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가 바라는 목회자 상 / 심방사역의 중요성 2002-03-27 18:23:53 read : 474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2월 12일부터 15일까지 감리교교육원에서 열린 목회자 예비학교에서 사회평신도국 총 무 이상규장로가 발제한 ‘평신도가 바라는 목회자상’을 게재한다<편집자주>
1. 섬김과 모범으로의 권위
지도자들이 갖추어야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권위를 인정받는 일일 것이다. 특히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목회자들은 평신도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권위에 대해서 논하려면 권위와 권위주의에 대해 함께 논해야 될 것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그 뜻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며 지도할 때 학생들보다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있다면 그 교수는 분명 존경을 받고 그 교수의 주장은 권위가 되지만 결코 권위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교수가 단순히 교수란 이름과 교수란 직책을 가졌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감화를 주지 못하면서 교수의 말만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학생들에게 일체의 비판을 금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권위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땅히 갖추어야할 인격과 지식 그리고 성품을 갖추어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어떤 말씀을 전하고 평신도들이 그 말씀에 모두 순종하게 될 때 그것은 진정한 권위가 된다. 그러나 단순히 안수 받은 목사이기에 그 사실 자체가 어떤 권위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면, 즉 목회자로서의 자격이나 인품이나 지식은 소유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지도 못하면서 어떤 권리만을 행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권위를 인정받고 으뜸이 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마 20:26∼28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고 살후 3:9에도 보면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오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섬기는 자는 권위를 인정받아 으뜸이 되며 주어진 권리를 올바로 행사하는 모범을 보일 때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땅히 바로 가르쳐 주어야할 일인데도 내가 모범을 보이지 못했으니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올바로 가르치는 일에 주저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한 생각일 것이다.
이러하기에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헌신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도인 존 칼빈(John Calvin)은 이와 같은 목회자의 권위를 ‘불편한 권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높아지는 권위’라기 보다 오히려 ‘속박하는 권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에서는 자발적인 참여가 어렵게 된다. 시키는 대로만 순종하는 연습을 많이 하여 그렇게 길들이면 자발적으로 참여할 생각이 별로 나지를 않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빌레몬서에 보면 정말 지혜로운 표현 하나가 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오네시모를 자기 옆에 두고 좀 시중을 들게 했으면 좋겠으나 몬 1:14절은 “다만 네 승낙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나 사려 깊은 생각인가?
어떤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게 하더라도 “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해서 그 사람이 하게 하는 것과 “자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번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이 사람이 그 일을 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겠는까?
전자는 단지 목사님의 뜻에 순종하는 1회성으로 끝날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가 자의로 행하는 것이 되어 자발적으로 계속 그 일을 잘 감당하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태도보다는 섬김과 모범의 목회로 권위를 인정받아 건강한 목회자로 존경받게 되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필자가 관계한 두개의 신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교인들의 신앙의식을 조사하는 설문에 심방에 대한 중요성에 대하여 설교와 비교하여 묻는 항목이 있었다. 그 설문조사에 의하면 심방은 설교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일반적인 목회에서는 심방사역은 노약자나 환자 등 위기를 만난 사람을 찾아가는 방문 정도로 이해한다. 즉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사역으로서의 심방이다.
목회자의 심방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고 가정에서 예배의식이 치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목사가 단순히 찾아가 대화만 하고 방문을 끝나면 교인들은 목사님은 다녀가셨는데 심방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이해하면 심방은 상담하고도 접근형식이 다르다. 상담은 상호교감적이지만 심방은 일방적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심방한 목회자는 대화관계가 형성되기도 전에 먼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차나 과일을 들면서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구약성서의 제사장이 민족의 속죄 제사를 드리며 안수하니 염소가 죄를 지고 광야로 향하던 모형을 재현하는 것처럼 목회자가 심방을 하면 문제가 자신에게로부터 목회자에게 옮겨짐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심방사역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한국인은 특별히 제사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인정의 해석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한국은 일반종교의 사제역할을 하던 무녀들이 가정의 여인들을 만나 가정의 대소사를 해결해 주던 전통이 있었는데 심방은 그런 관습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인생활에 밀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한국은 제의 민족이라 한국인의 모든 의식은 제사와 관계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매우 종교적인 민족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제사의식이 심방예배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심방사역은 위기심방이나 특별하게 요청된 심방만이 아니고 대심방 혹은 정기심방이 일반화 되어 있어 서구교회와는 확연히 다르다.
