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달력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새해에 쉬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그것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주일과 공휴일이 겁쳐지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년달력을 받게 되면 달력에다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가족의 대소사와 기념해야할 날들이 언제인지를 표시해 둡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그 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 날이 자신이나 가족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기념하기 위해 표시를 해 두는 것입니다.
대개는 가족의 생일, 그리고 결혼기념일, 혹은 입학식과 졸업식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제삿날이 언제인지 그 날을 표시해 둘 것입니다. 만약 젊은 연인들이라면 만난 지 100째 되는 날, 혹은 1년이 되는 날, 수험생들에게는 수능시험 보는 날 등이 표시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올해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라 하여 어떤 달력에는 아예 월드컵 개막일이 표시되어 나오는 달력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있어서 기념이 될만한 특별한 날을 표시해 두곤 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라면 어떤 날을 표시해 둘까요? 아마도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날, 그 날을 표시해 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력에다 "내가 회심한 날"이렇게 큰 글씨로 표시해 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를 만난 날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이라면 어떤 날을 표시하겠습니까? 생각건대 바로 오늘 이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이 가장 특별한 날입니까? 자신이 그토록 외쳐왔던 그분을 만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면서 그분에 대해 지금까지 외쳐왔는데 오늘 그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그분을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가 있는 곳으로 나아왔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이날보다 더 특별한 날이 있었을까요?
언젠가 텔레비전 어느 프로그램에서 인기가수 조성모의 열렬한 팬 아주머니 한 분이 소개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조성모의 노래를 모두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성모의 앨범 1집에는 어떤 노래가 수록되어 있으며 2집, 3집에는 어떤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지 죄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취미생활, 그의 관심사, 그의 생일, 그의 자라온 환경 등등 조성모에 대한 것이라면 모조리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아주머니의 평생소원은 조성모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아주머니의 정성 때문인지 마침내 조성모를 만날 기회를 방송국에서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달력에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밑에 '성모 만나는 날'이라고 크게 써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정된 날이 왔을 때, 그 아주머니는 조성모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하고 마치 새색씨가 신랑을 만나려 가는 것처럼 긴장하면서 방송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보고싶어 했던 조성모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이처럼 한명의 인기 연예인을 만나는 것도 긴장이 되고, 감격스럽고, 아주 특별한 날로 기억되어진다면 하물며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만나는 날은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자신의 일생동안 그분에 대해 얘기했고, 그분의 길을 예비했던 자로서 마침내 그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격스럽고 특별한 날이 언제이겠습니까? 그저께 발렌타인데이였습니다. 이날 누군가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사람은 특별한 날로 기억되어질 것입니다. 평생동안 그 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프로포즈한 날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죄많은 우리 인생들을 향해 손을 내미신 날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다가온 그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안타깝게도 배우자에게 청혼 받은 날은 기억해도 하나님께서 프로포즈 한 날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배우자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아주 특별한 날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날의 감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특별한 날을 맞이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누굽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와서 '네가 누구냐?'하는 질문을 받았던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요한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요한이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인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이 요한에게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찾아와서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네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맞느냐?'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대답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조금도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며, 자신은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주인공보다 조연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말로 '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서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 이라고도 말합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 반면, 조연이 엄청난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작가와 연출감독은 그 조연의 연기를 더 많이 화면에서 클로즈업시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한사람의 조연으로 인해 시청률을 높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를 끌기 위해 빛나는 조연을 십분 활용하여 드라마나 영화를 이끌어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은 주연이지 조연이 아닙니다. 조연은 음식에 있어서 양념역할을 하는 것이지 음식의 주재료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구속사에 있어서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조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주연일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연인지를 묻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고 질문을 던졌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세례요한은 여전히 자기 뒤에 오시는 그 이가 진짜 주인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변함없이 자기 뒤에 오시는 이에 대해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너무도 특별한 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오랫동안 외쳐왔던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스스로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그 감격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말하기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지금 그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치적 해방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날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왜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세례를 받았어도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들이 원하는 바,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물로 씻음을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물로 씻음을 받은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세상적인 기대일 뿐,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이 그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고백에 따라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즉 물질 축복, 건강축복, 자녀에 대한 축복…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며 우리들이 바라보는 것들입니다.
