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승리 2002-04-01 15:05:49 read : 3135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전15:50-58 // 2002.3.31
2002년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영광스럽고 감격에 찬 생명의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되새기는 감격의 새아침! 부활 생명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는 어둠이 하나님께 찾아와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태양이 자기가 가는 곳마다 쫓아오니 귀찮아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을 불렀습니다. "태양아. 네가 까닭 없이 어둠을 쫓아다닌다면서." 태양이 어이없어 하면서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둠을 제가 쫓아다니다니요. 너무 억울하니, 어둠과 저를 대질 신문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과 어둠을 법정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출두를 했지만, 어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오늘까지도 태양 앞에 어둠을 소환하지 못하였습니다.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이지만, 태양과 어둠을 같은 시간 한 자리에 세우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태양 앞에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눈앞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 안에서도 어둠을 보지 못하는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무속종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과 다른 점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 또한 바꾸어 놓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을 남기셨습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이라는 그의 책에서 "땅속에서 연한 새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돌을 깔고, 나오는 풀을 뽑아내도 그 풀의 생명은 다시 사나니, 생명의 힘을 막을 자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와 생태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부활을 계시하십니다. 굼벵이가 땅속에서 7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매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며 사는 것을 볼 때 부활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의 신비, 성장의 신비,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얼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닮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는 없는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옛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 라고 생각했고 한편에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고 생명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변화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죽음의 신비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생각하여야할 문제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신비가 없고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벌레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생명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없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이 성장하다가 죽게됩니다. 그 다음 단계로 부활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죽음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장입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발달해 왔고 최근에는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아직도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과연 죽음은 무섭습니다. 죽음은 직장도 떠나게 하고 가족도 떠나게 하고 지식이나 돈도 남겨 두고 떠나게 합니다. 죽음은 권력이나 명예도 두고 떠나게 합니다. 죽음은 진수성찬과 세상에 아름다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가라고 합니다. 죽음 앞에는 꿈쩍을 못합니다. 죽음이 와서 "가자 하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죽음에는 백전백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가장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총 주제는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십자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방향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제자들은 이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었습니다. 확신의 사람들이 됩니다. 환희의 사람들이 됩니다. 특별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안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큰 생명의 빛 안에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하나의 필연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해 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태-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제이건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한 생명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군인도, 가룟 유다도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곧 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적 변화가 아닙니다. 한낱 자연현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요, 변화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죄와 율법과 사망을 다 이길 수 있고도 넉넉한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 우리의 원수인 죽음을 이긴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가장 위대한 승리자 된 것을 기뻐합시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데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신 곳을 보라(마28:5-6절).”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약속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여자들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다른 어느 기적 보다 위대한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만 다시 사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절).”첫 열매가 있으면 계속해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기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잠시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남들은 하나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절).”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과 비교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마지막 원수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여러 가지 노래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노래가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하여 노래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사랑의 노래만 있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칼의 노래도 있습니다. 라멕은 일부다처제를 행하고 살인도 저지른 자입니다. 그가 노래합니다."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배이리로다(창4:3-24).”이런 노래는 없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넌 모세의 감격의 노래도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홍해 바다 건너서 애굽의 군대의 시체를 바라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이 없어서 슬펐던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라(삼상2:1).”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바울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7-39).”
그러나 이런 노래 보다 더 위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망을 이긴 노래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은 진 적이 없습니다. 사망이 독침을 한번 찌르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망이 이기지 못합니다. 독침을 쏘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독침을 쏘고 그 침을 뺄 수 없었습니다. 독침은 십자가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여분의 침은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쏠 독침이 없습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이김이 사망을 삼켰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킴바 되리라”사망은 지금까지 무엇이든지 삼켰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사망이 삼킨 바 될 것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삼키던 것이 삼킴을 당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이런 광경을 우리가 얼마나 기대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노래입니까?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시다
바울은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니다. 아니 사망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는 사망으로 인해 슬픈 노래만 불렀습니다. 슬픔을 달래는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시다. 얼마나 놀라운 노래입니까?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노래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사망을 이긴 노래가 있습니까? 바울이 부른 승리의 노래가 있습니까? 죽음은 숙명처럼 우리 곁에 있습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이제는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은 종일 부활의 노래를 불러 봅시다. 가장 위대한 노래를 실컷 불러 봅시다. 오늘만 아니라 날마다 부활의 노래를 부릅시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우리가 언제 다시 살아납니까? 그 승리의 날은 멀기만 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날은 장래 어느 시점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다시 살고, 산 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날이 내일인지 모레인지 십 년 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은 멀지 않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활의 날은 오늘과 같습니다. 육체가 죽어야 하는 오늘과 다시 사는 내일은 분명히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입니다. 간격이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그 날은 오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사는 자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미 영생하고 있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이 오늘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혹은 죽었다가 이미 다시 산 사람처럼 삽니다. 오늘을 보고 내일을 판단하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밤 죽을 것을 모르고 창고를 지은 어리석은 부자는 불쌍합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두면 뭐합니까? 오늘 죽으면 헛일입니다.
먼저는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었습니다. 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몇 일을 더 살기 위해 우리의 남은 재산이라도 다 내어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맙시다.
기독교 신앙을 마음의 수양으로 믿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출세의 수단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행운의 표적으로 안다면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읍시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신앙을 도적질하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 서도록 말씀을 묵상하고 배웁시다. 부활의 신앙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더욱 힘씁시다.
구원받기 위해 힘쓰는 것은 안타깝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다면, 구원받기 위해 금욕한다면, 구원받기 위해 전도하고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한다면 불쌍합니다. 그러나 값없이 구원받고 부활에 참여한 때문에 힘쓴다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을 써서 일한다면 참으로 장하고 잘하는 일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승리합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정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닙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나라에 가는 관문일 뿐이며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봄에 자라는 나무 잎마다 쓰셨다 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안에서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들어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실을 영원으로, 고통을 평안으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의 삶을 영생으로 이르게 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의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웨스콧(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과 "오순절의 선물"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다시 말하면 부활절의 선물은 살려주시는 은혜이며 오순절의 선물은 부여의 은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영암의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립시다. 로마서 6:5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잃는 것과 얻는 것
생명에 관한 큰 역설은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은 바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친구에게 매달린다면, 그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유하려 들지 않으면,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명성을 구하고 원한다면, 흔히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알려지려고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우리가 죽은 후에까지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뜻깊은 2002년 부활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장 위대한 승리인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승리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절 기도 -최효섭- (미 아쿨라 한인교회 목사)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 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 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