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 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공산당 이론가가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해냈습니다. 그래놓고 그는 득의만만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 나오시오."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황해서
공산당원이 " 5분밖에 시간이 없소 " 하고 제한을 둡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
그러더니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외칩니다. 그랬더니 전 회중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답합니다. 공산당이 장악하면서 그렇게 많은 세뇌를 했는데도 그 마음속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영광은 뺏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냥 조건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심령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 정신이 계속되어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로 다시 회귀해버렸습 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역사도 없고, 교회도 없고, 수많은 순교자도 없고, 여러분도 여기 계시지 않을 것이며, 생생한 삶의 간증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몸인 교회 되어 주님을 오늘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은 한 여인의 부활의 목격과 증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몹씨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은 원래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서 날마다 악몽에 시달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순수하고 진실하고 사랑과 동정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흐릅니다. 마음에 회심이 일어나고 그녀는 그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 안에 있는 악령과 어둠이 사랑의 빛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깨끗한 여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녀는 그 때부터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직접 동행하기에는 너무 황송해서 제자들처럼 주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항상 멀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님을 따르며 동행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주님과 가까운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주님 생각하면서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쳤고 저녁에 잠을 자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창녀라는 신분 때문에 자기를 멸시하고 조롱을 했었는데 그처럼 그윽한 사랑으로 자기를 감싸주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이 여인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이 어느 날 갑자기 로마의 군병들에 끄려갑니다. 십자가의 형틀에 묶여서 고난을 당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으며 못 밖 혀 죽습니다.
이 여인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바람과 바다를 호령하니까 파도가 잠잠했던 기적, 천지의 모든 기운이 그 앞에 순종했던 것,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 할 때 죽은 시신이 벌떡 일어나서 다시 살아난 기적을 눈앞에서 보았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잡혀가도 '이번엔 또 어떤 기적을 베푸실까'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등에 십자가를 지우니까 힘없이 십자가를 메고 가십니다. 쓰러지셨다 일어나고 또 쓰러졌다 일어나고. 나중에 그것도 다 감당 못하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란 사람을 억지로 잡아다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가장 악한 형틀인 십자가의 형틀에 그분을 눕힐 때에도 마리아는 이 사건 속에서 어떤 능력을 행사하실까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힘없이 십자가에 박히시더니 제일 먼저 운명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소망이 끝났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끝났습니다. 자기를 고쳐주고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이 이제 그녀의 곁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그 밤 막달라 마리아는 생애에 가장 깊은 절망의 밤, 슬픔의 밤을 보냈습니다. 뜬눈으로 그 밤을 지샜습니다. 그리고 또 한 밤을 그렇게 지낸 후 안식일이 지난 첫째 날 새벽에 주님의 무덤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다른 곳에 개켜 있고,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이제 주님의 시신마저 잃어버렸다고 절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가 예수 시체 놓였던 머리맡과 발 곁에 서있습니다. 그는 놀랍니다. 그 때 뒤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주님께서 그 뒤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주님 인줄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 주님인줄 잘 몰랐습니다.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전화 오면 그 목소리를 못 알아듣습니다. 잘 아는 사람도 그 사람을 상상하고 기대하지 않으면 전화 목소리가 쉽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주님이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와 음성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들었겠지만 어두운 미명에 가려 그 분이 예수인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자기 이름을 사랑으로 부를 때 조건반사적으로 마리아는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라고 반응합니다.
마리아에게 그처럼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분은 그 분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야"
"랍오니여"
조건반사같이 튀어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조건반사 적으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 랍오니여 " 그리고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어떤 때 믿음이 죽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엄청난 사태를 만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믿음이 죽었습니다.
"주는 그 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완전한 신앙고백을 가졌는데, 어렵고 큰 사건이 닥치니까 제자 중 도마는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대표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의 못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노라"
믿음이 죽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소망도 죽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당신들 왜 그렇게 슬픈 빛으로 가는가?" 물었더니
그들이 되 묻습니다.
"아니 당신은 듣지도 못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큰 일, 예수라는 그 분의 죽으심을 듣지 못했습니까? 그 분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으로 우리가 믿었었노라."
