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은 자의 기도 2002-01-29 13:22:49 read : 258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4:32 ~ 35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교회에서 흔히 쓰는 단어일수록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믿음을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는 때가 많습니다. 또 '사랑'은 무엇입니까? 눈물의 씨앗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다룰 '은혜'는 또 어떻습니까?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합니다. 주일날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참 많이 은혜 받았습니다." "아, 저 집사님은 보기만 해도 은혜스러워!"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쳐!" "나는 정말 큰 은혜 받았어!"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가 했나요!" 이렇듯 '은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는데, 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원래 은혜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 부연한다면,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 영어로는 'Grace'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신 신학자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도날드 반 하우스입니다.
"위를 향한 사랑, 그것은 예배이다. 바깥을 향한 사랑, 그것은 자비이다. 아래로 향한 사랑,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렇습니다. 은혜란, 아랫사람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윗사람이 그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33년 동안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얘들아, 너희는 원숭이와 다르다. 너희는 영적인 존재야. 죽고 나서 끝이 아니고 천국이 있다. 내가 곧 길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천국으로 갈 자가 아무도 없단다." 이러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뉴턴 경은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라는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주 예수의 부활이 없이는 은혜가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일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가 임한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도 받고 계십니까? 구원받은 것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요, 살아 숨쉬는 것조차 은혜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큰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은혜 받은 자와 은혜 받지 못한 자,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 자와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자는 그 삶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은혜 받은 자와 은혜 받지 못한 자는 그 삶이 완전히 틀릴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선포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은혜 받았다고 "아멘!"으로 화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우리가 받은 은혜가 참 은혜인지, 그저 생각으로 받은 은혜인지 알기 위해서 은혜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을 성경은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삶의 모습을 우리 삶에 비춰볼 때, 내가 받은 은혜가 하나님의 참 은혜인지 또는 육신으로 종교생활 하고 있는 것인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 하나 되기에 힘쓴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2절)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너 명이 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믿는 무리' 라고 했습니다. 이 무리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유추해 볼 근거는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베드로가 기도했더니, 그 날 하루에 구원받고 교회에 등록한 자가 3,000명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47절에서, 그들이 교제하고 기도하고 날마다 찬양했더니, 믿는 무리들이 날마다 더해 갔다고 했습니다.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숫자를 약 십만 명 정도 잡으나, 이십만 명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때는 적어도 수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수만 명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됨'에 대하여 우리는 늘 획일적인 하나됨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라고 음악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야지, 그 때까지 자고 있으면 나쁜 놈이 됩니다. 통금 사이렌이 울렸는데 돌아다니면 나쁜 놈이 됩니다. 획일적인 하나됨입니다. 요즘은 햄버거, 피자 등을 마음대로 먹지만, 옛날 우리 밥상을 생각해 봅시다. 밥은 왼쪽, 국은 오른쪽, 가운데 김치와 반찬 한 두 가지, 숟가락과 젓가락, 모든 집이 다 똑같았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먹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밥을!" 획일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틀리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참지 못합니다. 옷도 똑같이 입어야 되고, 머리스타일도 똑같아야 되고, 밥 먹는 것도 비슷해야 되고, 심지어 걸음걸이, 자는 모습도 똑같아야 됩니다. 제가 군대에 갔을 때 자는 법을 가르쳐 주는데, 손을 깍지 끼고 그 손을 그대로 가슴에 얹고 자야 됩니다. 자다가 옆으로 누운 것을 고참이 보면 실내화나 고무신으로 자는 사람의 뺨을 갈깁니다. 자는 버릇이 나쁘다는 것이죠. 군대뿐만 아니라 어릴 때도 그랬습니다.
