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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같은 삶을 사는 법
    2002-01-29 13:15:01   read : 240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3 :11~26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설교 제목을 '기적 같은 삶을 사는 법'이라고 정했는데, 이 제목을 선택하기까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 '할 수 있다' '칠전팔기(七顚八起)'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말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꿈을 이룩한 사람들의 모토였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의 꿈을 이룩해 냈습니다.

    나폴레옹은 30대에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불가능은 없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그들의 꿈을 이루어 갑니다. 나이팅게일은 아주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매우 천대받는 간호사의 신분으로, 영국에 수많은 병원을 세우고 나아가서 인도, 아시아에서 위대한 간호사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90세 일기동안 그가 해낸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이룩한 일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신에게 당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조그만 슈퍼마켓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불도저가 와서 옆집 땅을 밀더니 대형 할인매장이 서는 겁니다. 한두 달 지나자 그 옆에 땅을 닦더니 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섰습니다. 양쪽에 대형 매장을 거느린 이 작은 가게 주인은 몇 달을 고민하다가, 있는 돈을 다 털어서 한 아이디어를 고안했습니다. 그 작은 가게 지붕 위에 네온사인으로 대문짝만하게 '들어가는 곳'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까?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고 외쳤던 나폴레옹은 자신을 비관하며 유배지에서 죽어갔습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권투선수 클레이션스는 지금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중풍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그렇게 건강했던 사람들이 한번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사람이 작은 악성 종양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의지가 있고 투지가 불타고,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우리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적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시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얘들아, 너희가 너희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아니? 아니야! 너희가 모든 것을 이루는 것 같아도 너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내가 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너희는 안고 산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설명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입니다. 때로 내 마음을 내가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병원에 가도 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스스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도움, 기적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마음속 깊이 기적을 바라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집사람을 병원에 넣어놓고 수술을 하는 동안 암이 퍼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수술 후 2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적을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의학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는 암, 병원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받지 않고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저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라서 이 기적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여기 앉은 모든 분들은 표현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과 마음의 문제이건, 경제, 자녀, 부부간의 문제이건 간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을 바라는 문제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기적을 요구하는 이 엄청난,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청산해버리고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해답을 몇 가지 주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영안 교회에 35년째 나오는 분이 있을 겁니다. 50년을 지나다니는데 여기에 한 앉은뱅이가 앉아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부터 그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갈 때마다 한 푼의 적선을 기다립니다. 처음에는 그냥 한두 푼 주다가, 왜 여기 앉아있느냐고 시비도 걸었다가, 미워서 한 푼도 안 주다가, 회개하고 나가서 또 한 푼 주기도 하며, 아마 수많은 관계를 형성했을 겁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알았을 것이고, 그 사람도 여러분을 알고 우리도 그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국수를 먹고 있는데, 한사람이 뛰어옵니다. "이보게 김집사, 우리 교회 앞에 그 앉은뱅이 있지? 그 앉은뱅이가 일어났어!" "앉은뱅이가 일어나다니? 무슨 소리야!" "그 앉은뱅이가 지금 일어나 뛰어다닌다고!" 여러분은 이런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수를 먹다가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뛰어나갈 겁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그 일어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들을 놓아줄 수 있겠습니까? 평생 해결하지 못할 문제,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이 앉은뱅이의 문제를, 베드로와 요한이 찾아오더니 "나를 보라! 우리를 주목하라!" 하고 영적인 관심을 일으킨 다음에,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며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수천 명이 있는 가운데서 베드로와 요한을 놓치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는 그 두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들, 저를 떠나지 마세요! 제가 그동안 이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하고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설교란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사건을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에 대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 설교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한 사건을 보고도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자신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부탁하십니다.