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은사 2002-02-16 11:17:33 read : 289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전12:31-13:3 <200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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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소, 붉은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
아 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
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뿐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셋
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왔는데 붉은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 하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
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소와 검은소에게 가서는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
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소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
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소는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
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펴니 정말 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그들 각자에게 나름대로 은사
를 주셨습니다. 다 소중한 은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에 더 좋아 보이고 더 커 보이는 은사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 각자에게 소중한 은사를 주셨습니까?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잘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받은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
기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은
사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더러는 은사 때문에 자만에 빠지는 사람도 생겼고, 반대로 은
사 때문에 풀이 죽어서 열등감 속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잘못된 은사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위대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받은
은사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직분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또 섬기는 일도 다를 수가 있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같이 다 소중한 일군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동기는 오직 한 가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
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큰 일을 한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한다든지 또
는 자신의 어떤 육신적인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섬기는 일이 된다면 아무런 의미
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찬사를 받으면서 결혼한 사람이 찰스 왕자입니다. 다이애나와 함께 결
혼한 그 결혼식은 온 세계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직접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를
다녀가신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녀가 4남매입니다. 그러나 찰스 왕자를 비롯해서 지금 세 명
이 이혼을 했고 마지막 에드워드만 남아 있습니다. 제일 화려한 결혼식, 제일 돈 많은 결혼
식, 제일 선물이 많은 결혼식, 전 세계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해준 결혼식, 전부
집을 다이아몬드로 꾸밀 정도로 온갖 좋은 것들로 다 꾸몄지만 이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무너질 뿐만 아니라 만신창이가 되었고 헤어져서도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아
픔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유리알처럼 다 깨어져 버린 이 사랑이 무엇 때문입니까?
돈이 없습니까? 권력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집을 아무리 잘 꾸며도 지금 이 찰스 왕자와
같이 꾸밀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
습니까? 사랑의 수고도 없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그러나 진정 돈이 있음으로만 되는 것이었을까요? 세상의 많고 많은 문제들 중에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으로, 문제
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체에
뿌리한 문제로서 비인간화의 문제요, 인간 상실의 문제며, 인간 존재 파괴의 문제입니다.
요즘 사람 사랑하는 것보다 개사랑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
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사랑하다가 개만 못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개 기르는 시대가 옵니다. 개하고 살아갑니다. 개가 열 배나 낫다는 거예요. 개는 먹이를 주
는 주인은 물지도 않고 또 은혜를 배반하지도 않아요. 개는 항상 주인을 위해 충성하고 그
자리에서 지켜주고 주인의 말을 잘 따릅니다. 사람이 그렇게 지금 해주고 있습니까?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은 개를 사랑하는 시대가 옵니다. 개와 함께
자고, 개와 함께 먹고, 개와 함께 여행하고, 그래서 여행할 때도 비행기에 개를 가득 싣고
주인과 함께 떠납니다. 개와 함께 목욕도 합니다. 개 메뉴에 관심을 가지고 개의 식탁을
준비하느라고 슈퍼를 드나들고, 유명한 미용사를 찾아서 가장 잘하는 곳으로 개를 데리고
갑니다. 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모든 시간, 모든 관심, 모든 돈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겪어보니까 개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우리가 욕을 할 때
"저 '개' 뭐"하고 아주 개자만 붙이면 나쁜 욕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만 못한 사람
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 네 분이 보신탕 집에 갔어요. 미국 가서도 한국 사람은
보신탕을 버리지를 못해요. 여름에 땀 날 때 보신탕 드시러 갔어요.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합니다.
"선생님 무엇을 잡수시겠어요?"하니까
"보신탕 집에 왔는데 개 말고 뭐 있나?"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알고 그 다음에는 다른
분을 향해서 "선생님도 개예요?" "선생님도 개예요?" "선생님도 개예요?"
그러니까 네 분 목사님이 다 개가 된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개들은 천 년 만년
전의 개들처럼 변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과 재난, 기
근과 질병, 사회와 정치, 경제 그리고 가정과 종교, 도덕적 문제 등 참으로 많은 복잡한 문
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가 당면하고 있는 이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특징을 몇 가
지로 규정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먼저는 문제에 끝이 없다고 하는 특징입니다. 어떤 하나의 문제에 해결을 보았는가 하
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 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원인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
니다. 따라서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나 지
친 나머지 차리라 문제의 해결을 포기한 채 이대로 안고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도 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문제의 해결이 또 다른 큰 문제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문제는 불확실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문제 자
체를 놓고 이렇게도 말해보고 저렇게도 주장을 펼쳐 보지만 아무도 확실한 이야기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거니와
아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문제는 불확실하고, 따라서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방향 감각을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세대가 어디로
가소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방향 없는 세대! 문제의 원인도 모르며, 문제에 대한 대
책도 해결도 없는 막연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우리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
습니다.
