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기도를 하라 2002-03-25 17:42:00 read : 282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18:1-8 오창우 2002-03-17
오늘 우리가 본 성경 말씀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는 유명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의 능력은 어디에 있느냐? 간절한 부르짖음이냐? 그것은 아니다 정의로운 자의 기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는데 그 기도 응답의 능력은 간절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먼저 정의로운 자의 기도일 때만 가능하다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 1절부터 5절까지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오늘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1절에 나와 있는대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 이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번 기도하고 두 번 기도하는데 거기에서 그만두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할 수 있는 힘, 능력, 그리고 응답받을 수 밖에 없는 기도,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마을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참으로 힘이 없는, 세상적으로 말하면 힘도 없고 빽도 없는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오늘도 남편의 일만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그렇게 속이 상한 겁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수령을 찾아갑니다. 본문에는 재판장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구약의 `사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행정, 입법, 사법, 모든 3법을 다 쥐고 있는 그 지역의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이 재판관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재판관 나리,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원한이라는 말이 본문에 4번이나 나옵니다. 여기 나의 원한을 풀어 달라는 말은 죄없이 억울하게 당했으니 내 남편이 잘못이 없다 하는 것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에 보게 되면은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재판장에게 가서 권리를 찾아 달라는 겁니다. 과부의 소원은 권리찾기 운동이에요. 내가 왜 이유없이 손해를 봐야 하는가?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이 땅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무슨 일을 했는가 하면 미국에서 흑인들을 차별하는 인종차별금지법안을 만들어서 통과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기 전까지는 인종차별이 너무나도 심했습니다.
그의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라는 연설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리바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그의 꿈은 대단히 정의로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법안이 1964년도에 통과가 되었고, 이 일로 인해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죽기 하루 전날 밤,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오늘 밤 나는 매우 기쁩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 제 눈에는 주님이 오시는 모습만이 보입니다." 이것이 암살되기 전날 밤에 한 내용입니다.
그는 이 정의를 부르짖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다. 많은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죽어 가면서도 이 일 하나만 생각하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죽어갔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발견되는 것이 뭐냐면 마틴 루터 킹이 정의를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과부도 자기의 정의를 부르짖는 겁니다.
오늘 이 땅에는 자기 권리 찾기 운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비자 권리 찾기 운동, 유권자 권리 찾기 운동, 주부들은 전업주부라는 말을 쓰면서 `우리가 한 달에 버는 돈이 90만원이다 내가 일하는 것도 인정해 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들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를 찾는 것이지, 불의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자, 그 동안 억울하게 살아왔던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사실들이 신문, 방송, 잡지에 계속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정의로운 행동이 억울하게 감춰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상이 밝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어디 가서 죄짓고 못산다` 하는 말이 있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언젠가는 다 밝혀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과부가 재판관을 자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이 사람,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과부의 청을 들어줍니다. 과부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 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이란 사람이 변화가 된 것이냐?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불의한 재판관일 뿐입니다.
4절, 5절 말씀에 보게 되면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기도 응답의 중요한 원리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그것은 정의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과부가 자주 찾아갈 수 있었던 의지의 힘, 불의한 재판관이 삶의 변화도 없이 과부의 청을 들어 줘야 한다는 당위성, 그것이 뭐냐? 한마디로 과부를 억울한 사정을 아뢰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자의 권리 찾기 운동이었어요. 이 남편은 불의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고 의로운 일을 하다가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는 계속 억울함을 주장했고, 불의한 재판관도 이 정의의 호소에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도 내가 계속 간청하니까, 동정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나님의 응답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면 나의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이 바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이 지금 어려움 중에도 `이것은 단련이다. 훈련이다. 나는 이 어려움이 지나면 정금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확신을 합니다. 이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하는 자신의 삶의 정의가 낙심하지 않는 근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는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결국 그는 친구들과 아내의 비난과 수모를 주는 고통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기 42장 12절에서 17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도, 요셉이 노예로, 감옥의 죄수로의 고통 속에서도 승리를 하는 것은 모두가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중에도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송가 361장에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면 선한 사업을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쫓아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주님의 뜻을 살고 난 다음에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기도를 굉장히 크게 했어요. 옆에 사람들이 정말 듣기가 힘들 정도로 크게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큰소리고 응답하시기를 "야! 이놈아, 기도 크게 하지 말고 빵이나 크게 만들어라" 빵집 하면서 인색하게 굴었단 말이에요. 빵이나 크게 만들라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요, 언제나 기도는 두 종류의 기도예요. 그것은 예수 믿기 전, 후에 예수 믿는 목표가 달라지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예수 믿는 목표는 뭐냐?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의 기도의 목표는 뭡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성장해 가는 것이란 말이에요.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신앙의 초보 때의 기도는 뭐냐? 딱 하나, 회개하는 거예요. "나 잘못했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울고, 이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이것 때문에 밤을 세워요.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다" 그랬습니다. 세례, 오늘 초보입니다. 회개, 초보입니다. 죄사함, 초보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요?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군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라 그것을 위해서 해산의 고통했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는데, 늘 기도하는 것이 죄사함, 구원, 맨날 이것만 가지고 기도를 한다면 아직도 그리스도 신앙의 초보를 버리지 못한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기도의 응답이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세우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지방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어요.
