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서 교육의 해에 맞춰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이 뭐냐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신앙인은요, 육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성장할 때, 비로소 성장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럼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어냐,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알고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해야하지 않은 지를 아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렸구요.
둘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한 거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거든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그러니까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듣게 되어 있어요. 볼수 있는 사람이 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지혜, 역사, 섭리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것인데,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불순종이 아니라 언제나 순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영적 성장의 마지막 시간인데요, 영적 성장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적 성장의 삶을 살아라 그런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일으킨단 말이죠.
목사님이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어요. 그런데 한 번 가고 두 번 가도 못만나겠더라구요. 근데 이분이 교회를 잘 안나와요. 이런 이유, 저런 이유해서.
그래서 오늘도 찾아갔는데, 가만히 보니까 TV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문을 두드렸는데 소리가 없어요. 창틈으로 가만히 보니까 TV는 켜져 있더라구요. 여러분 사람 없는데 TV가 켜지겠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있긴 있는데 나오질 않거든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 집에다 메모를 했어요.
"오창우 목사, 계시록 3장 20절" 3장 20절을 쓴 명함을 문틈에다 넣어 났는데, 계시록 3장 20절이 그거잖아요. "보라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리라"하는 그 내용이거든요. 두드렸는데 왜 안열었나 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냥 왔는데, 그 다음 주일날 그 집 부인이 교회를 나왔어요. 그리곤 메모지에다 써 가지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그랬어요.
창세기 3장 10절은 뭐예요?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죄지은 게 많아서 숨었단 얘기에요. 미안해서. 그렇게 표시 했더래요. 성경을 참 잘 알아서 좋지요. 그런데 알면 뭐해요? 아는 대로 실천해야지요.
1.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을 당한다.
오늘 성경에 보면요, 집을 지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또 한사람은 반석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집은 똑 같습니다. 단지 하나 반석이냐 모래냐 기초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얘기하면 끝날텐데, 성경은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뭘 얘기하냐면은 홍수가 나고 바람 부는 날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집을 흔드는 거예요. 모래 위에 지은 집도 흔들고 반석 위에 지은 집도 흔드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히 섰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는 모래 위에 짓지 말고 반석 위에 지어야 된다 그런 애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무어냐면,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의 원인이 하나님의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이 시간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어려운 때가 온다는 겁니다. 시험의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을 당할 때 비로소 어른이냐 아이냐의 차이가 드러나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을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애예요. 그런데 어른은요, 어떻게 해서라도 감당해냅니다.
우리가 여자를 얘기할 때,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그러잖아요. 여자와 어머니는 똑같은 여자지만 차이를 두는 이유가 무어냐 책임 감당에 있는 겁니다. 책임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어머니고 이런 사람이 어른이란 얘기예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어려움 당하게 되어 있구요, 또 신앙인들 가운데도 다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문제는 그 어려움을 잘 극복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든 어려움은 다 오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어려움이 올 때 어떻습니까? 누가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아무개는 이런 일 시키면 어떨까요? 아무개는 어떨까요? 제가 보는 관점은 딴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몇 살이냐 또 사회적인 지위가 있냐 교회적인 경력은 얼마냐 중요해요. 그러나 제가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일군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뭐냐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원치 아니하는 일이 생길 때 이 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을 보는 거예요.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되도 어려운 일 당할 때 잘 극복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교회는 오래 다니고 교회경력도 있고 교회직분도 있는데 어떤 분들은요, 어려움을 당할 때 이 어려움을 잘 극복 못해요. 이게 왜 그래요? 제가 볼 때, 일을 맡길 때 말이죠, 누구 차별하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움을 잘 극복하느냐 어른에게 맡기게 되어 있어요.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면 감당 못하거든요. 나쁜 것 뿐아니라 좋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어른은요, 작은 것 가지고도 경영할 능력이 있어요. 잘 감당하거든요. 어른이 돼야 됩니다. 어른이 돼야 되요.