우리는 문제의 실상을 바라보면서 사회적인 문제, 혹은 타인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시키려
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단순하게 좁혀서 생각을 해 보면 문제는
나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결코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요, 사회 문제가 아
니라 내 개인과 내 존재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문제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건강의 문제도 아니요 소유
의 문제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위나 명예의 문제도 아닙니다. 숨길 수 없는 나의 문
제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 함께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요 유서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서 미래에
되어질 세상 형편을 내다보면서 예언하는 가운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랑의 변질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시작도 끝도 자기를 사랑하는데 근거합니
다. 따라서 사랑은 있으되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사랑! 돈을 사랑하며, 물질주의, 유물주의
적인 사랑으로 기울어질 뿐만 아니라 쾌락주의, 향락주의적인 사랑으로 본래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변질되고 병들어 가고 있음을 내다보는 대 사도의 영안의 말씀이었습니
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사랑의 타락이 왔습니다. 우리의 현실, 우리의 실존 깊이 깊이에 타락
된 사랑의 물결이 스며들고 있다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 존재가 파괴되어 갑니다. 이제 이 인간 존재를 구제하는 길이 어디에 있겠
습니까? 물량주의! 지식주의! 업적주의! 이러한 것들로서는 인간을 살릴 길이 없습니다. 오
직 단 한 가지, 참 사랑 만이 인간 회복의 처방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서적인 진
리요, 본래적인 길입니다.
한 포기의 화초를 가꾸는 일에 있어서도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마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
면 그 화초는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재미있는 분이 나무 열두 그루를 심어 놓
고는 거기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각각 써 붙여 놓았더니 이상하게도 가룟 유다라
는 이름의 나무는 항상 죽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 가는 사람, 오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한 마디씩 내 뱉는 상스러운 말을 듣다보니 그 나무는 하루하루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포기의 식물도 사랑을 받지 않고는 자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랑에 있고
그 숱한 위기의 절박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내 사랑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
습니다. 나의 사랑이 건재한가? 그리고 나의 사랑이 깨끗하고 건강한가?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인가? 아니면 잘못 찌들거나 병들지는 않았는지 세심한 재점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순간, 일반적인 흔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중생한 사랑, 곧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그 사랑을 아는 자만이 사랑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성서적
상식으로 아가페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서에 나타난 사랑의 태반이 이 아가페로 표현
된 것들입니다. 이는 곧 거룩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
님의 사랑에서 출발되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과 동시에 사람을 자
유케 함으로 그 방편을 삼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무한하고도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에로스라고 하는 사랑은 극히 수평적이요 인간적인 것으로 자기 욕망에서 출
발하여 자기 만족을 목적으로,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박하며 마지막에는 증오와 원망
으로 끝내고 맙니다. 그 좋은 예로 우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유명한 소설 '살로메'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살로메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헤로
디아의 딸입니다.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는 헤롯 빌립의 왕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남편
인 빌립보다는 남편의 형님되는 헤롯 안티파스가 더 큰 권위와 힘을 가진 것에 끌려 자기
남편을 버리고 시숙되는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어머니의 딸이기에 살
로메 또한 그에 못지 않는 생각과 질투심을 나는 우리 어머니가 취한 저 의부보다 더 크고
힘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이 무모한 여인 살로메는 세례
요한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합니다마는 어디 이것이 될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그 때문
에 결국은 세례 요한을 감옥에 집어넣고는 밤마다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작품을 떠나서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쳐
대던 세례 요한이 이 요염한 살로메를 향해 어떻게, 무슨 말을 하였을 것 같습니까? 아마
도 지독한 욕을 하였으리라는 짐작을 합니다마는 어쨌든 이 여인 살로메는 계속 사랑을 고
백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끝까지 그 고백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헤롯왕의
생일을 맞아 축하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 연회석상에서 이 살로메가 요염한 자태로 춤
을 추게 됩니다. 그럴 때에 여기에 만족한 헤롯왕은 살로메를 향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무
엇이든지 주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살로메는 마침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자기
에게 달라는 청을 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은 쟁반에 담겨진 채 그녀에게로
주어지게 됩니다. 소설에서 묘사되어진 대로 보면 이 목을 받아든 살로메는 피가 철철 흐르
고 있는 세례 요한의 목을 끌어안고는 거기에 키스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여기에서 이
것이 곧 인간적인 사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 높이 보여야 하고 좋게 보여야 하고 그리고 빼앗으며, 빼앗다 못
하면 죽여서라도 입맞춤을 하여야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어
떻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까지나 자기 욕망, 자기 중심에서 출발된 사랑이란 마
지막에 가서는 남을 죽이고 자기는 자살하는 허무주의로 끝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실태를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적 사랑의 극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이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으
로 출발하여 자기 희생을 방편으로 창조적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참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서 이 사랑은 은사, 곧 신령한 선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선물입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의 선물됨을 바로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진실된 사랑은 인간
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깨닫게
하시고 또한 주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 그러나 아무리 귀한 선물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선물됨과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결코 선물이 아닙니다. 만약 선물을 통하여 속박을 느낀다면
그 선물은 하나의 뇌물일 뿐 선물일수도 사랑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이에 감격하며, 바른 응답을 하는 그 자체가 곧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사랑도 선물이요, 사랑을 깨닫는 것도 선물이며, 주신
바 사랑 안에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받을 때에 그러한 감격과 감사한 마음
으로 받아들이셨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십
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과 그 자세가 어떠합니까? 진정 무릎을 꿇고 "나는 이
렇게 엄청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구제불능의 죄인인 나를 어찌 사랑하
십니까?"하며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바른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사랑
이라는 것입니다.
