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전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8편 25절에 "여호와
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의 히브리어가 바로 '호산나'입니다.
종려주일인 오늘, 우리도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호산나!'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의 "호산나!"와 달라야
합니다. 적어도 다섯 가지 점에서 달라야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은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에서 이제 우리를 구원하
소서!'하는 뜻으로 "호산나!"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으로 "호산
나!"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의 "호산나!"는 일시적인 "호산나!"였습니다. 오늘,
주일에는 "호산나!" "이제 구원하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금요일에는 "십자가
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9) 하는 아우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끝까지 '호산나!' 해야합니다.
우리의 '호산나!'는 영원한 '호산나!'이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은 큰 소리로 "호산나!"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먼저 마음속으로 '호산나!'해야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은 군중심리로 무조건 "호산나!"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조용히 '호산나!'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은 민족적인 감정으로 "호산나!"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세계를 향해 '호산나!' 해야합니다.
종려주일에 이 다섯 가지 우리들의 "호산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오늘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으로 "호
산나!"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먼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가
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이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몰래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고서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
다(막10:35∼37). 하나는 좌의정을, 하나는 우의정을 시켜달라고 인사청탁을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이유를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로마의 무찌르고 왕이 될 것으로 믿었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회계이니까 경제 담당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자리는 사전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믿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배신감을 느끼고 예수님
을 팔아 넘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가면서 속으로 '내가
예수님을 먼저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먼저 배반했다.'고 했을 것
입니다.
제자들이 이 정도일 때야 일반 군중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떡 다섯 개
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인 저 분, 죽은 나사로를 살린 저 분
이 왜 로마 사람들을 일거에 무찌르지 못할 것이냐?' 이렇게 믿으면서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하는 뜻으로 "호산나!"를 열심히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해방을 주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지 않고 말을
타고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가장 미숙한 이해입니
다.
동시에 예수님에 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인식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사실이
지만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고 과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출애굽기」를 단순히 노예생활의 압제에서 벗어난 기록으로 이
해합니다. 특별히 해방신학,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민중신학으로 이름을 바꾼
이 산학에 몰두하는 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는 성경보
다 이스라엘의 역사기록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이 격에 더 맞습니다. 「출애굽
기」는 세속민족에서 영적 민족으로 전환되는 영적인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해방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더욱 분명히 알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인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는 뜻으로 "호산나!" 하시기 바랍니다.
이수정(李樹庭)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1882년에 농학을 연구하기 위
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으로 갈 때 이 분의 가슴에는 '내가 농학을 연구
하여 우리 민족을 굶주림에서 구하리라!'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우리말로 번
역하는 일을 합니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곤궁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동생을 시켜 그
때로서는 큰 돈이었던 천 원을 보냅니다. 동생은 일본에 와서 형이 어렵게
지내는 것을 보고 '형님, 여기서 왜 이렇게 지내십니까? 돌아가십시다.'라고 권
했습니다. 이수정은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 또한 돌아갈 이유도
없다. 나는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기선보다도 더 좋을 것을 발
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영적인 해방과 민족구원의 위대한 길을 발견한 감격의 울부짖음이었습
니다.
영적 해방이 이와 같이 중요합니다.
종려주일이 영적인 해방자로 예수님을 새롭게 맞이하는 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들의 '호산나!'는 '영원한 호산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로마 총독이 있는 곳으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나는 이렇게 하겠다! 너희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
을 일으킨 것 알지? 이제 다시는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는 정치적인
공약을 발표하고 내각을 구성하고 그 명단을 발표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땅의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일들을 주로 가르치
셨습니다.
사람들은 '속았다!'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요일 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당하
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한 일이 금요일이 시작되는 자정에 일어나서 금요
일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무찔러버릴 줄 알았던 로마 병정들에게 반대로 무기력하게 체
포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앞에 끌려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칩니다. 십
자가형의 단초는 로마 총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 군중들에게 있었습니
다. 월요일과 금요일, 180도로 태도가 바뀝니다.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외치던 것은 아득한 옛일처럼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호산나!'해야 합니다. 월요일에도 '호산나!' 금요일에도 '호산
나!''해야합니다.
패배 당한 것과 같이 보이는 예수님을 향해서도 '호산나!' 해야 하며,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면서 때로는 넘어지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을 뒤따르
면서도 '호산나!'해야합니다.
이 때의 '호산나!'가 더욱 값진 호산나입니다.
처음에는 뜨겁게 믿던 사람이 나중에는 더 싸늘하게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닙니다. 우리들의 호산나 소리는 점점 더 커져야합니다.
영원한 호산나, 점점 더 큰 목소리로 호산나를 외치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들의 호산나는 '마음속의 호산나'이어야 합니다.
마음속의 호산나는 마음으로 조용히 '예수님,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
신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많은 유혹과 시험과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구
원하소서!' 조용히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
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고백과 확신이 없이 입으로 '호
산나!' 하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 달린 꽃과 같습니다. 얼마가지 못해 시듭니
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대화도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일,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대화하는 일이 모두 중요하지만 내면과의 대화가 중
요합니다.
질병의 경우도 내면의 상처가 먼저 치유되면 외부의 질병이 치유되는 일이 많
습니다.
넷째,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호산나!'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오늘 예루살렘 군중들은 군중심리로 "호산나!" 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0절을 보면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
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일을 퍼뜨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
을 듣고 더욱 열광하여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이 "호산나!" 하니까 따라서 "호산나!" 하는 사람들
이 많았습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호산나!"를 열심히 외치고서 옆의 사람을 찌르며 '이거 봐!
내가 지금 '호산나'라고 했는데 호산나가 무슨 뜻이지?' 물어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이거 봐! 내가 저기, 나귀 새끼를 탄 사람을 보고 '호산나!' 열심히 외쳤는
데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지?'라고 묻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도 몰라! 나는 자네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했는데…' 했기 쉽습니다.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합니다. 이
센세이셔널리즘은 사실은 교회 안에서 더 심합니다.
우리들의 '호산나!'는 군중심리의 호산나, 센세이셔널리즘의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하게 알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다!' 확
신하고서 '호산나!' 해야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호산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성도들이 교회에 등록할 때 쉽게 등록하지 않습니다. 여러 주일 다녀보
고, 여러 교회 돌아보고 그런 다음에 비로소 등록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면서
등록은 하지 않는 분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신중한 태도는 좋다고 여겨집니다. 교회를 잘 택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자리에도 그런 분들이 여럿 계실 텐데 미루지 말고 등록하세요. 목양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다섯째, 우리들의 호산나는 세계를 향한 호산나이어야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민족적인 감정을 가지고 "호산나!" 했습니다.
13절 끝 부분을 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어" 했습
니다.
마태복음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눅21:9).
마가복음에는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
(막11:1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호산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를 보며 '호산나!' 해야합니다.
'주여 보소서 저기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나이다. 북한 동포들이 있나이다,
중국의 13억 인구가 있나이다, 이슬람권의 주민들이 있나이다,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하는 뜻으로 '호산나!'해야 합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우리도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호산나,
잠깐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부르는 호산나,
먼저 마음속으로 외치는 호산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외치는 호산나,
세계를 향한 호산나,
이와 같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귀한 종려주일이 되기를 지금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여러분과 저의 마음 가운데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