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믿음에 2002-02-16 11:46:59 read : 257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1:16∼17 <2002-02-10>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고 '아무개야, 내가 네게 준 것들을 다 내 놓아라.
다만 그 가운데서 하나만 갖는 것을 허락하겠다. 무엇을 갖겠느냐?' 하신다면
여러분, 무엇을 갖게 해달라고 하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이럴 때 하는 대답이 전해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통사
상이 강한 사람들은 이 대답을 합니다.
"네, 조상의 신주입니다!"
집에 불이 나면 신주부터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유교의 전통 가운
데 하나입니다.
이런 전통은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습니다.
중국이 1960년대 중반부터 문화대혁명을 겪었습니다. 모택통(毛澤東)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것인데 낡은 문화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많은 것을 파
괴했습니다. 기독교도 낡은 것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어서 기독교인들이 이 때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조상숭배와 관계된 것들도 다 파괴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중국이 현대화되는 것을 보면서
'중국이 예전처럼 조상숭배 같은 것에 강하게 묶여 있었다면 저와 같은 현대화
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자, 여러분, 하나, 무엇을 갖게 해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럴 때는 누구나 선택의 여지없이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네, 믿음을 갖게 해 주십시오!'
"다른 것은 다 거두어 가더라도 믿음만은 거둬가지 마옵소서"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 됩니다.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 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잃었던 것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믿음이 없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 경전인 「탈무드」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에게 외아들
이 있었습니다. 이 부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재산
모두를 나의 노예에게 준다. 내 아들은 내 재산 가운데서 하나만 가질 수 있
다", 아들은 기가 막혔지만 아버지가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랍비와 의논했습니다. 랍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해결책을 알려 주었습
니다.
이 아들은 무엇을 가졌을까요? 바로 그 노예를 가졌습니다. 예전에는 노예가 재
산의 일부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그 노예가 차지했던 부자
의 모든 재산은 자연히 아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한 탈북자가 서울에 왔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담당한 분에게 여러 가지를 묻
는데 그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니 서울에는 왜 이렇게 더하기 표
가 달려 있는 건물들이 많습니까?", 담당한 사람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빙그
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인데 기독교인들이 믿음
의 표시로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달려 있는 건물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당
신이 잘 보셨습니다. 십자가는 더해주는 것입니다. 복을 더해주고 기쁨을 더해
주고 소망을 더해주고 사랑을 더해줍니다", 믿음은 더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또 곱하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곱셈을 하는 데는 앞의 숫자도 중요합
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뒤의 숫자입니다. '만 곱하기 영', 뒤의 숫자가 영
이면 모두 영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뒤의 숫자가 영인 것과 같습니다. 앞에 건강, 재물, 지식, 많
은 것이 있어도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영이 됩니다.
믿음을 가진 것은 뒤의 숫자가 무한대인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8절 이하에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
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아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부부 사이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사장이 직원들을 믿지 못하면
그 회사가 유지되지 못합니다.
운전기사에 대한 믿음, 또는 자신의 운전 솜씨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교
회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습니다. 오늘 같이 눈이 살짝 온 날은 더욱 그렇습
니다.
이런 것은 차원이 좀 낮은 믿음들입니다. '신뢰'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요.
차원이 가장 높은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풍성한 사람이 정말 풍성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풍성한 때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이 많이 일어난 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믿음이 많은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
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런 소박한 질문을 갖게 됩
니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면 '그런즉 사랑, 믿음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
을 것인데' 이렇게 사랑을 먼저 말했어야 할 터인데 왜 제일 뒤에다 놓았을까?',
이런 것은 불필요한 질문이지요. 이런 불필요한 질문 때문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 질문을 통해서 하나의 깨달음을 갖
게 됩니다.
'제일이라고 하는 사랑도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는구나!'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방탕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믿음은 삼각형의 밑변과 같습니다.
건축에서 기초공사와 같습니다.
