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대한 바른 이해 2002-03-11 23:36:29 read : 575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 : 고전 11:17-34
서론
고린도전서는 "건덕의 복음으로 양육"이라는 주제로서 교회가 건덕을 세움으로서 질서가 유지되어 견고하게 성장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사랑의 건덕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약한 자 앞에서 자고 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또한 인간들에게 인정, 칭찬, 의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고 계층간, 빈부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식사로 인한 문제에 의해서 상대를 돌아보는 신앙적 여유를 상실하여 유치하고 치졸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만찬에 대한 바른 의미를 제시함으로서 교회가 사랑에 의한 질서 유지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만찬의 의미가 바울의 의도와는 달리 왜곡되어 만찬의 재료인 떡과 포도주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식 자체에 특별한 거룩성을 부가하여 날마다 생각해야 되는 의미 보다 의식을 중시하여 본질에서 이탈된 기형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만찬에 대한 문제점은 무엇이며 성경적 바른 의미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1. 부당한 만찬에 대한 책망 (11:17-22)
만찬에 대한 바른 이해하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성질을 파악해야 한다. 만찬이란 단순한 식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아닌 하나님의 권속들이 먹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예배를 위하여 모인 성도들간에 식사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며 잘못된 식사 태도에 대하여 책망을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잘못된 만찬의 원인은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17-19)
교회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삶의 형태가 다를 수 있으며 자연히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빈부의 격차 자체가 아니라 끼리끼리만 모여서 파당이 형성되고 그러다 보니 서로간에 분쟁이 있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는 어떠한 명분이라도 특수한 계층이 형성되어 그들끼리만 모여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학연으로 모인다든지, 지연으로 모인다든지, 아니면 직업별로 모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회에 모인 목적을 상실한 잘못된 모임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그리스도를 배우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며 교제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빈부나 직업의 차이가 필요 없으며, 학연, 지연, 혈연 등은 더더욱 불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모임은 남녀로 구분하거나 연령별로 구분하거나(남, 여전도회) 아니면 직분(당회, 제직회)에 의해서 나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봉사하며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성도가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무시하여 인간들의 특성에 따라 모여서 편당이 생기게 되었고 그에 따른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편당은 분쟁을 낳게되고 분쟁은 교회의 건덕을 허물게 되며 나아가서 교회가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단호하게 지적하여 교훈 함으로서 교회가 사랑으로 교제하며 건덕이 세워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둘째, 잘못된 만찬의 원인은 자기의 만찬을 먼저 먹는 것이다. (20-21)
교회가 파당이 생겨서 분쟁이 있으니 자연히 남을 의식하지도 않게 되고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만 생각하게 되는 이기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먹지 못하여 굶기도 하고, 반면에 어떤 자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하기도 하는 추태를 보이게된 것이다. 사람들이 제일 유치하고 비참해 지는 것은 먹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일 것인데, 교회가 빈부로 인한 계층이 형성되어 서로 무시하며 편애하고 질시한다면 이것보다 추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교회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함께 모여서 많은 자는 많이 내고 적은 자는 적게 내어 평균을 유지하며 피차 공평하게 되는 곳이다. 더욱이 교화란 먹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것
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아는 것 믿는 것 하나 된 성도들이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교제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인간적인 죄성에 몰입되어 파당과 분쟁에 의한 가장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덕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잘못된 만찬의 결과는 무엇인가? (22)
고린도 교회의 비신사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 이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또한 재물이 자기의 것으로 착각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인간에게 권한이 있는 것으로 알게 되면 인간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고 자연히 파당이 형성되게 된다. 교회는 목사가 주인이 아니며, 교인이 주인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개척한 자가 주인인가? 그것도 아니다. 목사이건 개척자이건 공헌자이건 간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이지 머리가 아니다. 머리는 하나 밖에 없으며 몸은 머리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움직이게 되어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된 자가 없으며 어느 누구의 것도 자기의 소유물인 것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각각의 분량과 은사가 다를 뿐이다. 분량과 은사는 독자적으로 성취하거나
사용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관자에 의해서 주어지고 쓰여지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재물과 생명과 은사의 주인이 누구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서 자고해 졌으며, 자기들의 좋은 대로 끼리끼리 모이게 되었고, 상대를 판단하며 조롱하고 서로 질시하며 분쟁하게 된 것이다.
