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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권능
    2002-04-01 13:50:05   read : 256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빌 3:10-14> 2002년 3월 31일

    □ 부활의 권능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장 10절-14절>

    1. 인생 최대의 슬픔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 죽음이 남의 죽음일 때와, 나와 나의 가족의 죽음일 때, 슬픔의 정도는 다릅니다. 남의 죽음일 때는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을 경우들이 있지만, 자기 가족이 죽었을 때는 모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가족이 먼저 가면 눈물로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 떠나야할 존재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막상 현실로 나에게 닥칠 때는 당황하고 모두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죽음이 갈라놓는 순간 모든 눈에는 이슬이 맺힙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도 죽음 앞에는 보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아버지도 얼마 안있어 우리를 떠나갑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면 과연 죽음 앞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온갖 것들로 위로를 하려고 해도 위로 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불사약을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강을 위하여, 장수(長壽)를 위해 그토록 노력들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반쪽만의 믿음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살아있는 동안에서만, 신앙이라면 반쪽 신앙이란 말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 미쳐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주님께서 물었습니다.

    2.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부활 신앙>으로 뿌리 내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여 소위 완전범죄를 꿈꾸며 죽여서 문제의 해결을 보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끝장이란 생각처럼 어리석고 위태로운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의 사회 모든 범죄의 양상을 보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덤이 인생의 종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임을 보여준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부활(復活)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덤의 돌을 굴려버린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힘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무덤을 헤치고 나올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 이래 죽었다 다시 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 스스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부활의 권능은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오는 힘입니다. 하나님만이 부활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주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가 이 땅에 와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우리들에게 바로 부활신앙을 갖게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왜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하느냐? 하면 부활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활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나의 이성과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생명을 다루는 과학자들이 도리어 조물주의 권능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인간 유전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오묘하신 생명의 세계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를 지극히 일분야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조절할 뿐입니다. 그래서 <생명공학>이란 말을 사용하는 줄 압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것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3.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이 어디에서부터 들어왔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죄의 값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죄로부터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도 없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최고의 형벌이 사형에 처하는 형벌입니다.
    죄의 마지막 값을 치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죽음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으로, 지어놓은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만일 죽음이 끝이라면 간단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생의 철학이 무엇이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방탕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윤리니, 도덕이니, 질서니, 선행이니 하면서 살겠습니까?
    <지존파> 같이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도 생기는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내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나 철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원수가 둘 있습니다.
    ① 하나는 허무주의요, ② 또 하나는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예술, 철학, 사상 등 여러가지로 말하지만, 다 묶어보면 허무주의로 끝납니다. 맹랑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렵게 오랫동안 한 공부의 결론이 허무주의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그것밖에 더 생각할 수가 없나봅니다.

    또 하나는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유물주의 사상은 '물질이 제일이다'고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몸서리치게 생각하는 공산당이 유물주의 아닙니까?
    유물주의 사상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공산당은 물질이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인생관에서 유래되고 인생관은 내세관에서부터 나옵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과 내일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의 차이는 굉장히 다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이 말은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과, 부활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란 말입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역사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늘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사망의 권세 하에서 사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사망의 권세에 얽어 매일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부활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말하고, 부활을 믿으라고 한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반 종교의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도마에게 보여준 사건이었고 승천할 때 하늘을 쳐다본 사람들의 확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너희가 본 그대로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역사적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믿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십자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얼른 보면 십자가는 실패요 좌절이요 절망이요 죽음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 그 죽음 뒤에 부활사건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창조입니다. 이것이 더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은 즉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기에, 이제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으로 다시 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신앙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악과도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더욱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거나, 의로운 죽음을 참아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부활의 능력을 믿는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신앙을 갖고 살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면서도 눈물 뒤에 위로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외친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가득 채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귀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고전 15:31)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그는 날마다 죽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처럼 죽으려고 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십자가 뒤에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내일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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