로마서는 이 믿음의 소중함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 가
운데 가장 중요한 성경이라고 누구나 말합니다.
로마서의 많은 말씀 가운데에서도 오늘의 본문 1장16절과 17절은 로마서의 주
제로서 믿음의 중요성을 아주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지금 '믿음의 소중함' '믿음의 중요성' 이런 말을 썼는데 '믿음의 절대성'이
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번 주간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에서 무엇
을 설교할까?'
이것이 얼마 전부터 큰 숙제였습니다.
'3년 전에는 고난받은 종의 노래를 가지고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지켰고 재
작년에는 하박국서를 강해했고 작년에는 예레미야 애가서를 강해했는데 올해
사순절은 어떻게 할까?'
'무엇을 설교할까?', 설교의 주제가 결정되면 설교 준비는 반은 된 것입니다. '이
것을 설교해야 하겠다!' 하고 강하게 느껴지는 것일수록 준비하기도 쉽고 은혜
도 큽니다.
시편 가운데에서 수난을 주제로 한 신앙시들을 골라 강해할까?
지금 새벽기도회에서 여호수아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여호수아 다음에 있는 사
사기를 가지고 '사순절의 빛에서 본 사사기'라고 해서 강해할까?
아니면 룻기를 강해할까?
쉽게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새벽기도회 설교를 마치고 담임목사실로 올라가는데 마음속에
'로마서!'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흥분되고 기쁜지 그 즉시로 로마서 강해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이 되면 사순절에 지켜야 할 일들을 적어 사순절 신앙캘린더를 만들어
나눠드리는데 올해 '사순절 신앙 캘린더'에는 새벽기도회 성경강해 계획까지
넣을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이 주일을 포함하면 47일인데 토요일은 새벽기도회가 없고 주일은 부목
사님들이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니까 저는 사순절 기간에 설흔세 번 새벽기도회
강단에 서게 되는데 「개역 개정」을 살펴보니까 소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 설
흔세 개로, 일치가 되어서 계획 짜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목사님들이 어느 교회에 부임해서 성경강해를 할 때 제일 먼저 강해하게 되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로마서가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건물을 새롭게 꾸미는 '리노베이션'(renovation)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리노
베이션을 하면 건물이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리노베이션을 할 때 건물의 기초
부분까지 손대기는 어렵습니다.
로마서를 통해 은혜 받는 것은 믿음의 리노베이션인데 기초부터 리노베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신앙강화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번 사순절이 기도 강
화, 묵상 강화, 전도 강화, 성경 읽기 강화, 경건 강화, 예배 참석 강화, 선행과
구제 강화를 통해 믿음이 기초부터 새로워지고, 원점에서 다시 한 번 출발하는
은혜로운 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독교의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복음' '구원' '하나님
의 능력' '하나님의 의' '믿음' '의인', 이제 남은 시간에는 그 가운데 하나인, 17
절에 있는 "믿음으로 믿음에" 영어로는 'from faith to faith', 헬라말로는 '에크
피스데어스 에이스 피스턴'(
), 이 말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려고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은 그저 말을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말을 가지고 무
늬를 놓은 것이다"라고 말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 말에는 깊은 진
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서점에 가서 성경강해 서적들을 찾는다면 로마서를 강해한 책
들이 제일 많은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로마서 강
해를 두 권으로 나눠 냈는데 상권, 교리를 강조한 부분의 제목을 「믿음에서 믿
음으로」라고 했고 하권, 실천을 강조한 부분의 제목은 「믿음에서 진실에로」
라고 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은 그만큼 함축적이고 믿음의 깊은 진리가 담겨 있
습니다.
이 말은 먼저 믿음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처음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고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입니다.
처음이 믿음이고 중간이 마지막이 믿음이면 그 중간도 믿음이 되어야합니다.
연휴에 길을 떠나는데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난 사람도 있고 여행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을 떠난 사람은 그 곳으로 가는 길이 막히거나 마음이 바뀌면 목적지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온천으로 가려다가 바닷가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는 사람들은 목적지를 바꿀 수 없습니다.