그럼, 하나님이 보실 때 어른은 어떤 사람이냐?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해주고 있어요. 여러분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요, 분명한 것은 소유를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이 어려운 일 돈만 있으면 해결할텐데, 빽 있으면 해결할텐데. 천만예요. 그렇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경력이 있으면 해결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많이 받으면 해결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오늘 성경에도 보면요, 집을 짓기는 지었어요. 멋진 집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얘기하는 21절 22절에 나오는 사람도 어떤 사람이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랬어요. 여기 주여 주여 하는 사람 가운데는 22절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세요. 제가 읽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많은 사람이 이런 얘기한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리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거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여러분, 어려운 일 있을 때에 이 어려운 일을 극복해야 되는데, 여기 보면은 은사 받은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선지자 노릇하고 말씀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또 귀신을 좇아 냅니다. 영적인 권위자지요. 그리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 병고치는 권능을 행했든지, 예언했든지 그랬겠지요.
그러나 이들도 주님이 보실 때에는 알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예요?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은사 받은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천국에도 들어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제일 의아했던 게 뭐냐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거든요, 부자는 왜 부자냐? 축복 받아서. 맞아요. 축복 받았어요. 그러나 그 축복 받은 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수단이에요. 무엇의 수단? 하나님의 뜻을 잘 행하라는 수단이란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목사를 지칭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어서 목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천국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말이에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이나 이 모든 것들은 뭐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지요. 그런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고 그런 사람이 어려움이 와도 이 어려움 속에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거예요.
우리 보잖아요. 우리 믿음 생활하다 보면 실족하는 사람들이 새신자만 실족하딥까? 아니거든요. 교회 오래 다닌 사람 가운데도 실족하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너무나 경력이나 직분 자랑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해요.
2.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신 분 아닙니까. 어려서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을 잃어버렸어요. 부모님이 아이를 찾지요.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았어요. 그리고 성전에 있는 율법사들과 대화를 하고 있더라구요. 왜 여기에 있냐고 야단을 쳤을 것 아니예요? 그 때 주님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어려서도 아버지를 생각해요. 하나님을 생각한다구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고난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러나 그 때도 이 고난을 극복한 것이 무어냐?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성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승리라는 말을 쓰는 것이지요. 신앙은 승리하는 거예요.
여러분 룻이라고 하는 사람도 남편 잃어버립니다. 자기를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 때에 이 어려움 속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어냐 그 때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않아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로 가요?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그곳에서 충성하지요.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 불평하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왜 노예 생활하게 하셨을까? 왜 감옥에 가게 했을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보니까 노예생활한 것도 이유가 있더라구요. 일할 줄 알아야 일군이 되는 거지요. 감옥에 두신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감옥은 보통 감옥이 아닙니다. 정치범들이 있는 감옥이예요. 그곳에서 애굽의 정치를 듣잖아요. 준비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를 줄 때에 그것을 잘 감당하고 해석해서 국무총리가 되는 축복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승리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 되게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그 안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왔을까? 그래. 하나님의 뜻대로 안살아서 그렇지.` 그래 그들이 회당을 만들었어요. 성전은 없지만 하나님의 회당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다시 나라를 세우게 하는 겁니다. 70년만에 다시 돌아가서 나라 세우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말씀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A.D. 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해서 이스라엘이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망하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자들은 둘로 나뉘었어요. 하나는 끝까지 싸우자 죽자는 강경파, 또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자는 온건파입니다.
온건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인 벤자카이가 결단을 합니다. 우리는 살아야 된다. 그래서 그가 결단한 것이 뭐냐면 자기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관에서 들어갔다가 성문을 나갑니다. 성문을 나가서 로마의 장군을 만납니다.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방 하나만 남기고 다 헐어도 좋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가르침,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천년이 지난 날 그들은 다시 그 땅에 돌아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 우리들 가운데는 피에로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잘된 거냐 못된 거냐를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로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원했냐면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갔을 때 뉴욕시내를 발바닥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대요. 유대인들이 왜 발바닥으로 걷습니까? 위험하게. 발이 베일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는데.
이들의 말은 딱 한마디입니다. 여호수아에 있는 말씀대로 "네 발바닥에 닿는 것은 다 네게 주리라. 하나님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말씀대로 맨발바닥으로 걸어 다녔다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미국을 이끌어가는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잖아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노벨상을 받은 역대 수상자들 가운데 30%이상이 유대인입니다. 몇 사람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이들이 단하나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시련과 고통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어려움 중에도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딴 거 없습니다. 여러분 저 위에 있는 말씀대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느니라"
기도하는 것 얼마나 중요해요. 그러나 기도보다 앞서는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성장하게금 했던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돼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우리에게 살면 우리에게 성공이 있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행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뜻을 알려면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시부모 모시고 사는 게 편해요? 안모시고 사는 게 편해요? 시부모 모시고 사는 게 불편해요. 그런데 시부모님들이 가끔 이런 얘기 해요. "다시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라" 그거 왜 그래요? 부모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랬어요. 다시 말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려면 주여 주여 해라 아니 주여 주여 라고만 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구요. 예배당에만 와야 하나님 계시나요.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 의식안하거든요.