획일성을 종교화한 것이 바로 유교입니다. 유교의 뼈대는 획일성입니다. 많은 규제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획일성을 왜 가지려고 했는가? 동기는 그 획일성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려고 한 겁니다. 유교에 얼마나 많은 규칙이 있는 줄 아십니까? 아버지에게 대하는 법, 자녀에게 대하는 법 등등... 법칙이 얼마나 많은지, 장례가 있으면 그 시신 하나 치우는데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식 장례를 한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 유교식입니다. 유교식 장례에는 슬프지도 않는데 손님이 오면 곡을 합니다. 그 곡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그냥 울면 상놈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이고~", 남편이 죽으면 "에이고~", 형제가 죽으면 "으이고~",
이런 식입니다. 격식에 맞지 않게 울면 상놈입니다. 규제와 획일성을 통해 그것에 어긋나는 사람을 차단함으로 통치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최초로 증명한 책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현재 우리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좋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성경적이고, 어느 것이 성경적이 아닌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획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 이면에는 항상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유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도 이러한 획일성이 교묘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신앙을 가르친다는 교육의 모습으로 이 획일성이 이미 교회에 침투해 있습니다.
그 모양은 완전히 틀립니다. 겉으로는 둘이 친하지 않으나, 그 이면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 가장 대립되는 두 가지 흐름은 신비주의와 제자교육입니다. 복음주의라고도 하지요. 이 두 가지 이면에 역시 획일성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신비주의를 살펴봅시다. 어느 기도회에 갔더니 아주 신령한 기도원 원장님이 계십니다. 기도를 했더니 내 병을 낫게 해 주시고, 내 앞길을 알아맞히십니다. 거기에 한번 다녀온 신자는 아무 것도 혼자 못합니다. 집을 사도 그 사람과 의논해야 됩니다. 자녀 결혼을 시켜도 다 의논해야 됩니다. 신령한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가 보십시오. 교인들은 그 영적인 권위에 꽁꽁 얽매여서 획일화되고 맙니다. 잘못된 신령함입니다.
저도 때로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그런 교회를 다녀오면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그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대상에서 하는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말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무수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안수집사님, 아닙니다!" 라고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교육은 어떻습니까?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은 리더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겁니다. 리더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No"를 못합니다. 리더와 모든 것을 다 상의해야 합니다. 저도 제자교육을 받아 보았습니다. 단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공통점은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주의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고, 복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흐름에는 사단이 이미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행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같은 확신을 가져야 되고 외모까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하나됨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됨은 획일적인 하나됨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대량의 복제인간을 생산하는 종교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계를 보세요. 하나님은 얼마나 창의성이 뛰어나신 분입니까? 그 분이 창조한 세계를 보세요. 독수리, 나비, 참새, 고양이, 풍뎅이, 돌고래와 상어와 피라미를 만드셨어요. 개만 해도 수 없는 종류를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쓰신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왕비의 신분으로 쓰임 받았던 에스더가 있는 반면 창녀의 신분으로 쓰임 받았던 기생 라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있는가 하면 농부 출신인 아모스가 있었습니다. 순종하는 선지자가 있었는가 하면 불순종한 요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였습니다. 하나의 하나님이 쓰신 도구였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 된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면 이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이룰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때로 저는 죄를 회개할 때 처절한 눈물을 흘립니다. 기도해야 할 시간에 나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느새 속썩이는 교인들을 향해 원망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저의 현주소이며, 이런 것들로 얼마나 많은 씨름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이 저를 율법적으로 대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설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냥 저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제 모습 이대로 수용해 주시고 받으셨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용납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 내 의견과 대치되게 말하는 사람을 내가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3절)
왜 먹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우상의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제사 드린 그런 음식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어요. 이방 신자들이 아테네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방 신전 제사장들이 있었어요. 성도들이 주로 고기, 그것도 가장 좋은 고기를 바쳤는데, 제사장들이 그 고기를 빼돌렸어요. 정육점에 그것을 푼 것이죠. 놀라운 것은 정육점의 고기 중 이방 신에게 제사 지낸 고기는 너무나 좋은 것인 반면 뒤로 빼돌린 고기니까 값은 쌌어요. 자연히 사람들은 그 고기를 사기 위해 몰렸어요. 그러다 보니 사회 문제가 되었어요. 이방 신들을 섬긴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마느냐! 이것으로 교회에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결정하여 말하기를 "먹을 수 있다" 라고 했어요. 왜? 이 세상에 우상은 없는 거니까, 살아있는 신은 하나님 한 분이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먹는 자는 "야~ 나는 믿음이 9단인데 우상 고기도 못 먹어? 저 사람 믿음 초단도 안되네!" 라고 업신여깁니다. 또 신앙 초단은 9단에게 "야~ 우상에게 드린 고기 먹네! 이단이야, 이단!" 이때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저는 이것을 술과 담배에도 연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마세요. 우리 교회에 담뱃갑을 꽂은 사람이 예배에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그런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안 피우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결론은 결국 먹지 말라는 겁니다. 죄가 되니까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기를 좋아하고 먹음으로 인해 다른 형제가 나로 인해 실족한다면, 내가 고기를 영원히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술을 한번 마셔보니까 저의 체질에 딱 맞더라고요. 주량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 마십니다. 덕을 위해서... 제가 술을 마시면 실족할 사람들이 여기에 많으니까요.