"아버지, 그 동안 무고하신지요? 집안도 평안하십니까? 제가 자꾸만 돈 부쳐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할 수없이 100만원 부탁드리는데,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고향을 향해 무릎꿇고 용서를 빕니다. ……" 라고 간절하게, 장황하게 편지를 썼어요.
그러다가 얼마나 미안하지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추신
아버지, 사실은 제가 너무나 아버지한테 100만원 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우체부를 쫓아갔습니다. 편지를 빼앗아 태우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정말 다시 회수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러나 너무 늦어 우체부를 놓쳐 버렸습니다.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 그리고 보냈어요. 아버지가 보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부쳤는데, 다시 회수하고 싶은데 못했다, 이게 말이나 되냐 그 말이에요. 그래, 아버지가 답장을 썼어요.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셨나 보다. 나는 네 편지를 못받았다. 그러니 잘 지내라∼"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냐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묻고 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니까 영국에 해안에 전혀 모르던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영국에는 없던 꽃입니다. 알고 봤더니, 저 멀리 호주에서 피는 꽃들인데 그 씨앗이 바다를 따라 흘러와 가지고 영국의 해안가에 도착을 했다가 계속해서 모래가 쌓이니까 꽃이 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독일 사람들이 와서 폭탄을 터뜨리니까 뒤집어졌어요. 그 안에 있는 씨들이 꽃으로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된 무덤 속에서 나온 볍씨를 심으면 자라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 언젠가 꼭 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 그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불의는 숨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는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정의로운 기도가 되야 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기도가 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의로운 기도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정의로운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답게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 있는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가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 다 외우셨지요? 십계명을 쉽게 외우는 방법, 지난 번에 오창학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행시처럼 운을 떼어 주시면 제가 대답을 하겠습니다.
일 = 일절 나 외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 이상을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지 말라.
사 = 사업을 하지 말고 안신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오 = 오마니 아버지를 공경하라.
육 = 육혈포(대포 일종 살인 무기)로 살인하지 말라.
칠 = 칠보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짓증거하지 말라.
십 = 십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무슨 수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성경에 보면 영원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두 번째, 마태복음 24장 35절에 보면 말씀이 영원하다 그랬어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말씀 붙들고 살면 영원히 살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요한일서 2장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살 길은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그 말씀과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씀 안에 살아가야 되는 것이에요.
2)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정의롭게 살아가는 두 번째 비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충만을 받으셨답니다. 그런데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충만하고 능력이 있는가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겨자씨만한 믿음, 작은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 명하여 바다에 빠지라 그러면 그대로 된다고 그랬으니까 나도 그래야 되겠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삼각산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들려서 서해 바다에 빠져라" 빠졌을까요? 안 빠졌을까요? 제가 보니까 삼각산 그대로 있더라구요. 안됐어요.
그래서 속상해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했어요. "어째서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야! 이놈아, 삼각산을 서해 바다에 빠뜨려서 뭐하려고 그러냐?"
여러분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직분 왜 받으셨습니까? 뭐에 쓰려고 받으셨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가대의 사명을 주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사명 감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는 자만이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장식품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왜 받았습니까? 말씀보고 이 말씀 안에 있는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 우리의 직분이나 사명을 장식품처럼 생각하겠습니까? 언제까지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순절집회를 남의 일로 생각하겠습니까? 죽도록 충성하라매요. 교회가 이런 일을 할 때에 "나는 바빠서 못한다" 물론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과 같은 은혜를 이 집회에 받으시겠냐 그 말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어요.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있어요. 그러나 게으르면 있는 것도 빼앗기고 쫓겨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난 지난 주간에 권사님들한테 그랬어요. "권사님들, 멀리 계신 분들 못오지요?" "예, 못 오지요. 뭐 어떻게 올 수 있나요?" "고 말밖에는 할 게 없습니까? 충성한다는 게 뭡니까?"
그래, 제가 그랬어요. "그러면 우리 교회 교육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1주일에 하루만은 우리 권사님들이 총동원하자" 이렇게 얘기하고, "여기 교육관 얼마나 넓고 좋습니까?" 오늘 보니까 개나리꽃들도 피었더라구요. "거기서 주무시고 새벽기도하고, 그리고 갑시다."
놀러 가는데 시간 내잖아요. 뭐 좋은 잔치자린데 하면 시간 내잖아요. 말씀의 잔치에 우리가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여러분, 여기 성가대가 있어서 말씀드리지만, 성가대가 어떻습니까? 금요심야기도회에 연합성가대 서면 얼마나 좋겠어요. 외부 강사도 오시는데.