종이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요 무서운 일일 것이다. 아담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주인 노릇을 해보려고 범죄한 것이 아니었던가! 부요하게 된 것도 가난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 따라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충성하며 헌신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열심을 주셔서 하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업적이나 성공을 자랑할 수 없으며 그것으로 상대를 무시하거나 자만해서는 안될 것이다. 파당과 분쟁은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망각할 때 발생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만찬을 시행하는 목적 (23-26)
만찬을 시행하는 목적이란 먹으러 모일 때마다 주식인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복음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즉,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억하기 위한 시청각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사역을 기억하여 증거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떡과 포도주 자체가 아니라 주식인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마다, 즉 항상 식사(만찬)를 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기억하여 증거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도
들이 식사를 할 때마다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만찬을 시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지교회가 교회의 사정에 따라 1년에 몇 차례 실시하는 성찬의식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시청각 교육의 차원에서 시행하는 것이다. 즉 오늘은 왜 떡과 포도주를 절차에 따라서 먹는가 라고 물으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보이는 떡과 포도주에 의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기억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찬의 본질을 왜곡한 일부 계층에서는 떡과 포도주에 신비성을 부여하여 그것이 곧 예수의 피와 살로 변화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촌극을 보이고 있다. 포도주는 포도주에 불
과하고 떡은 떡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들 자체가 신비하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하고 증거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첫째,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한 것 (23-25)
앞에서 언급했듯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통해서 세우신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 언약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실현될 최후의 약속인 것이다. 이 언약을 먹을 때마다 잊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게 하기 위하여 만찬을 시행하신 것이다. 성도의 소망은 최후의 승리에 있고 그 승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미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과 그 구속의 은총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항상 감격하며 사는 것이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역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여받아 그의 몸 된 지체로서 교회를 이루게 되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된 것은 가장 크고 가치로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먹을 때마다 이 사실을 기념하며 산다는 것 이것이 곧 우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요 행복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 것 (26)
먹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억하여 감동하며 사는 사람은 그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슨 명령에 기초하여 그 명령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며 더더욱 상을 받기 위한 대가로서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신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사명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에 대한 증거와 확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을 예고하실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며 따르는 제자들도 다른 생각들을 갖고 추종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모든 제자들은 비겁하게 다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신의 예언대로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
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약속에 대한 증험이며 이 험증은 미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마지막 분부하셨던 말씀대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되라 하신 말씀을 위하여 순교하면서 까지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복음전파에 있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동하여 그 사명감에 의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는 것이다. 바울도 이 일을 위하여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痼?가진 자로다 (고후6:4-10)" 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성찬의 가치와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자는 그 내용이 담겨져 있는 복음진리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이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만큼 복음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생의 목표를 두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구속의 은총을 먹을 때마다 기억하여 증거하게 하기 위하여 만찬을 시행하셨으며 때마다 일 마다 쉬지않고 간구하게 하신 것이다.
3. 합당한 만찬을 시행하는 이유와 방법 (27-34)
복음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전파하며 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 만찬의 의미를 이해했다면 합당한 만찬을 시행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만찬과 그것을 시행해야 되는 이유를 모른다면 교회는 무질서해질 것이며 사랑의 교제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첫째, 합당한 만찬 시행의 이유 (27)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일반적인 범죄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만찬을 대할 때 파당과 분쟁에 의해서 끼리끼리 먹음으로서 상대에게 아픔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파당과 분쟁에 의해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도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되며 이것은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권속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먹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려면 죄가 없어야 된다고 선언하여 즐겁게 동참해야 될 자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죄 없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렇
게 말하는 자신은 죄가 없단 말인가? 본문 27절의 말씀은 죄인과 의인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음식을 먹으러 모일 때 파당과 분쟁으로 지체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합당한 만찬 시행의 방법 (28-34)
파당과 분쟁에 의해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도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되며 이것은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먹으러 모일 때 주변을 살펴서 혹시 굶는 자가 없는지 아직 참석하지 못한 자가 없는지를 살펴서 함께 식탁에 기쁨으로 참석할 것?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합당한 만찬 시행의 방법으로서 먼저 자기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알고 복음진리에 가치를 두며 주변을 돌아보고 먹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같이 속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조롱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식사하러 모일 때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주변을 돌아보아 먼저 먹지 말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동참하여 감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것이다. 만약 남는 것이 있으면 집에 갈 때 다시 돌려 줄 것이니 만찬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찬이란 성도들의 식사로서 식사를 대할 때의 기본적인 자세와 목적을 부여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것이다. 의식 자체에 권위가 주어진다거나 식사의 재료 자체에 신비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죄인과 의인으로 분류하는 것 역시 부당한 것이다. 도리어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만찬을 통해서 은혜의 감격이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단 주변을 살피고 먹는 것으로 인하여 상처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는 것이다. 현금 교회에서 세례교인들만 참여시키는 이유는 유형 교회의 제도상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한 자에 한하여 참여하는 만찬이기에 그런 사람들만을 참석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들은 일년에 몇 차례 시행되는 성찬식 때만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억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식탁을 대할 때마다 복음진리에 감격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고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사랑으로 무장하여 건덕을 세우는 일이며 이러한 복음의 감격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