믿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믿음이 죽고 소망도 죽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바랬는데 그 바램이 끝났단 말입니다. 어떤 때는 믿음도 죽고 어떤 때는 소망도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에게 안 죽은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는데도 사랑은 주님을 떠 날 수 없게 합니다. 시신이 침향에 섞여 꽁꽁 묶여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었는데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울다가 울다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무덤을 지키다 철수했습니다만 다시 일해야될 주일이 되자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사랑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다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리 인생 길 걸어가는 동안에 믿음도 죽고, 소망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사랑은 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주님과의 사랑의 시간들을 가지십시오. 주님과의 사랑의 로맨스가 우리 삶 속에 늘 있도록 주님을 향한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도 무너지고 소망도 흔들릴 때 그 사랑은 다시 죽은 믿음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리는 소망을 견고히 세워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가슴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이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귀한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 속에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을 이겨내셔야 됩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줄 알고 울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곁에 우리 주님이 계셨습니다. 이런 일이 참 많습니다. 주께서는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의 인격을 신뢰했더라면 무덤이 열린 것을 보고 우리 주님 사셨다고 말씀을 붙잡고 주님 살았음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이 엄청난 사태 앞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갈이라는 여자, 아들 이스마엘과 더불어 광야에서 슬피 울고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로 옆에 샘이 있었습니다. 옆에 샘을 놔두고 울고 있는 하갈, 주께서 눈을 밝히시자, 그 옆에 샘 있는 것을 보고 목을 축이고 살아나는 모습을 봅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생애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면서 평생을 두려워하는 것이 인생이다."
걱정할 일이 없으면 결혼도 안 시킨 아들의 손자까지 걱정합니다. 이것이 인생이예요. 걱정 주식회사 사장들이 많아요.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에 불안이 엄습할 때, 우리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 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 이 많도다 " (요 14:1-3)
문제가 산처럼 쌓여서 걱정과 근심으로 짓눌릴 때,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 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믿습니까? 주께서 마련하신 해결책이 그처럼 곁에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는 여러 분, 내 모든 죄를 씻으신 주님 안에서 내 모든 죄가 동이 서에서 멀리 간 것처럼 깨끗이 씻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망,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아래서 이미 내 문제가 아닌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망 권세의 모든 생애는 무너졌습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아침 동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 어찌하여 우느냐? " 그 주님의 음성이 그녀를 붙들고 있는 모든 불안과 염려를 없앴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첫 증인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과 고통과 억압 속에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부활의 주님을 믿으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십시오. 부활의 증인된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유병근 목사
대학을 갓 졸업해서 어느 종합병원에 취직한지 3개월쯤 지난 자매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 목사님 어제는 제가 돌보던 환자 중에 두 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그 죽음을 보면서 저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죽음이 나와 상관없는 죽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보면서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죽음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아담이 낳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가인이요 둘째는 아벨인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훗날에 하나님은 그 아벨 대신에 아들을 낳게 해주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셋입니다. 그 셋이 낳은 아들이 에노스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에노스라고 하는 말은 " 나는 한계적인 사람이다. 별수 없는 인간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나는 한계적인 인간이구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나는 결코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존재이구나 라는 본래적 자기 인식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드리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 유명한 S 병원에 근무하며 명성을 떨치던 젊은 의사는 우연한 기회에 검진을 받았다가 그 자신이 암환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말기였습니다. 남의 병을 고쳐주며 명성과 부를 얻고 즐기는 동안, 그는 자기의 몸 속에서 독버섯처럼 퍼지는 암세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수술을 시도했지만, 그러나 동료들은 열었던 배를 도로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칼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였는데 질그릇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어쩌면 그릇 중에서 가장 연약한 그릇이고, 부서지기 쉬운 그릇인지 모릅니다. 값이 비싸지 않은 그릇입니다. 반짝 반짝 빛도 나지 않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출발, 신지식에 대한 자각의 출발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알 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그분 앞에 겸손해지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평안을 얻는 길
내가 별 수 없는 사람이요,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요, 깨어지기 쉽고 , 부서지기 쉬운 질 그릇 같은 사람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결코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나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있고,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