40년 동인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신앙의 감격이 없어 답답해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수녀원에 투신하여 계율과 의무에 열중했지만 마음의 차
가움과 공허는 여전했습니다.
어느 날 복도를 걸어가다가 주께서 헤롯의 뜰에서 채찍을 맞으시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수 백번도 더 본 그림이었으나 그날 그 순간 그 그림은 전혀 새로운 경이로 다가오기 시작
했습니다.
여기서 여인은 자신을 위해 고난받고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 순간 그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참 후 여인은 일어섰습니다. 새 영혼으로 일어섰습니
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심정으로 일어섰습니다. 더 이상 이 여인은 옛 사람이 아
니었습니다. 사랑의 바다가 여인의 가슴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성 테레사
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은사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
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은 사랑! 이것이
곧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며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본문에 앞서 보면 병 고치는 은사, 방언과 통역의 은사 등 여러 가지의 은사를 말하고 있
습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에 이르러 그 결론으로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시작인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며, 그에 따라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면서 사랑
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요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 은사로 인하여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
도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의 장으로 누구나 여기 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
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면 오직 사랑만이 동기가 되고 의미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란 무엇을 뜻
하는 말이겠습니까? 방언이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말을 사용함으로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흔히 말하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곧
이 방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대화라는 것을 두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 없는 대화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근간에 와서 유독 대화라는 말이 흔하게 들려옵니다마는 그러나 사랑 없는 대
화이기에 말만 많고 시끄럽기만 합니다. 좋은 뜻에서 대화를 하겠다며 시작을 했다가 마침
내는 싸움으로 끝을 냅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랑이 없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하나 같이 자기 말만 하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 보
니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뜻도 내용도 없는 시끄러운 소리만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세대입니다. 말이 없고 대화가 적어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대화는 싸움으로 끝나고 의심하는 대화는 완전히 무효인 것입니다. 그
러므로 오직 사랑만이 가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모든 믿음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참으로 극단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
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희생을 치른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생명을 주면서도 거기에 사랑이 없는 한 아무런 유익도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보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변론을 벌여서는 수고와 구
제와 희생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통달한 지식도, 산을 옮길만
한 믿음도,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희생과 제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수고를 했다하여 큰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일은 했으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럴싸한 교훈도 있고 예리한 비판도 있으며, 폭넓은 토론과 수고도 있는
듯 하나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
무 효력이나 유익도 없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닌 그대로입니다. 모든 의미의 창조는 사랑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되게 하는 것이며,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이미지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오직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왜 힘이 있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계를 통치하
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우리
를 구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큰 거예요.
사랑은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어야 하고
사랑의 선물을 받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위로부터 주어진 바 받은 바의 사랑
이 가장 큰 은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어부의 한 사람으로 돌아
가 갈릴리 바다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앞으로 큰 일을 해야하겠기에 그
를 찾아가신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거듭거듭 물으십니다. 이 물
음 속에는 이미 그 대답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왜 모른다고 하게 되
었는지 아느냐? 그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겠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질문에 오직 하나
의 대답! 그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고 허무가 있으며 실망이 있는 것입니까? 나름대로 진실
하게 사노라고 애써 왔는데 왜 이렇게 공허하고 불안한 것입니까? 낙심이나 피곤도 마찬가
지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처음 사랑을 잃
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삶의 목표로 세우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늙은 제자 사도 요한은 말년을 에베소에서 보내며 불편한 몸으로 제자들 앞에 나아와 설교
하게 될 때마다 거의 매번 예외없이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증거했습니다.
한 제자가 어느 날 스승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무슨 새 계명이 없으십니까?"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톤이 죽은 지 삼년 후에 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된 설교가 헨리 드러
몬드는 그가 만나는 대륙의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톤을 가까이 했던 이들에게 리빙스톤의 평
소의 인상을 물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입술에서 한 가지 일치된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가 검은 대륙을 복음화 할 수 있었던 비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청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지닐 수 없으며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정도 또한 극히 적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서 말을 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모
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내 주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을 통하여 나와 함
께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유익을 얻도록 간섭하시는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극적인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오직 사랑을 따라 구하며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마음 깊이 묵상하시고 좇아가도록 노력하며 그 일을 연습하시고,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
오. 이 제일 좋은 길을 주 앞에 구하시고, 큰 은사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애가 주의 영
광을 위하여 쓰여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