믿음은 여행이 아닙니다.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좀 힘들더라도 계
속해서 가야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처음에는 믿음으로 잘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인들의 꼬임에 빠져 바울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괴로
워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3절에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
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에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육체로 마치는 사람이 없기 바랍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음의 길을 달려 믿음의 종착점에 이르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벗어나는 사람들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
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
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면
멸망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은 방향을 가진 믿음이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을 영어성경은 'from faith to faith' 이렇게 번역하
고 있습니다.
'from '만 있고 'to'가 없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은 발신인은 있지만 수신인이 없
는 편지처럼 무익하고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매우 고달픈 것이 됩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from도 가르쳐 주고 to도 가르쳐 줍니다. 출처도 가르쳐 주고
목적지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해 정
확한 답을 들려줍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앞의 믿음은 율법 시대의 믿음, 옛 사람들의 믿음을 말하고 뒤의 믿음은 새 시
대에 속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의 믿음은 구약적 믿음이고 뒤의 믿음은 신약적 믿음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
습니다.
앞의 믿음은 율법적 믿음이고 뒤의 믿음은 복음적 믿음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
니다.
앞의 믿음은 얕은 믿음, 뒤의 믿음은 깊은 신앙 믿음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
다.
앞의 믿음은 외적인 믿음이고 뒤의 믿음은 내적 믿음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
다.
앞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 뒤의 믿음은 그것을 전해 받은 성도들의 믿음이라
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믿음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가지고 나가야합니다.
믿음은 완료형이 아닙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완료형의 믿음, 멈춘 믿음은 고여 있는 물과 같아 썩습니다.
우리가 세례와 신앙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순간의 믿음을 가졌으
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마지막 날의 믿음을 바라보며 나가야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헬라어는 '에크 피스데어스 에이스 피스턴'인데 '에크'(
)라는 말은 '무엇의 안에서 밖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믿음으
로"는 "믿음의 원칙에서 믿음의 응용으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통해 믿음의 원칙을 굳게 했으면 이제 믿음을 응용하기 위해 나
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터전들, 가정, 일터, 학교가 믿음의 원칙이 적용
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또 내 믿음에서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다시 말해서 믿음이 확산되는
것, 간단하게 말해서 전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적극적으로 표
현하고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보세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
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복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인 오늘 본문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는 말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의 복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복음은 아직 인정 받
지 못하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엇인가 신기한 것,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는데(고후1:22) 복음은 신기해 보이지도 않았고 지혜로
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또 로마사람들은 실제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복음은 실제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애매하고 추상적인 것이고 허황된 것처럼 여
겨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담대하게 말합니
다.
여러분, 이번 설에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게 증거하기 바랍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 말의 깊은 이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그 '의'는 경찰이나 검찰이 말하는 그 의, 사
회정의 할 때의 그 의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것' 이렇게 이해해
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것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은 "복음은 하나
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
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뜻인데 구약성경 하박국서 2장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처럼 하나님께 대해 질문이 많았고 항의를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런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리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박국의 질문, 불평, 투정, 항의가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왜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많습니까? 부
조리 투성이입니다' 하던 것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
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합3:17)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이 없더라도, 아니 좀 부족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끈이 믿음입니다. 이 끈은 생명의 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라
는 통로를 통해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복음을 자동차에 비교해 봅니다. 이 자동차를 세워놓기만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동차는 달려야 자동차입니다. 이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 믿음
입니다. 자동차에는 기름이 필요한데 성령이 바로 기름입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성도는 청지기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우리
는 이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이 아
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청지기가 되어야합니다. 믿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믿음을 땅
에 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적지는 믿음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믿음의 길
을 걸어 믿음에 이르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갖기 바
랍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서 믿음의 길을 걸어 믿음에 이르는 삶으로 자신에게는 모든
것의 풍성함이 있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믿
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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