특히 여성 협력 사역자를 중심으로 실행되는 심방사역은 여성 교인들에게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는 사회적으로 개화기, 일정시대, 한국전쟁시대, 전쟁 후의 혼란기, 전쟁 후 사회적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위로 받을 곳 없던 사람들, 특히 남성중심 사회에 늘 소외자로 신음하던 여성들에게 심방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한 인격으로 인정하고 대화하는 시간인 심방은 그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주는 목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심방을 만남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제사로 이해하려는 한국인의 의식은 문제가 있다. “병적인 종교는 영성적인 욕구를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며 현실을 부인하는 우상숭배의 방법으로 충족하려고 할 때에 나타난다”고 하는 크라인벨의 지적처럼 목회자의 심방을 무속적으로 이해하려는 한국인의 심방의식은 확실히 병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조망하면 심방사역을 위기심방이나 특수심방으로만 이해하는 서구사회보다 오히려 정기적인 일반심방이 잘 정착되어있는 한국교회의 목회환경에서는 심방사역자의 역할을 개선하기만 하면 교회공동체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사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목회상담적 접근으로는 장기간을 요하는 문제라도 심방을 통해서는 단번에 해결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목회는 목양이기에 심방사역의 소홀은 목자가 양을 돌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심방사역이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의식속에 심방에 대한 중요한 의식이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출산 백일 돌 세례 입학 졸업 군입대 결혼 죽음 추도 등등의 경우 실행되는 심방, 이외에도 위기관리 심방과 축하심방, 그 밖에 새신자 혹은 불신자들에게 신앙성장을 목적으로 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도심방 등 많은 종류의 심방이 요청되고 있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한국교회에서는 심방사역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때로는 심방사역에 대한 태도가 곧 목회자의 목회적 열정과 성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 목회에서의 심방사역은 설교만큼 중요하다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교인들의 심방요청을 수행하는 차원의 수동적인 심방사역이 아니라 길 잃은 양들 찾아 산을 넘고 내를 건너는 목자처럼 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심방이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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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사역의 목표
‘관계의 힘’을 키워가는 심방사역
심방사역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고 또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준비없이 심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심방을 통한 대화는 기획된 대화가 아니기 때문에 단기상담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고, 과중한 목회사역으로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다.
더욱이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시대적인 문화는 심방사역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사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심방사역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윌리암 클레쉬와 촬스 째클은 목회적 돌봄에 대한 역사적 유산들을 수집하여 목회의 기능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ing) 화해(Reconciliation)가 바로 그것이다.
목회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으로 상처가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가 되도록 하고, 상황이 변경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이에게는 지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회이다.
결혼상담과 같이 무엇인가 결단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적절하고 합당한 관계를 맺도록 돕는 것이다.
이 네가지 기능에 크라인벨은 양육(Nurturing)이라는 한가지 원리를 더 첨가한다. 그것은 과거의 목회는 위기를 만난 사람들을 찾아가 위기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으로 작용하였지만 현대의 목회는 위기를 만난 사람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도 목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심방사역도 단순히 문제의 해결만을 위한 돌봄이 아니라 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사와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돌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혹시 위기를 만난 사람을 심방한다 할지라도 단순히 위기극복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신앙인으로 양육하는 목적으로 심방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마치 실패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사역자로 거듭나게 된 것처럼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섬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세움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그것을 심방사역의 새로운 목표로 삼는다
심방의 정의하는데 있어 토마스 오든은 기독교의 진리를 신자의 개인적인 환경에 적용시켜 주는 일 이라고 하고 크라인벨은 인간들의 모든 관계와 사회적 상황에 있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관계형성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인간은 전인성이 결여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영혼을 통해서만 전인성을 달성할 수 있는데 그 영혼은 타인 속에 존재하는 그것의 다른 면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학자들도 교육에 있어서 일차적인 교육의 언어는 말로 된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라고 한다.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영향력이 큰 것은 부모의 말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따뜻하고 의지할만하고 관심 있는 돌봄 때문이다.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언어의 힘이 아니라 관계의 힘이다. 이것은 심방사역의 목표를 무엇인지 잘 설명해 준다. 그것은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야 한다.
