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이루시는 하나님 2002-03-18 17:20:13 read : 312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느헤미야 9 : 1-6 (2002년 3월 10일)
느 9:1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느 9:2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 9:3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 9: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느 9: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느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사오정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었습니다.
내무반에서 제일 졸병으로 군대말로 '빡빡 기고' 있는데 고참이 사오정을 부르더니 심부름을 시킵니다. "야 너 가서 빵 하나, 우유 하나를 사오너라."
사오정이 무엇을 사왔는지 아십니까?
바나나 우유를 사왔습니다.
'빵 하나 우유'를 바나나로 잘못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고참이 화가 나서
"야 너 고참을 놀릴 수 있어? 반성문 써 와" 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사오정이 '방독면 쓰고 와'로 잘못 듣고는 방독면을 쓰고 왔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정신을 잃어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사오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분의 음성으로 듣고 이제 우리의 손과 발이 정확하게 움직일 때만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와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절망적 상황에서 성전건축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비전을 여러 가지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요?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를 통해서 보았듯이 그 비전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먼저 눈물의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믿음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성전건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허락을 받아야 되는 용기와 결단이 없었다면 느헤미야는 결코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대적자들이 훼방하고 비난하였을 때 그는 비난에 의해서 조정되지 아니하고, 비전에 의해서 조정을 받아 그 비전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넷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심하여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위치에서 역량껏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섯째는 좀 힘들어도 인간적인 방법이나 인위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을 따라서 감당하였습니다. 빠른 것이 빠른 것이 아닙니다. 몇 년전 무너졌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짧은 시간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곧 무너졌습니다. 쉽다고, 편하다고, 그리고 빠르다고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좀 느리게 보여도 정확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를 따라서 사역하는 것이 지름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느헤미야는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비전을 위한 1차 적 목표달성이었습니다. 성전은 건축되었지만 여전히 적들의 위협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을 파수하는 파수꾼을 세워서 성을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건축되었으나 그 성안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습니다.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그들을 성안에 살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서 마침내 그들이 성안에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에스라를 통한 영적 부흥
그런 다음에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궁극적 비전인 이스라엘의 진정한 영적 회복을 위해서 느헤미야에서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역사의 무대를 넘겨줍니다. 에스라는 완공된 성안에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동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낭독해 줍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시면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약 6시간 동안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들은 말씀을 낭독할 때 일어서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려 6시간이나 꼼짝 앉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아멘, 아멘 하면서 그들은 응답하였습니다. 그동안 먹지 못한 말씀의 굶주림, 말씀의 기갈,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하는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부흥의 한 모델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부흥일까요? 우리는 많은 부흥회를 경험했습니다. 그 부흥회를 통해서 각인된 부흥회의 이미지는 혹시 병 낫는 것은 아닐까요? 문제해결은 아닐까요? 신비적 환상을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병도 나아야 하고 문제도 해결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병들어 있고, 악한 영에 눌려 있는 것에 대해서 결코 좋아하거나 묵인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질고를 담당하신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고로부터 해방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의 목적은 병 고침만은 아닙니다. 어떤 문제해결만도 아닙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가득한 영적 상태 속에서 말씀으로 심령을 가득히 채워서 잃어버렸던 감격, 감사, 환희,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Revival'이라는 단어는 다시 라는 의미를 가진 're' 라는 단어와 '살다' 라는 의미를 가진 'vive'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이란 '다시 살다, 생명, 활력 또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다.' 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생명과 활력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일컬어 부흥리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져 영적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예배는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찬송도 부릅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첫 사랑의 감격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쉽게 피곤합니다.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 합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의 처음사랑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부흥입니다.
무엇으로 우리는 잃어버린 생명과 믿음의 활력과 담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메마른 심령을 갈아 업고 생수가 터지는 믿음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의 형식과 위선과 율법적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 속에서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을 섬기는 살아 있는 크리스쳔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말씀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가득해서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자하는 열망을 가득할 때 부흥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국 장춘의 신학원에 강의를 할 때입니다. 물론 육신 적으로는 피곤하였습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강론하고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쉬고 싶은데 도저히 양심상 쉴 수가 없습니다. 각 처소교회 지도자들인 평신도 집사님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지 말입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듣습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는 교회에 이미 영적 부흥은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6시간이나 서서 말씀을 들었지만 한 사람도 요동함이 없이 아멘, 아멘 하며 서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아멘, 아멘 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생명력 있느냐? 없느냐의 결정적 차이는 얼마나 말씀을 경외하며,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며, 얼마나 그 말씀을 내게 주신 주님의 음성으로 듣느냐 하는 들음의 태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너무나 말씀의 홍수 속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급스런 성경책이 많이 있습니까? 얼마나 세련된 성경공부 교재가 많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산재해 있습니까? 한번은 'sermon66.com' 이라는 설교 사이트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설교가 거기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다운받아서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 부족한 설교를 전세계 한국 목사님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섬짖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저기 얼마나 많은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 그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시더라. 그분 목소리 한 번 좋네. ' '그분의 제스쳐가 특이 하구만'
엊그제 덕일 중학교 교장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누다가 "지금도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제 아내의 기도 때문인지 도무지 술 먹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식사를 같이 하면 '목사님 죄송합니다' 해놓고 열심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었거든요. 이제는 생각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즐겨 듣는데 '목사님! 다 다르더구만요.'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강대상에다 화려한 꽃과 장식을 하고서 하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가운을 입고하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그냥 하시는 분, 어떤 분은 부드럽게 하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좀 사납게 하시는 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설교하실 때 은혜가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부드럽게 하실 때가 은혜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언제나 설교에 대해서는 죄인 아닙니까?' '아 내가 좀 부드럽게 해야 겠구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를 듣고 난 후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말씀을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는 고백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듣는 말씀
여러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감상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깨닫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열망과 몸부림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흥의 시작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고 철저하게 그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순종의 자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네 개의 창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창은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창입니다.
