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님이 주신것 2002-04-01 14:36:57 read : 285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20:19-23 // 2002년 03월 31일
이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시로 내려와, 기독교의 여러 가지를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다.
일류 상품에는, 언제나 유사품이 있기 마련이다.
일류 상품을 흉내를 낸 길거리 제품은, 외모로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질은 전혀 다르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좋은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부활만은 모방할 수 없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없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부활 신앙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20장 1절 이하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랬다.
방부제를 들고, 아침 일찍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날이 밝기가 무섭게, 무덤을 찾아갔다. 열심은 있었지만, 죽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다.
그래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무덤 속에 계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계속 달아놓고, 무덤 속에서 주님을 찾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십자가는, 빈 십자가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는 비어 있다.
성도들이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항상 과거에 매여 산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낙심하고, 후회하고, 두려워하여, 현실을 도피하려고 한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과거에 매여 낙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눅24:15-).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면,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지면, 자신도, 이 세상도, 변화시키는 능력의 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무덤 속의 예수님을 찾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기 바란다.
그때 비로소 성령으로,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진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선물이 주어진다. 3가지 선물을 주신다.
1. 두려움을 이기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신다(19, 20).
죽음은 인류 최대의 적인데,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평화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히2:14,15에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오셨다고 했다.
이 땅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죽음만은 이길 수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제 아무리 위대한 위인들이라도 - 공자, 석가, 세종대왕, 아인슈타인…
제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 징기스칸, 나폴레옹, 진시황…
또한 큰 영화를 누린 사람도 죽음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다. - 솔로몬, 록펠러, 이병철…
죽음 앞에서는 돈도, 학식도, 사랑도, 권력도 다 필요가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떨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다(19).
그런데 20절에 예수님이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때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알고 기뻐하였다.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부활은 헬라어로 " "(아나스타시스)라고 하는데, '다시 일으키다,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마치 잠에서 일어나듯, 그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말한다.
이처럼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셨다. 할렐루야!
그렇기에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바울처럼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5).
예수님은 죽음을 가져온 원수, 사망의 세력을 정복하셨다.
사망을 정복하신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권고하셨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고 하였다.
그런데 스스로 메뚜기같이 생각하면서, 어둠 가운데 문을 걸어 잠그고, 왜 떨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성도의 능력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데 있다.
문 잠그고 벌벌 떨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거부하지 마시고, 만나기 바란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한다.
2.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요20:22).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2)고 하셨다.
이 숨은 하나님의 숨결로,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성령이다.
그래서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생기가 흐른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역사로 부활하셨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예수님을 부활시킨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기 바란다.
성령을 받으라( ; 과거 명령법)고 했는데,
영접하라(요1:12)는 뜻으로 성령을 '환영하고 모시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성령님을 영접하면, 어떤 변화가 나타납니까?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의 모습은,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 받은 후, 제자들의 모습은 담대하게 나가서 외쳤다. 능력 있는 전도자로 변했다.
전도는 인간의 말이나 능력과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자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 받고 나가서 전하자, 수다한 무리가 주께 돌아오게 되었다(행11:21).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의 모습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쩔쩔맸다(막9:18).
그러나 성령 받은 후, 병들고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나오는 자마다, 다 나음을 얻었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6).
성령은 죄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영이다. 그래서 우리 죄를 고백해서, 깨끗하게 만들어 준다.
그릇이 더러우면, 맛있는 음식을 담을 수 없다. 사람의 심령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심령이 죄악으로 인해서 더러워져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는다.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공급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살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으로, 성경에 4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주님을 믿지 않았다. 이것은 죄이므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교제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난다.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설교할 때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고 했다.
자신이 진지하게 회개하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려세울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이 권세를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서,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21).
3. 믿음을 주신다(요20:27-29).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고 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24).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도, 본 사람들의 증거도 믿지 못했다.
지금도 혹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간증도 믿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의심은 왜 생기나? 도마는 똑똑했지만, 공동체 안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떠나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공동체를 떠나면, 꼭 다른 짓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주님은 인자하게도, 이 도마의 믿음 없음을 치유해 주신다.
그러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 현재 명령법, 이미 진행중인 동작을 멈추게 함, 믿는 자가 되라"(27)고 하셨다. 결국 믿음이 중요하니,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서, 네가 무너졌으니, 나는 네 믿음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다.
신앙은 보고 느끼고 만지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믿어야 한다.
말씀은 언제나 환경보다 앞서간다. 부활의 사건이 있기 전에, 먼저 말씀이 계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즉흥적이 사건이 아니라, 먼저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고 하셨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대로 이루어졌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음을 믿는가?(눅10:19).
온전한 십일조를 하시나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이 창고에 넘치게 된다고 했다.
목사님만 아니라, 성도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는 말씀을 믿는가?
다른 것을 다 믿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에 말씀 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이 되시고, 생명 되심과, 나의 부활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헛된 믿음을,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했다(고전15:2-4).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죽이던 바울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까닭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기 때문이요, 자신도 부활과 영생 천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고전15:19).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니, 구원도 없고,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전15:17).
그러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불과하다.
성경을 왜 기록했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 믿음을 주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먼저 증거 하시고,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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