여러분 우리는 헌금을 하면 어느 정도로 헌금을 해야 해요? 개신교의 목사님, 천주교의 신부님, 유대교의 랍비 이 세 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는 헌금을 이만큼 한다 하는 얘기를 했어요.
개신교의 목사님이 금을 동그랗게 그어 놓고 하는 말이 "나는 이 동전을 하늘로 던져 가지고 금 안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 드리고 밖으로 떨어진 것은 내가 갖는다" 그랬어요. 이 안에서 동전을 던지면 밑으로 떨어지기가 쉽잖아요. 신앙 좋다 이 말이죠.
그랬더니 천주교의 신부가 하는 말이 "그러냐. 나는 공중에 높이 던져 가지고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고,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내 거다" 이 동그라미 안이냐, 밖이냐를 두고 개신교의 목사와 천주교의 신부가 옥시각신하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유대의 랍비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희는 그렇게 하나님의 권능을 모르느냐? 나는 헌금할 때, 위로 휙 던져 가지고 위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밑에 떨어진 것은 내 거다" 어떤 게 맞아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자기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랬어요. 종이라고 하는 말은 주인이 있다는 뜻이에요. 늘 사도 바울은 주인을 의식하고 살았어요. 내 인생을 다스리고 내 삶을 다스리고 내 할 일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 가운데 착하고 충성된 종과 무익한 종의 차이는 뭡니까? 주인을 의식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 악한 사람들은 보면요, 주인을 의식하지 않아요.
우리 신앙인들도 어떤 때 하나님 의식하지 않는 거 보면 굉장히 속상해요. 말도 막하고 행동도 막해요. 하나님이 계시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 의식하십시오. 그 안에 행동하십시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가운데 무디 목사님이 계시거든요. 말씀 잘 증거하시는데, 언제나 그를 따라 다니는 찬양 인도자가 있어요. 생키라고. 하루는 이분이 여객선을 따고 어디 여행을 가는데,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찬송을 불러 달라고 그랬어요. 그래 찬송을 잘 불렀어요. 그런데 이 찬송 소리를 듣고 한사람이 오더니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는 거예요.
그래 왜 그러냐구 그랬더니 혹시 남북전쟁 때 북군으로 전쟁에 나간 적 없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 그렇다구 나 북군으로 나갔다구 했어요. 그랬더니 "나를 모르시지요. 당연히 모를 겁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압니까? 같이 북군이었습니까?" "아니오" "그럼, 어떻게 나를 압니까? 내가 전쟁에 나간 것을 알고 내가 북군이었던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내 얼굴을 어떻게 압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남군이었습니다" 전쟁이 치열하게 계속되던 날이었는데 하루는 날이 보름달이 떠서 밝은데 자기가 총을 가지고 한사람의 파란 군복을 입은 병사를 겨냥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아쇠만 당기면 그 사람이 죽게 되어 있는데 이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는데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더라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이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느냐? 총을 같이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막 이렇게 비치는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멀리서 들리는 찬송소리지만 가만히 들어보니까 자기 어머니가 부르던 그 찬송이라는 거예요. 저 사람은 전쟁터에서 뭐가 좋다고 찬송을 부르고 있냐? 이제는 방아쇠를 당길 생각을 안하고 총을 놓고 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얼굴이 평화롭고 그렇게 환할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전쟁에서 저럴 수 있나? 나는 전쟁에 나와가지고 언제 집에 돌아가나를 생각하면 눈물 밖에 없는데 어떻게 저러나? 그래서 내가 당신의 얼굴을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더래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지금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도 절대로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직분이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때에만 내가 보호받고 내가 안전하게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믿음 안에 살아야 돼요.
내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 나를 지키시고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반석 위에 지은 집 같아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 5,6절에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랬어요.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면서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않는 거거든요.