"우리 늦어서 집에 못간다." 집에 못가는 거 왜 걱정합니까? "우리 여기서 하루 밤 자자" 주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가대 서고, 은혜 받고,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 편할 때, 나 쉬울 때, 그것에 맞춰서 신앙생활한다? 그것에 무슨 역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내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정의의 생활을 보여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나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충성하십시다. 안되는 것 한번 해보십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두주간 동안 우리 모든 부서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열심과 이런 생각들을 가진 분들이 한 부서에 한 두분만 있어도 그 부서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3) 하나님께 헌신을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께 헌신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4편 3절에 "주께서는 주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고 했습니다.
어떤 환자가 병원에 갔어요. 아프니까 갔지요. 진료를 마치고 의사가 진료카드에 작은 글씨로 뭘 쓰는데, 옆에서 요렇게 보니까 이렇게 쓰더라구요. "소근암" 이것을 보고 환자가 무슨 생각이 들었겠어요. `아, 내가 암에 걸렸구나`
"선생님, 제가 어떤 병에 걸렸습니까?", 의사가 대답하기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하시면 금방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
환자가 얼마나 눈치가 빨라요. `거짓말하고 있구나`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어요. "선생님,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해 주세요. 제가 `소근암`에 걸리면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의사가 대답을 않고 한참을 침묵하고 있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소근암을 제 이름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거다` 하는 믿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주간 동안 `돈과 신앙`이라고 하는 제하에 돈에 대한 우리의 신앙관에 대하여 얘기를 같이하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생활이나 구제나 하는 이러한 일들, 가장 기본적인 단위지만 우리가 주를 위해 이런 일들을 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것이 내 마음에 가슴 떨리는 운동으로 남아요. 자그마한 일만 봐도 `내가 헌신 제대로 안하니까 하나님이 내게 벌 주시나 보다` 두려워 떨며 사는 그런 신앙인들을 없지 않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난 너무나 마음이 아파요. 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정정당당하지 못해요? 그 이유는 딱 한가지예요. 하나님 앞에 정의롭게 믿음 안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맡겨진 직분대로 살지 아니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내놓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믿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고, 인정받고, 복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귀한 그릇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정의의 기도는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기도는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자주 찾아가고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은 뭐냐면 정의는 살아서 역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힘을 다해 우리의 믿음 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밤낮 울로 부르짖어야 그 원한을 풀어주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풀어 주시냐면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다" 여러분, 당장 안돼도 주님이 오실 때는 다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계시록 6장 9절부터 11절에 있는 말씀 함께 보시겠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아멘.
내가 억울한 일 당해서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갔어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너 죽었으니까 끝난다` 그것이 아니고 그 원한을 풀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역사는 마지막 때에는 다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리가 육지에서 걸을 때는 뒤뚱뒤뚱 걷는 게 참 보기가 싫은데요, 물 속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어요. 백조, 얼마나 우아합니까? 아주 그렇게 여유 있게 갈 수가 없어요. 물위를 간다구 해서 물이 뛰기나 합니까? 얼마나 여유 있게 갑니까?
그런데 수중 카메라를 가지고 오리를 밑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봤더니 그 오리가 발을 끊임없이 흔들어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우아하게 가더라구요.
여러분 신앙생활에 우아하게, 경건하게, 여유 있게 이런 생활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그마한 일에 화내고 섭섭하고, 시험 들었다 그러고. 이런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가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 믿음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야 우아한 신앙생활이 나오는 거예요.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 안에 사시되 말씀 안에 푹 잠겨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차광호 목사님이 `달마야 놀자` 그 영화를 봤다 그러더라구요. 그랬더니 `달마야 놀자`에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게 나온다며요. 그랬더니 깡패 두목이 항아리를 갔다가 우물 속에도 던지니까 물이 꽉 찼다구요. 그래서 이 깡패가 절에 살게 되었다 그런 내용인 것 같아요. 안봤으니까 모르겠는데, 맞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려면 은혜에 풍성히 빠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릎이나 가슴에 와선 안돼요. 완전히 잠겨야지. 계속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저께는 우영수 목사님께서 찬밥과 더운밥의 은혜를 얘기하더라구요. 사람들이 찬밥 먹기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찬밥 얘기를 그렇게 잘한대요. 내가 옛날에 이랬다, 지금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찬밥 많이 먹으면, 그거 잘못 먹으면 쉬어서 배탈난다 그러더라구요. 밥을 더운 밥 먹듯이 우리 은혜도 늘 따끈따끈한 은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답니다. 어떤 자의 응답이냐? 기도의 시간이 많다?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의로운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열심 있다 그럴 때, 기도많이 한다, 중요합니다. 열심히 모인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헌신하며 살고, 사명감당하며 살고, 은혜 속에서 늘 사모하면서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열심히 예수 믿는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이요, 정의로운 기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