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을 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모여서 놀란 눈으로 베드로를 쳐다보자, 설교 가운데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책망하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아, 왜 놀라느냐!" 두 번째,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여! 이것은 당신들이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보고 놀라서는 안됩니다" 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이 일을 만일 사람이 행했다면 놀라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의사가 앉은뱅이를 고쳤다면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사람이 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는 반응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말씀 한마디로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말씀 한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앉은뱅이 한 명 일으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오죽하면 한 저자가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책을 썼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믿지 않고 내 생각대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늘 내 생각 속에 제한하며 믿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의 한계를 넘을 수 없으니까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믿기는 믿는데, 말로만 믿는다고 합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일어나는 매일 매일의 기적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와 앉아 있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무감각과, 종교의식으로 예배는 드리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내 생애에 개입하셔서 기적을 일으켜 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서 놀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에는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두 번은 집에서 기도해야 하고 한번은 성전에 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후 세 시는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수만 명의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아마 요즘의 집사 정도였을 겁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로, 앉은뱅이가 일어나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 사업장 가운데서, 여러분의 상식을 벗어난 기적을 행하는 분이심을 마음으로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이런 기대감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 안에 가둬놓고 믿기 때문입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가르치는 진리는, 오직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대부분 그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기적을 행한 사람은 우쭐해 하고, 기적을 당한 사람은 사람을 집중합니다. 그래서 어느 기도원에서 병이 나았다고 하면, 그 기도원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룹니다.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하고, 집 팔라고 하면 집을 팝니다. 결국 그 기도원장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이단 판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재록 목사입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수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앉은뱅이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기도 많이 하고 경건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이 기적의 근원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있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침례교 집사이며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반 클라이반을 저는 잘 압니다. 그는 독신입니다. 음악회에서 반 클라이반이 피아노 연주를 하면 여러분이 일어나서 박수를 칩니다. 왜 박수를 차고, 박수를 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반 클라이반에게 칩니다. 그런데 음악회가 끝나고 반 클라이반은 본체만체하고 "야, 오늘 음악 좋았어! 피아노 끝내주네!" 하면서 피아노에 박수치는 사람 봤습니까? 이와 같은 행동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누가 병을 고치면 능력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가져가고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 인줄 아십니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맛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시선이 빼앗겨서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안수하지 않고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내 병을 고쳐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사람을 쳐다봅니다. 어떤 능력 많은 목사를 쳐다보고, 어떤 능력 많은 기도원장을 쳐다봅니다.

    어떻게 기적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직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제가 어떤 병자를 고칠지도 모릅니다. 제가 설교를 더 잘해서 우리 교인이 2천명, 3천명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저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저의 어떠함으로 인해서 이 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흥 된다고 믿지 마십시오. 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닙니다. 교인 중의 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부흥이 가능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새 힘을 얻음과 같이 날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가정과 사회에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외치고 매달리는 영안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아주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얘기합니다. 이름이란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하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름의 철학적인 의미는, 그 존재와 나와의 만남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사람이 나에게 대답하고, 나와 그 사람이 만나는 관계를 얘기합니다.