여러분,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성령 운동이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어요. 하나는 외적인 성령 은사 중심의 운동이 있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성령 운동이 있었어요.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회개함과 함께 병 고치고 기적이 일어나고 방언이 막 터지고 이런 외형적인 은사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는 그 전통이 있어 가지고 부흥 운동 그러면 이런 외적인 성령운동을 얘기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거든요. 요즘도 신문에 보게 되면 병 고침 은사 이런 성령운동이 많이 광고되고 있어요. 부흥회 그럼 대부분 그래요.
그런데 이 외적인 성령운동과 함께 일어났던 그 당시의 성령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잊쳐져 가고 있었어요. 그래 오랫동안 그 성령운동이 없었거든요. 이것은 성령의 내적인 운동입니다. 성령의 열매, 인격을 얘기하고 있는 건데요.
이 운동의 이름에서 `옥스퍼드 부룩 무브먼트`라고 루터교의 리차드 부크만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제창을 한 겁니다. 그래서 콰이트타임을 갖자. 콰이트타임은 조용한 시간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QT라고 하지요.
우리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자는 운동입니다. 그 운동이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불일듯하게 일어나서 지금은 QT이런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은사를 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성령의 운동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은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그 뜻을 알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오늘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불기둥 따라 움직였어요. 하나님의 성막에 구름이 내리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무조건 그 자리에서 쉬었습니다.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앞서면 백성들은 다 불기둥을 따라 갔어요. 하루든 이틀이든.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았어요.
우리가 오늘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구해야 되요. 어떻게 구하는 것이냐?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골방에서 구하는 거예요. 골방은 물론 나 혼자 들어가는 방이지요. 그러나 더욱 구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늘 이런 만남이 있어야 되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위해서 시간을 따로 정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시간의 10분이든 20분이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는 공동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이거 잘 들으셔야 되요. 저는 목회를 하다 보면 내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회의 중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회의를 하다 보면 내 의견에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의를 하면서 늘 관심을 가져야될 부분은 저 분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언가를 들어야 해요.
우리는 내 얘기만 하다가 그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거예요. 들려줘도 안들으려고 그래요. 이건 정말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우리는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자녀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부모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 상사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봐야 되요. 상황 속에서, 사람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여러분 음성을 들으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어요. 그러나 잘 안들으려고 하거든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고보서 1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께 구하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같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구한다는 말의 믿음은요 `파스타스`예요. 이 말은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충성이라는 말로 해석이 잘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충성으로 구하고 이런 말이예요. 충성은 뭐예요? 일에 대한 충성입니다. 하나님 맡겨준 일에 대한 충성이예요. "이거 일 좀 잘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냥 단순하게 내 생각 관념론적인 믿음이 아니예요. 일을 하기 위한 믿음이란 말이예요. 일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란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것은 이 어려움 잘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구하는 것이란 말이예요.
여러분 미국의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에 일을 맡겨야 되겠는데, 맡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그 교회의 한 집사님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 집사님의 이름이 월터라고 하는 집사님인데 굉장히 훌륭한 집사님이에요. 하여튼 무슨 일이든지 부탁을 하면 "예, 제가 힘껏 하겠습니다" 대답하고든 힘껏 일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번도 그가 거절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궁금해서 하루는 물었습니다. 도대체 집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내가 맡기는 일마다 교회의 궂은 일까지도 다 감당하느냐? 그 이유가 무어냐? 하고 물었던 거지요.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지난 번에 저희 딸 결혼식 주례 해주셨지요. 사실 그 아이가 열두살 때 열병을 심하게 알아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 때 하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암튼 반반이다. 그런데 절망이 더 많다. 단지 하나 하나님이 살려 주시면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못 산다 그랬대요. 그래서 집사님 내외분이 같이 병원 베란다에 나가 기도를 했데요. "하나님, 지난 12년동안 이 외동딸로 인해서 행복하게 살은 것은 감사드립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셔도 하나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딸을 저희에게 맡겨 주신다면 저는 앞으로 주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나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소원을 했다는 거예요.
"목사님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 흥정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나는 흥정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약속을 바친 것입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면서 살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이렇게 살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이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랬대요.
우리는 아이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길 때 문제 해결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잖아요. 감사해야 되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만 감사하고 주를 위해 충성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지혜는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그 지혜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충성으로 구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승리하는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 승리는 나의 직분이나 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음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면 하나님을 의식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되 믿음으로 충성으로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영적으로 성장해서 영적인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승리하는 여러분의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