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사50:4-9) 2002-03-11 00:33:17 read : 248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종' 또는 '여호와의 종'이란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범죄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한 느부갓네살 왕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렘25:9).
(2)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일을 잘 행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셨다(사41:8).
(3)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실한 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진실하며 충성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종'이란 호칭이 부여되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다윗…).
(4) 완전한 모범을 보이시는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사야서에는 그 유명한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사42:1-4, 49:1-7, 50:4-9,
52:13-53:12), 장차 오실 메시아를, 노래 형식으로 예언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종이다.
만민에게 진실한 도를 보여주는, 침묵의 봉사자(사42장)며,
그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사49장).
그는 그 사명을 위해 핍박과 수치를 받으나, 주님에 의해 그것을 견디고(사50장),
수치스럽게 고난 당하시고 죽으심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짊어졌으며,
그의 고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치유되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53장)는 내용이다.
이 말씀은 수백 년 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게 됨을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예언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종'이 당하신 고난의 뜻과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다짐하는, 거룩한 시간을 갖자.
1. 하나님의 종은 아침마다 말씀을 받아, 그대로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피곤한) 자들을,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쳐서,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셨다"(4)고 예언했다.
아침마다( ) 라는 말이, 2번 반복되어 있다. 강조됨을 말한다.
또한 아침은 동트기 전의 시작을 말하기에, 엄밀하게 번역하면 아침보다 '새벽'이라는 표현이 좋다.
우리에게 잘못된 신화가 있다. "한국교회만 전 세계에서, 유례 없이 새벽기도를 드린다"는 말이다.
구약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새벽기도를 드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해서 오시는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기고,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방문하시는 시간이었다.
예수님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다.
막1:35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본문에서도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시되"(4절)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큰 힘을 새벽에 얻으셨는데, 하물며 연약한 우리가,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우리도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 만나를 주셨는가? 새벽에 주셨다.
만나는 해가 뜨면 다 녹아 없어졌다. 그러니까 먹고살려면, 다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새벽에 안 깨면 다 굶어죽었다. 40년 동안 만나를 새벽에 주셨으니, 새벽 체질로 바꿔주셨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의 선지자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라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몰락을 바라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뒤에는 새벽기도로 말미암아, 아침마다 새롭다는 큰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됐음을 밝힌다.
다윗은 시46:5에서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 새벽기도를 통해 확신을 얻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내가 매일 새벽 두 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는다면, 그 날의 승리는 마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매일 3시간을 기도로 보내지 않으면
결코 이 일을 지탱해나갈 수가 없노라" 기도하지 않고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웨슬리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를 시작해서, 2-3시간씩 기도했다고 한다.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성도들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이다"고 했다.
장수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원리대로 일찍 자고, 새벽기도를 하라.
병들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밤에 잠을 안 잔다.
새벽을 깨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도 새벽에 기도하면, 주의 음성을 듣고, 영적인 힘을 얻고, 깊은 신앙 체험도
하게 된다.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이 여기에 있으니, 새벽을 깨우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라.
본문을 보니, 새벽에 기도하니, 하나님은 귀를 열어주시고, 학자의 혀를 주셔서, 그 학자의 혀를 가지고, 곤핍한 자들을 도와 주게 하셨다. 곤핍한 자는 '삶에 지친 자'이다.
하나님의 종은, 죄와 죄의식으로 눌려 있는 자,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역할을 새벽기도를 통해 힘을 얻게 하셨다.
5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절대 순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낙심하고 핑계만 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하면, 날마다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된다.
새벽을 깨우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고, 날마다 승리할 수 있기 바란다.
2. 여호와의 종은, 고난의 잔을 묵묵히 받고, 사명을 수행한다(6-7).
6절을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예언대로, 고통을 당하셨다.
마26:67-68을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기록했다.
마27:26을 보면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기록되었다.
주님은 예언의 말씀 그대로, 매 맞으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 운명하셨다. 철저하게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 주님은 놀랍게도, 이미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그대로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묵묵히 받으시며, 멸시와 고초를 겪으셨다.
아무런 잘못도 없지만, 원수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류 구원을 위한 수단이요, 바로 우리 죄를 대신지기 위한 수단이었다.
너무도 괴롭고 힘들었지만,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심을 아셨기에, 그대로 순종하셨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처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고, 운명하시면서도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다 맡기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리들은, 싫은 소리,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하는가?
왜 그토록 교회 안에서, 큰 소리가 많이 나는가?
주님이나 교회는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나는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나는 편하기를 원하고, 이름나기를 원하고, 이익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참고, 또한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그래야 부활의 영광이 있고, 영적인 진보가 있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성도는 자신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비참하게 죽으셨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고통을 대신 지셨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대신 신음하셨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대신 죽으셨다.
이렇게 큰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주님께서, 모처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창녀출신인 한 여자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인 채 주님 앞으로 나아왔다.
그리고는 품안에 있던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렸다.
그녀는 이렇게 비싼 향유를 얻기 위해서, 수 없는 치욕의 밤을 감수해야만 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같은 날, 가롯 유다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자기의 스승인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여인이 깨뜨린 옥합에서, 아직도 그 고귀한 향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다는 그 방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은 삼십을 위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갔다.
헌신의 기회를 찾는 부끄러운 여인과, 배신을 통한 돈벌이의 기회를 찾는 똑똑한 유다!
이 두 사람은, 이 두 종류의 기회는, 오늘 우리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다.
예수님께서 옥합을 깬 여인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14:6)고 하시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칭찬하셨다.
반면 가롯 유다에게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14:21) 슬퍼하셨다.
옥합을 깬 여인이 될 것인가? 주님을 배반하는 가롯 유다가 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그 여인은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는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억울해도, 고통스러워도 참고, 부끄러워도 참자.
또한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는 것이다(골1:24).
3.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며, 결국 승리자가 된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나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시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8-9)
예수님은 사람들이 죄인 취급하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릴지라도, 심판장 되시는 주님을 믿고
당당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성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두렵지
않다.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다.
그러나 절망감에 빠진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자꾸 원수에 주목하고, 문제에 주목한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 마치 그 문제가 나의 삶에 전부인 양 느껴진다.
문제가 내 눈앞에 가리고 있기에, 문제밖에 안 보인다. 환란과 대적밖에 안 보인다.
깊은 외로움을 겪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반당하는 아픔을 겪을 때, 내 과거의 죄악이 내게 상처가 되어서, 아프게 만드는 절망의 시간에 처하게 되었을 때, 주님을 바라보고 나와야 한다.
그 길이 승리하는 길이요, 우리 인생이 형통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힘이 생긴다. 두려울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분이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지닌 분이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면 힘이 생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성도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롬8:32)라고 말할 수 있는 강한 배짱이 필요하다.
그래야 억울한 일을 만나도 쉽게 참아내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수 있다.
또한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하는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확신을 갖기 바란다.
우리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새벽에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의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고난도 순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신실하고 충성된 '여호와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억울하고 수치스런 모든 고난을, 참고 이겨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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