어떤 분은 "그것이 잘못이냐?"고 반문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린양을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나 자세가 없이 단지 신앙을 고백 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신자의 자리를 확보하고 안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눈을 감고 여러분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뒤, 여러분의 생각이나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외적인 포장에 있습니다. 내용은 그대롭니다. 단지 포장만 바뀌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포장으로 말입니다. 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세상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정치에 관심을 가집니다. 세상의 명예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서 얻게 될 명예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포장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 본문은 뭐라고 합니까? 그런 것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지금 죄는 고백하고 세례는 받았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요한은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분이 왜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건만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백만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외적인 표현만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안에 더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닌 전 삶의 포커스를 주께 맞추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말하기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의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나온 예수를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과연 요한처럼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외적으로 비춰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같지 않습니다. 허름한 옷에 50대에게서나 봄직한 꺼칠꺼칠한 피부, 어디를 둘러보아도 메시야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제대로 추스릴 수 없을 것 같은 몰골을 한, 그를 보면서 매우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때 요한은 다시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30절에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분에 대해 외형적으로 사람들이 판단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만약 외형으로 따진다면 분명 그는 자신보다 늦게 출생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단순히 시간적 개념으로 판단되어질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해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제사로 인해 양들과는 매우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월절이 되면 각 가정에서 어린양을 준비하여 성전 제단에서 제물로 바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은 모두 사람들에게서 취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물을 바친 사람의 죄를 대신할 뿐입니다. 물론 양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은 죄를 대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능히 죄를 없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분에 대해 사전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만난 일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비록 요한이 예수님과 먼 친척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도 그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31절에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왜 요한은 여기서 자신이 이 분을 알지 못한다고 했을까요? 이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미리 공모를 했다거나 어떤 약속에 의해 선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기 위함입니다. 어쨌든 참 이상합니다. 자신은 이 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례를 주는 것이 곧 이 분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을 통해 이분이 이스라엘 중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해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사의식으로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느냐? 하면 아닙니다. 또 다시 그들은 부정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짐승을 잡고 또 잡아도 정결하게 되지 않습니다. 짐승을 잡아서는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반복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물로 씻음을 받으면 깨끗해집니까? 죄를 자백하고 물 속에 잠겨보지만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뒤돌아서면 똑 같은 죄를 다시 반복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시행하는 물세례가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한 신앙고백에 의해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다짐을 받습니다. 세례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 대해 교훈합니다.
그런데 사실 물세례 받고, 변화되어진 사람을 본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례 받을 때뿐입니다. 분명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임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인간의 고백과 다짐은 매우 간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가운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주는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와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물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성령세례는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지금 자기 앞에 나와 물세례 받기를 원하고 있는 이 분임을 요한은 알고 그 사실에 대해 모인 무리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떻게 그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한눈에 보면 척하고 알수 있었단 말입니까?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도를 닦았으니 한눈에 보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단 말입니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사실을 증거할 만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32절과 34절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보내신 이가 이 분에 대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내려서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되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인 줄 알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분이 하신 말씀에 따라 오늘 자신이 물세례를 줄 때 이 사람에게 비둘기같이 성령이 하늘로서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음으로 이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물세례를 받는 순간 너무도 확실하게 밝혀졌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무엇이 밝혀졌단 말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볼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어떻게 임하셨다고 합니까?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둘기같이 임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인지 알수 없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비둘기가 상징하는 순결함이나 부드러움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령이 그분께 임하였고 그 일로 인해 모든 이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무엇보다 이 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대신해서 희생당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회개하고 눈물 흘리고 뒤 돌아서서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서 뒤돌아서서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안됩니다. 예수 잘 믿으니까 복 받게 해달라고 맹목적으로 간구하면 안됩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면서 기도해놓고, 뒤 돌아서서 물질축복에 얽매여 사는 삶을 살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잘되게 해달라고 소리 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세상에서 복받고 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우리의 가치관도 변하고 우리의 삶의 모습도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았을 때 버리지 못했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진 모습이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했다고 안심하면 안됩니다. 물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신자가 되었다고 믿으면 그것은 오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니까? 확실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란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없습니까?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말씀하십니까? 성령을 통해서 기록되어진 말씀으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은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본다면 성령은 여러분의 심령가운데 내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 변화된 자리에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