두 번째 창은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창입니다. 세 번째 창은 남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창입니다. 그리고 나도 남도 모르는 네 번째 창이 있습니다.
나에 대해 나도 모르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거울입니다. 그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민족을 왜 하나님께서 부르셨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낭독하는 그 말씀 앞에서, 또 율법을 해석하고 깨닫게 하시는 자들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았습니다. 감동과 감격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저들은 즉시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초막 절을 지킵니다.
진정한 회복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우리의 마음의 감동과 감격과 흥분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말씀, 나를 도전하는 그 말씀을 적용함으로 내 삶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가져와 영적, 도덕적으로 그 지역과 사회가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꿈을 꾸어봅니다. 저희 교회가 말씀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 성도들이 머무는 곳마다 환경이 바뀌어지는 꿈 말입니다. 첫째는 가정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축복과 격려가 있는 가정,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님 보다 더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자자손손 믿음을 계승하는 가정이 되는 것을 그려봅니다.
둘째는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지역과 삶의 현장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할까요? 좀 손해보고 사는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하고 좀 늦게 퇴근하고, 직장의 동료들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기억하여 선물과 편지를 건네주고 진정으로 축복하고,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면 이유를 불문하고 먼저 웃어주고 먼저 인사하는 운동, 가끔은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그런 운동을 일으켜 나감으로 지역의 환경, 직장의 환경을 복음 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운동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겠습니까?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령 속에 생명의 말씀이 임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사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축복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를 축복하며 말씀한 것처럼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영적 부흥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입니다. 높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흥은 일어납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9장은 말씀을 듣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기도하며,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고 굶을 베를 입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 했다고 하였습니다.
1절로 2절을 보시겠습니다.
느 9:1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느 9:2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아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구나. 우리 민족이 이방의 포로가 된 이유가 바로 그 죄악이었구나!' 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진정한 축복과 영광을 빼앗긴 채 어둠의 세월들을 살아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슬퍼하고 자복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 만해도 위대한 각성입니다. 그것은 부흥의 전조이며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부흥의 계절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행동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와 혁명이 필요합니다. 그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기도입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서 보니까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고, 자신도 죄를 범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슬퍼하는 표시로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었다는 말은 죄를 슬퍼한다는 표시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죽이며, 오직 영과 마음과 육신이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어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모릅니다. 도스트예쁘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에게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소냐라고 하는 청순한 믿음의 여인,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이 사람을 죽인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을 때는 자기가 죄인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잡을 수 없을 때, 나타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그 기적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거울 앞에 베드로는 위대한 발견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발견한 그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도전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는 더 이상 생선 잡이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낚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세계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부흥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죄를 죄로 여기며 그 죄를 슬퍼하며 그 죄 때문에 아파하고 애통해 할 때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우리 교회가 온 성도님들이 힘을 합쳐서 기도와 눈물과 거룩한 헌신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겠습니까? 그래서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벌이고 싶은 충동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씨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성전건축은 부흥을 위한 외적인 환경을 조성한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내적인 각성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건축한 후 금식과 자복을 통한 영적 각성은 이제 삶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첫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그들은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체적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금식만 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만 하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영적 부흥이 아닙니다. 금식하며 죄를 슬퍼하였으면 그 다음에 구체적 삶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금식하며 죄를 애통해 한 다음에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이방인들과 절교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적 가치관을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 가치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5만개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1200만 명이 됩니다. 그런데 왜 이 사회는 변하지 않을까요? 가치관의 혁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에서 주님 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이 안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중심적 가치에서 주님 중심적 가치로의 혁명이 내 속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역하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을 존귀히 하려 함이로다.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로다." 그 고백적 삶이 될 때, 우리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주님이 영광을 받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할까?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영광스런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증거 되게 하십시오. 그런 내적인 변화, 가치관의 혁명을 통해서만 우리는 부흥의 계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의 꽃-찬양공동체
주님 앞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첫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 부흥의 계절을 가져온 백성들의 모습은 이제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를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부흥의 꽃, 부흥의 클라이막스는 찬양과 예배로 가득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 때 "찬양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찬양가운데 우리 주님은 임재하시고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어둠의 영들이 완전히 떠났고 결박되었습니다. 모든 사단의 사슬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와 희락과 평강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존귀함이 충만합니다. 어떤 사람도 이 곳을 출입하기만 하면 봄눈 녹듯이 미움과 증오가 사라지고 사랑과 섬김의 사람이 되고, 봉사의 사람, 전도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생명력 있고,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처럼, 영적 부흥의 교회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의 비전을 위하여 먼저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전 건축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기도하고 헌신하면 성전건축의 비전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전건축을 통해서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회복하사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사도행전 적 교회를 세워 가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며 오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함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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