교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해서 교회에 정착시키고 또 어떻게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한다. 필자가 접한 자료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처음 인도되는 이유에 있어서도 광고에 의해서는 2%, 목사를 통해서는 6%, 조직적인 복음전도를 통해서는 6%였지만 친구나 친지등 관계가 형성된 사람을 통해서 인도받은 사람이 86%나 되었다.
교회에 정착되는 것도 그 교회안의 사람들과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정착되는 것이다. 예배에 잘 참석한다고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교회의 정착은 그 교회안에 친구가 만들어 졌을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믿음과 교회로 안내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언어는 관심깊음(Caring)과 사랑많음(Loving)이었다고 보고한다. 뿐만 아니라 신앙으로 양육되는 것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만큼 변화된다.
이것은 마치 관계가 많은 사람은 뿌리가 깊은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했을 때이다. 그러기에 요한 웨슬레가 새로 믿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이 관계성이다.
직고할 수 있는 제자됨을 통해 속회회원들의 관계성을 견고하게 함으로 감리교 운동을 이끌었다. 심방사역의 목표는 바로 그 관계성의 회복하는 것이요 교회 공동체는 이 회복된 관계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심방사역이 현대의 목회환경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심방사역을 협력목회자나 혹은 평신도들에게 맡기고 다른 사역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분주한 현대 목회에서 시간소모가 많은 심방사역에 집중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초기교회시대에는 심방이 목회자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통신 수단으로 손쉽게 목회자와 대화를 할 수 있고, 방송매체들은 목회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도 신앙지도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개인주의화하는 사회적인 현상과 맞벌이 가정문화는 심방사역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회중의 증가는 담임목회자로 교인들과의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현실적으로 어렵게 하는 것이 목회적인 환경이다.
투루나이젠도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대화에 달려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만 주력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양육하고 치유하는데 효과적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에 대한 목회적 돌봄이 심방사역만을 통해서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를 통해서 혹은 예배나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돌볼 수 있고, 더욱이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현대사회에 또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말미암아 대형화되는 도시교회 환경에서 한 개인 개인에게 관심하는 심방사역에 목회는 오히려 진부하게 여겨지지만 목회가 무엇인가? 목회가 한 사람 한사람을 섬기며 돌보는 것이 아닌가? 이런 가정을 한다면 이 돌봄의 필수적인 것은 목회자가 양을 아는 것이다.
양을 알지 못하고 돌보는 것은 거짓이요 오히려 상처가 되고 폭력이다.
심방사역이 중요한 것은 바로 목사가 교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일 뿐 아니라 목회를 곧 섬김이라 이해할 때 그 섬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역이 바로 심방사역이기 때문이다.
힐트너라는 목회신학자는 다른 측면에서 심방사역의 중요성을 표현한다. 목사가 교인을 돌보는 것은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일로 심방의 사역은 목회자의 본질적인 임무라 하였다. 심방사역을 목회의 한 기능으로 이해하지 않고 목회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다.
목사(pastor)라는 말이 지금은 전문인을 칭하여 사용되고 있지만 이 말의 희랍어 어원은 포이멘(poimen)이다. 뜻은 양을 친다는 의미의 목양(shepherding)이라는 말이다. 이런 어원을 이해하면 목회는 양을 돌보는 것이다. 양을 돌보는 일이 목회의 본질로 양을 돌보는 일을 통해 목사는 목사가 되어가는 것이다. 한 마리의 양을 돌보기 위해 산을 넘고 내를 건너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돌봄으로 자신을 섬기는 자로 동일시(Identify)하는 것이 목회자의 우선 과제이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침체상태에 있다. 이 침체를 극복하는 길은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을 인식하고 섬기는 종으로서의 목회자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심방사역이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심방사역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심방사역이 목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현장이 되기 때문이다. 왜 보수주의 교회는 성장하는가? 라는 책을 쓴 딘 켈리는 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는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에 대한 엄격함 때문이라 하였다.
심방사역의 회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목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일어날 때 교회공동체는 새로운 변화를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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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렬 목사(효성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