    여기서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고쳤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이름을 불렀더니 예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 하고 부르면 듣지 않고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우리와 관계를 가지셨기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의 존재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부르면 그 사건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는 사건이 됩니다. 이 설교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벽만 해도 저는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몸에 힘이 없어서 '아, 이렇게 힘든 날도 있구나!'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힘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집은 예수님의 집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침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다(2:21)" 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었느니라!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 중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주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기도해 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다양한지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등등,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주문이 아닙니다. '수리수리 마수리'가 아닙니다. '열려라 참깨!'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불렀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16절은 이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이 응답하시는 관계는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그 이름 앞에 서는 우리의 자세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서는가? 쉬운 말로 '믿음'입니다. 보통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얘기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내 믿음' 가지고 합니다. 아주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보면 자신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정신통일로 생각합니다. 기도하는데 의심이 들면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 하는 겁니다. 정말 마음에 믿음이 오면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 말은 안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믿으려고 용을 쓰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정성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한국의 미신과 유사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이죠. 정성을 많이 들이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일 철야기도, 새벽기도, 3일 금식기도, 40일 금식기도 3회, 등등을 해보다가 그래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면, 유명한 목사를 찾아가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동기입니다.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을 정신 통일이나 내 의지로 생각하고, 믿음이 나에게서 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믿음인데 누구를 통해서 난 믿음인가? 예수를 통해서 난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삼각산에서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내려오려고 했는데, 홍수가 났습니다. 소낙비가 와서 냇물이 불었는데, 여자 집사 세분이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꿇어앉아 기도합니다. "주여! 모세가 홍해를 건넜으니 우리도 믿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그 냇물을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겨서 낙동강 하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런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을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때로 목회 하다가 환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심방 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떨 땐 기도해도 확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의지를 많이 들여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엔 하나님의 감동이 충만할 때가 있습니다. 저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럴 때 기도하면 저와 상관없이 그 일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타종교의 믿음과 다른 겁니다. 정신 통일하는 믿음, 정성을 들이는 믿음, 그런 믿음은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다른 종교의 믿음과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그것은 예수로부터 말미암은 믿음인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새벽 눈을 떠서 예수님을 불렀더니,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응답하셨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왜 기적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죄악 가운데 여전히 거하면서 예배만 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는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기적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으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하고 돌이키라.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는 강조점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17절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이 말은 로마 군병이 아닌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인데,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것을 믿을 때 그 이름이 내게 응답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렇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란 무엇입니까? 지난날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Jesus Christ Super Star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오페라, 영화 등으로 만들어져서 많이 공연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가룟 유다가 살아나 노래합니다. 진짜 살아난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의 혼령이 돌아와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구슬피 울며 돌아다니며 이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가 'Why didn't you tell me (왜 내게 말하지 않았나요)' 입니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왜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요? Why didn't you tell me! 당신이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왜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나요? Why didn't you tell me!' 가룟 유다의 혼령이 돌아다니며 이 노래를 울며 부르는 장면은 정말 사람의 폐부를 찌르게 합니다.
    가룟 유다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얼마나 많이 "내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지만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라고 수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혼령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3년을 따라다녔는데, 그가 하나님임을 몰라보고 팔아버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면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었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한 척 하지만 미련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은 무지(無知)에 근거합니다.
    인도의 한 동네에 아직도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죽는 마을이 있습니다. 왜 따라 죽는가? 남편을 화장시킬 때 여자를 묶는 것이 아니고,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남편을 꼭 껴안고 불에 타 죽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교사가, 여자가 빨리 죽지 않으니까 휘발유를 몸에 끼얹어 주었습니다.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의 공덕비를 세워줍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지(無知)가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까?

    회개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콧물 흘렸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과거에 내가 몰랐던 것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성경에 천국이 있다고 했는데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똑똑한 척 하며 살아왔는데 헛된 삶을 살았습니다. 돈과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모태 신앙을 자랑하며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아왔습니다. 그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돌이키는 것,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은,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안다고 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멸망 받은 것입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지난날에 하나님 앞에 무지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잘난 줄 알았습니다. 제 주먹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헛살았습니다. 저를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주님, 제가 이제 돌이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기적을 맛보며 살아갑니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부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자녀를 어떻게 올바로 교육할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 가능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회개할때 한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 단어는 '카이로이 아나프쉬케오스' '카이'는 'Again'입니다. '아나프쉬케오스'는 '숨을 불어넣다'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흙덩이가 생명이 된지라!"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생령이 된 영혼이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그 영혼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올 때, 우리 영혼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수십 년 믿고도 유쾌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쾌한 맛을 아십니까?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며 괴로워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내 영혼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유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떤 것인가? 유쾌한 삶입니다.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만, 오늘 본문의 이 재림은 그 날의 재림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서 우리의 영을 부흥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유쾌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쁜지 하루 하루가 기쁘고, 병들어도 기쁘고, 망해도 감사하고, 교통사고가 나도 기쁩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사도 바울의 삶,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당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육체적 질병인가요? 경제적 어려움인가요? 마음의 문제입니까? 당신은 오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말씀을 순종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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