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가지 그동안의 분위기와는 전혀 색다른 이상한 의상을 입고 출연을 한다든지 아니면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든지 아니면 자신에게서 풍기던 전체적인 분위기나 이미지를 바꾸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기를 얻거나 이미 얻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변신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예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얼마가지 못해 싫증을 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싫증으로 그들이 얻은 인기는 얼마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변신을 통해 자기 인기를 관리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부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도대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이 말씀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자기 변신입니까? 인기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런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기를 얻거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을 계획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영광이 그분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 변신을 시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영광은 그분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실 수 있는지? 우리의 머리로 그것을 이해한다거나,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제한되어진 인간의 육체와 더불어 하나가 되실 수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영원한 미스테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거한다'는 표현은 '장막을 치다'란 말로 다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친 장막에 거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장막을 만들게 하셨고, 그들 가운데 그 장막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행하는 기간동안 항상 이 장막을 그들 진영에서 가장 중심되는 자리에 쳤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장막가운데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친히 육신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걷고, 함께 자고, 함께 행동을 하시면서 친히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과거엔 그들이 장소를 옮길 때마다 장막도 함께 걷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장소를 옮기려면 그 장막도 함께 옮겨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직접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장막을 치셨습니다. 더 이상 장막 가운데 계시지 않고 육신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분을 보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장막 가운데 머물렀던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에게서 보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한순간에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첫눈에 반해 버렸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럴 수는 있습니다. 얼마든지 첫눈에 반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눈에 반해버렸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첫눈에 반해 버린 사람들이 나중에 티격태격 싸우다가 결국은 갈라서 버리는 모습을 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은 한 눈에 척 알아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첫눈에 과거에 장막 가운데 머물렀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곁에서 체험하면서 알게되고 목격하게된 영광입니다.
사람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보았을 때는 굉장히 좋은 인상을 풍깁니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사귀면 사귈수록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은지 안 좋은지 쉽게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귀면 사귈수록 정말 '진국'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너무나 훌륭한 모습들이 발견되어집니다. 그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분도 그랬습니다. 그저 보기엔 평범한 사람입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자랑할만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가정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장성하기까지 목수로 생활했는데 특별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멀리서 그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교제하거나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가진 편견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지내고, 그분과 함께 교제를 해보니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구약시대 장막에 머물렀던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분이 어떤 능력을 나타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행동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보다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을 통해 확인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말로 그 사람에 대해 잘 표현한다 해도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갑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그분 곁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지켜본 인물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고백되어진 말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골로새서에서 말하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형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분에게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분명 12절에서 말씀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영접하셨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에 따라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목회자의 자녀들이 받는 고통 중에 제일 큰 고통이 뭔지 아십니까? "너는 아버지가 목사라면서 그렇게 밖에 행동을 못하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성도들은 목회자와 그 가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말이나 행동이 나오면 여지없이 "목사님 아들이 그게 뭐냐?"라고 말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의 영광과 자녀의 행동을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을 향한 세상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잘못된 행동, 그릇된 삶의 모습을 보면 결국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흠집을 내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삶의 모습이 아버지의 영광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독생자의 영광 가운데서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신 그분이 아버지의 영광은 곧 은혜와 진리가운데 표현되어졌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범죄자들에게 공로없이 주는 호의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사람들은 그저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각고의 노력과 흘린 땀방울 때문입니다. 승리의 면류관을 노력없이 얻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노력도 보통 노력으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이 있을 때에만 면류관을 차지하고,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는 것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며 댓가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노력없이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복음서를 쓸 때 사도요한은 이미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었습니다. 그가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혹은 세리나 창기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거나 진리를 선포하실 때,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모든 것이 다 은혜에 속하고 진리에 속하였던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독생자의 영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생명과 속죄의 희생은 오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겠습니까? 그것도 아무런 댓가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런 일에 선뜻 여러분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에게는 그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먼저 죄인들에게 손을 내미시고, 먼저 사랑을 고백하시고, 먼저 진리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고 못하고 낙심하였을 때 주님은 먼저 찾아가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어찌 할바를 몰라하는 잔치집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심하여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버린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아니 오랫 옛날 죄짓고 숨은 아담에게 먼저 찾아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전히 그런 은혜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낙심해 있을 때 그분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에도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다가 신앙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우리의 갈릴리로 돌아가버릴 때에도 그분은 먼저 찾아와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면서 먼저 물어오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그 한없는 은혜와 사랑, 그리고 진리의 말씀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 이 자리가 나의 의지로만 되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여러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례요한은 그분에 대해 어떻게 증거했습니까? 15절에 "요한이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요한은 엄청난 자였습니다. 어떤 능력이나 권능을 행하여서 엄청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데 있어서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으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에 대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자기 보다 앞선 것은 자기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따지면 분명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자기보다 앞선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선재(先在)'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그분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정도를 증명하기 위해 한 말일까요? 물론 그 정도를 설명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오래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져 왔던 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이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완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로 이분이 구약에 선지자가 예언했던 분임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도 어느날 바리새인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은 즐거워했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분노하면서 "아니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시길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세례요한 이전에 계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절)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분을 가리켜서 "그는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도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야말로 영원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래서 1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렇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가운데 넘쳐흘렀습니다. 만약 주께서 우리를 상대하실 때 진리로만 상대를 하셨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면 우리는 그 율법을 충족시킬만한 자격을 갖추거나 행위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족시키는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율법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끔 우리들 중에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주님도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도덕이나 의식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오셨습니까? 은혜없는 율법은 정죄만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은혜 아래로 인도하는 하나의 안내자였습니다. 그런데 안내자가 안내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정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죄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거나 구원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낯선 길을 가려면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를 보면 어떻게 길을 가야할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지도를 보지 않는다면 굉장히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지도가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도가 그 사람을 가고자 하는데 까지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그곳으로 가려면 차를 타야 합니다. 차를 타야만 목적하는 곳에 갈 수 있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은 지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지도입니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지도입니다. 그 지도가 우리를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 지를 안내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17절의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값없이, 공로없이 받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 받을만한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은혜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모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줄 수 없었습니다. 설령 죽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율법아래 있는 자의 죽음은 동일한 율법아래 있는 자의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너무도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때 하나님을 본 사람들마다 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거룩하셔서 볼 수 없는 하나님, 그분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결코 볼 수 없었던 그분, 그런데 이제 우리가 볼 수 있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갑자가 흰옷 천사와 같이 순결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그분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짐을 받게 하기 위해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변신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기를 관리하기 위해 자신의 변신을 모색하던 중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영광이 그분의 것입니다. 그 영광을 위해 자기 변신을 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기 백성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으로 이 곳에 오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결코 힘든 자리에 내 핑개 쳐 놓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을 받아들이면 영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생명이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그것을 위해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에도, 여러분이 괴로워할 때도, 여러분이 삶의 현장에서 지쳐 있을 때에도 동일하게 영광가운데 찾아오시는 그분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