서로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과도 하나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나와 다르면 다 달라 보이고, 욕하고, 교회가 갈라집니다. 그것은 은혜 받은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자와 하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습관이 다르고, 취미, 직업, 경제 능력이 다르고, 비본질적인 교리가 다르고, 비본질적인 성경해석 방법이 틀린다 해도 그와 하나 될 수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는 해석학을 전공했어요. 그 중 문자적 해석 방법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신 유명한 사람들 중에 어거스틴을 포함해서, 우화적인 해석을 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 분을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은혜주의가 흐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는 너무나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정죄하고 욕합니다. 사단의 도구가 되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참 본질 때문에 싸우는 교회를 보셨나요? 묵도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설교를 몇 분 해야 되느냐,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되느냐, 이런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교파가 나누어지고, 교회가 갈라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 되기 위해서 힘쓰십니까? 당신은 얼마나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용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용납하는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은혜받았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소리쳐도 다른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한다면,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은혜는 가짜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하나 되기를 힘씁니다.
2. 믿음에 행함이 따른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안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신앙의 관념화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관념적으로 가졌기 때문에 실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겁니다.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그러나 생활과는 상관이 없어요. 입으로는 "아멘!" 하지만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감사하고, 집에 가서는 불평합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그 입으로 세상에 가서는 되먹지 못한 말을 내뱉습니다. 신앙을 성경공부로 생각하는 겁니다. 신앙을 예배와 기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있는 것 자체가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50% 밖에 갖추지 못한 겁니다.
예배와 성경공부도 중요합니다. 기도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예배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줄 아십니까? 가정과 직장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사람이 직장에서 세금은 밥먹듯이 떼어먹습니다. 그것은 은혜 받은 자가 아닙니다. 믿음에 행함이 없는 겁니다.
매스컴을 통해 보면 사고만 났다 하면 안수집사이고 장로입니다. 제가 목사직이 부끄러워서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정말 사표 내고 싶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삶과 신앙, 삶과 예배가 완전히 분리된 겁니다.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이 다 따로따로 입니다. 오죽하면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을까요.
본문을 보세요. 믿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믿는 무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신앙인으로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33절부터 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3-35절)
믿음이 있고 행위가 있습니다. 믿음에 아름다운 행위가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제 행위까지도 신앙의 지배를 받았다고 본문은 증거 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넘쳐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독일어로 은혜를 'Gabe' 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명을 'Aufgabe' 라고 합니다. 똑같은 'Gabe' 라는 말인데, 하나는 은혜요, 다른 하나는 사명입니다. 'Gabe'를 직접 번역하면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독일어로 은혜와 사명은 같다는 겁니다. 사명은 선물 뒤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겁니다. 선물, 즉 은혜를 받았으면 당연히 그 뒤에 사명이 따라와야 됩니다.
우리의 행위가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면 당연히 생활, 즉 사명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부흥회에 가서 눈물 흘리고 은혜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예배가 참 은혜였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가정에 가서는 삶의 변화가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소리지르는 것도 여전하고, 남편에게 바가지 긁는 것도 여전하고, 마누라 구박하는 것도 여전하다면, 그것은 참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 받았는가를 알기 원하십니까? 지난 몇 해 동안의 가정 생활을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성적표를 매겨달라고 해 보십시오.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전혀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성적표를 내보이세요.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자의 삶은 여기까지 나아가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무리들은 여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먼저 변화시키십시오.
