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처럼 소중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름이 기억되리라." 2000년이 지난 지금 마리아와 가룟유다 가운데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진정한 헌신 속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헌신 속에 기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다고 말입니다. 남들이 보면 바보 같은 십자가,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의 능력이고 교회의 능력인 것입니다.
4년 전에 서울의 어느 교회의 비전과 리더쉽 축제에 참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 시간마다 은혜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마다 각 기관에 준비한 찬양과 드라마, 발레, 간증등을 함으로서 한층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가 하였습니다. 수고한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듣고서 한가지 귀중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풍성한 은혜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밤잠을 아끼고 나와서 연습하고, 그 많은 무대 디자인, 의상과 복장들을 전부다 자비로 준비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도우미들이 식당과 로비마다,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마다. 교실마다 예배당 입구와 현관마다 줄을 서서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환희와 감격이 충만했습니다. 섬기면서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돈을 받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원하여 시간을 내고 물질을 드려서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은혜가 있고 감동이 있고 드라마가 있을까요?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뉴저지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의 여전도 회장이 큰 부자였습니다. 3에이카의 대지에 잔디밭이 있고, 풀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사람인데 이 회장이 이런 광고를 해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폐품을 모아서 주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려고 하니까 광고를 좀 해 주시죠." 그 날 아침 목사님은 이런 광고를 했습니다. "본 교회 여전도회장님께서 이 시간 폐품을 모집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회장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교인 가정에 버려둔 폐품을 전부 수집해서 교회에 가져오시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팔아서 부인 회장의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은 여전도 회장이 얼굴이 빨개 가지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목사님, 저를 거지로 알았습니까 제가 언제 폐품 팔아서 먹고산다고 했습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당신은 예수님보다 부자입니다. 예수님을 폐품이나 쓰레기 같은 것 주워 다가 예수님께 드리려고 했으니 예수님을 거지로 알지 않았습니까?"
그때 여전도 회장이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하고 회개했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앙고백이 어떻게 되어지는가 상상해 보십시오. 항상 폐품을 모아드리는 것처럼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이것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는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헌신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주는 복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봉헌하는 그 날 우리는 성전 봉헌이전에 먼저 우리들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축제와 환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비전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그려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낙담과 절망의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기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느헤미야를 비롯해서 함께 있는 백성들이 꿈을 꾸기 시작하였습니다.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환경과 문제를 초월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손과 발을 움직였습니다. 방해하는 세력 앞에서도 비전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비전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비전은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왜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왜 환희와 감격과 축제가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비전을 감당하기까지 많은 눈물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비전이 성취되었을 때 얻게 되는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품고 있는 꿈, 비전이 우리 모두의 기도와 수고로 인하여 현실화되는 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축복을 실재로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저들이 축제와 환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전성취에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시면 43개의 그룹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역량 컷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전을 가지고 도전하고 일을 진행해 나간 지도자 느헤미야도 훌륭하였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주지 않고, 협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전을 건축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산발랏과 도비야를 제외하고는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서 참여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몇 사람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힘을 합쳐서 일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기러기들이 V자 모양을 하고 날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러기는 그렇게 하나되어 떼를 지어 날아다님으로 한 마리씩 이동할 때보다 대략 70%이상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앞에 있는 새가 날개를 움직일 때 발생하는 공기의 파도가 뒤 따르는 새들의 비행을 더 쉽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함께 날아가면서 서로 도우며 격려를 얻고 힘을 얻습니다. 선두에 선 기러기가 지치면 그 기러기는 V자의 맨 끝으로 이동하고 다른 기러기가 선두에 섭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기러기들은 소리를 내서 앞의 기러기들을 격려하며 힘을 줍니다. 기러기의 울음소리는 슬퍼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앞의 지도자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응원하는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시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공 느헤미야가 성건 건축의 비전을 감당할 때,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가운데 있을 때, 그는 맨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이 완공되고 봉헌하게 되었을 때 그는 맨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를 따라주었고 협력해 주었던 백성들을 이제는 보이지 않게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렵고 힘들 때는 숨어 있다가 일이 다 되었을 때는 앞에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대조되는 장면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다같이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전이 성취되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낮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인공이 되어 비전의 성취의 역사에 다함께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데 만 해도 그렇습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한 분이 있기 때문에 정돈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강단에 꽃을 장식한 성도가 있기에 삭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준비된 성가대와 기도하시는 장로님의 은혜로운 기도와 설교자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방에서 봉사하는 성도님들이 있기 때문에 맛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2부 예배만 나와도 되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1부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학교가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내하시는 분, 주차 관리하시는 분들의 수고가 있기 때문에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은 한 사람의 영웅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여하는 자,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자들에게 물론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고통과 고독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전을 성취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성전을 봉헌하는 낙성식 때 왜 저들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온 백성들 할 것이 없기 그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그들 모두가 헌신하고, 모두가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수고하였던 것을 통해서 비전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헌신하는 자가 되십시오. 비전을 성취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가정에 사업에, 자녀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