3. 이기심이 사라진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2절)
이기심이 다 사라졌습니다. 욕심과 탐심이 다 없어진 겁니다. 사실 은혜를 깊이 깨달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며 다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긴 겁니다. 물질은 나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내 것'이라는 개념이 너무 강합니다. 내 것, 내 자식, 내 집, 나밖에 몰라요. 테두리가 딱 정해져 있어요. 불평을 가족에게 물어보면, 아버지가 자기만 안다는 겁니다. 가정 바깥의 사람에게 물어보면, 저 사람은 자기 집만 안답니다. 내 것 뿐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은혜 충만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는 겁니다. 다 하나님 것입니다. 다 받은 것이요, 하나님이 잠시 내게 맡긴 것에 불과합니다. 다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라고 하는 곳에 다 내어놓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기적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까? 물질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처럼 불쌍한 노릇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많은 재산으로 내 몸과 내 자식만 위하다가 이 땅을 떠나갑니다. 불쌍한 노릇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다 심판할 날이 있다고 성경이 얘기하는데, 달란트 비유입니다. 내 것만 알고 땅에 묻어 둔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저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밖에 내어 쫓으라!" 라고 하십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내 것이 아닙니다. 자식, 물질, 시간,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발견한 겁니다. 건물마다 사람 이름이 붙어있어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단체에 가도 사람 이름이 있고, 심지어 배 이름에도 사람 이름이 있어요. 한국을 드나드는 배 중에 '프린스턴' 이라는 유명한 배가 있습니다. 프린스턴이라는 사람이 선박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스도인인 그가 이 땅을 떠나면서 그 배들을 자선단체에 기증해 준 것입니다. 그 배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모두 불쌍한 사람들을 돕도록 했어요. 그래서 그 배 이름이 '프린스턴 호' 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지 모릅니다. 고아원을 세우고, 교회에 헌금하고... 그래서 미국 교회는 늘 도와줄 돈이 풍족합니다. 한국이 굶었을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옷과 양식을 주었어요. 95%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도와주었어요. 왜? 내 것이 아니니까요. 내가 관리하다가 마지막 이 땅을 떠날 때는 하나님 앞에 다 돌려드리는 겁니다.
뉴욕에 가면 알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소문이 하나 있어요. 유산을 남겨 주는 방법에 관해 유대인과 한국인을 비교해서 그 차이를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녀들에게 돈버는 법을 유산으로 남겨 줍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것인가? 한국인은 돈을 유산으로 남겨 줍니다. 특징이 있는데, 유대인은 아버지의 사업이 2대, 3대 내려가면서 점점 강해집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2대, 3대를 가는 사람이 없어요. 돈버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돈을 맡기니까, 그 돈을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사업하다 부도가 납니다. 돈이 너무 많으니까 쾌락을 탐해서 인생을 다 망쳐버립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 돈 마음대로 벌게 놔둬라. 저 사람들은 2대를 못 간다." 미국에 10년 정도 살면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어요. 얼마나 멸시 당하는지 몰라요.
마르틴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으로 은혜를 받은 자에게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첫 번째, 가슴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두 번째, 정신에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세 번째는 지갑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700번 이상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숱하게 재물을 강조하셨어요. 돈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만끽하고 있는가를 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나님이 나를 부자로 만드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십일조도 제대로 못 바치는 사람이 있어요. 부들부들 떱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기 원하십니까?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 수입의 몇 퍼센트를 남을 위해 쓰셨습니까?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정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런 면에서 너무나 수치스럽습니다. 내 것만 알아요. 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가? 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가? 더 많은 재물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셨으니 내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다 내어놓고 베푸는 이 은혜가 한국 교회에는 부족합니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내십시오. 없는 자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 하십시오. 내게 하나님께서 맡긴 것이 많다고 생각되면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 그 이상 책임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재물을 팔아서 성도들 발 앞에 다 내어놓고 한 명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꾸준히 사랑의 헌금이 들어옵니다. 아직 사랑의 헌금이 모자라 본 적이 없습니다. 돕는 숫자가 점점 늘어납니다. 1개월에 수백 만원씩 가난한 사람을 정기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동회에서 추천한 사람에게 생활비를 드리고 정보에 따라 수십만 원, 수만 원에 이르기까지 돕고 있습니다.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오늘 이 세 가지 특징이 우리에게 있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기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물결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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