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민의 시대 2002-01-30 13:45:02 read : 274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애굽기 40 : 34-38 ( 2001년 6월 24일 )
출 40: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출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 40: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출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어떤 꼬마 아이가 주일날 교회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골목대장 노릇 하는 형들이 길을 막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 꼬마야 어디가니? ” “ 교회가요 ” “ 뭐 하러가니” “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죠” “ 네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니?” 그 때 꼬마 아이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 하나님은 너무 너무 크셔서 우주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 너무 작으셔서 내 안에도 계세요. ”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짤막한 대답 속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두 가지 본성을 보게됩니다.
하나는 어머 어마한 하나님, 우주도 담을 수 없는, 우주 밖에 계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러나 그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은 내 안에, 두 세 사람이 예배하는 이곳에도 계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 모든 종교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력 구원의 종교요, 하나는 타력 구원의 종교입니다. 자력 구원의 종교는 인간이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고, 도를 닦고, 구제를 많이 하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자력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타력 구원입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 본성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셔야 하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주 보다 크셔야 합니다. 우주를 구원하시는 분이 우주 안에 갇혀 있다면 어떻게 우주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전 우주를 초월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초월성을 경험하지 않은 분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기준이나 경험이나 지식이 절대적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좀처럼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경험하신 분들은 겸손합니다. 자신의 미약함을 압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갑니다.
모세가 어느 날 가시 떨기 불붙는 곳에서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겸손해집니다. 베드로가 초월하신 하나님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발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유대 율법주의에 투철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핍박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일본처럼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도처럼 소가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이 우주를 초월하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주를 구원할 수 있고, 인간을 구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이 항상 우주 밖에서 우리를 초월해있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월해 계시는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축복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교도들은 그들의 알라신을 믿습니다. 그 알라신도 초월적인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라는 항상 그들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들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으로 알라신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믿는 종교도 자력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으로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함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초월적인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들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출20 : 18절입니다.
“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 초월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대신해서 중재자 모세를 세워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시면 “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시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노라. ”
또 출애굽기 25장을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그 때에도 초월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이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출 24: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출 24: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 24: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렇게 위엄과 존귀와 거룩과 권세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분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 있어야 했고, 겨우 70명의 장로들만 산 중턱까지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이스라엘을 대표한 모세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하나님의 등만 보고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내재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백성과 초월해있기만 하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안식과 즐거움과 기쁨을 주며, 능력을 부여해서 사단을 이기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사실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명하신 것이 바로 ‘성막’ 이었습니다.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시고, 그 성막을 친히 설계하시고, 성막의 재료를 선정해주시고, 성막을 지도록 사람들을 예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출애굽기 25 : 8절을 보시면 “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 그의 백성 속에 들어오셔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막을 짓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막을 짓도록 명하신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의 백성과 함께 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기근 중에서도, 애굽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 속에서도, 홍해를 건널 때에도, 아론의 금송아지를 섬긴 죄로 인하여 모세에 의해서 3000명이 죽음을 당할 때에도 그들 속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백성 속에 들어가 그의 고통과 아픔을 듣고 그들의 땀 냄새를 맡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인도하고, 축복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백성과 함께 하고자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성막을 짓도록 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순종의 징검다리를 통해서 성막을 완성하였습니다.
성막이 다 지어졌습니다. 지어진 그 성막은 시내산 정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남쪽에 세 지파, 북쪽에 세 지파, 동쪽에 세 지파, 서쪽에 세 지파씩 대열을 갖추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행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진할 때 누구도 그 공동체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가장 교회다움의 모습을 봅니다. 교회의 중앙에 주님이 계십니다. 모든 지체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 속에서 대열을 갖추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쉬라고 하면 쉽니다. 이것이 교회의 권세요. 교회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주인이 아닌 주님만이 주인이 되시고, 인도하는 그런 교회를 누가 대적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주인 되어 인도하는 교회는 세상을 정복합니다. 사단의 궤계를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 교회가 우리 덕일 교회인 것을 믿습니다.
시내에 어느 교회 이름이 중심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이름이 바뀌어졌어요. 중심 교회에서 주님 중심 교회로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집사님에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려고 하니까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주님 중심 교회라고 이름을 바꾸었겠지요.
굳이 교회 이름을 그렇게 짓지 않더라고 모든 교회는 본질적으로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어야 하고,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지체들은 그 중심이 되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죄와 죽음과 어둠을 이깁니다. 그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갑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인도하고, 안식과 즐거움의 잔치에 참예 하게 하기 위해서 성막을 짓도록 하였고, 백성들은 계시된 성막을 다 지었습니다.
성막 건축의 원리
어떻게 그 성막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일 말씀 속에서 성전건축의 성경적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 위해서 지은 성막이 완성되기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 모세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도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계시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명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나 누구를 통해서 이루십니까?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알고 그것을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성막 건축에 임하는 그들의 순종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물을 드리는데 그 드림이 기뻤습니다. 헌신이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이 자원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함이 있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인 이 교회를 더 건강하게 아름답게 세워 나가 시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 헌신 속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물이 차고 넘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을 합니다. “ 여러분! 이제 예물을 가져오지 마십시오. 이제 됐습니다. ”
두 번째는 소중한 것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각자의 형편이 다릅니다. 처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금을 드린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은을 드린 분도 있고, 놋을 드린 분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청색 자색 홍색실을 드린 분도 있습니다. 어떤 여인은 자신의 거울인 놋을 드린 분도 있습니다. 다 드린 내용이 다르고 그것의 경중이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가장 귀하게 받으신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 두 동전이 가장 소중한 것이었고, 옥합 속에 들어 있는 향유를 부어 드렸을 때 주님이 그것을 귀하게 여긴 것은 그 향이 마리아에게 있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경, 중이 있을 것입니다. 하찮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드린 예물들은 다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드렸습니다. 빌려서 드리거나 도둑질한 것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모한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감당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번째는 남녀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공동체의 지체들이 다 참여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성막을 짓기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붙여 주었습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지혜로운 기술자를 붙여서 짓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을 키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성전을 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소중한 것을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 가운데 드리고, 모든 공동체가 함께 참여한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원하든지 물질을 동원해주시든지 해서 완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막의 축복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순종함으로 성막을 지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34절입니다.
“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
구름이 회막을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가까워지신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졌습니다. 시내산 시대에서 회막의 시대로,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 통치하는 시대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새로운 시민의 시대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회중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무한한 부유와 풍성을 가져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이요, 안식의 하나님이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항상 저 높은 곳에만 계시는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지금 여기에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셨고 이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셨고 여러분 속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함의 축복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이 공동체에는 분명한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시는 성막, 그 가운데 주님이 거하시는 그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은 이제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부유와 축복을 받고 누립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할 때 수많은 장애물들과 시험과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거칠고 힘든 광야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장애물들이 이 순례의 여정에 있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난과 질병이, 기근과 굶주림이, 고립과 소외가 낙심과 절망이 항상 주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는 공동체는 그것이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승리의 탄성을 들어보십시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또 한가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공동체는 이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는 교회를 가리켜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
여러분! 누가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깨어지고 상한 심령들을 누가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비인간화되고 소외되고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을 누가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와 경제와 이데올로기와 돈과 물질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들만이 이 세상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함으로 이 민족이 소망이 있고 교회가 존재함으로 이 지역이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재벌처럼 차고 넘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집이 있고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고 직장이 있고 건강이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자야 할까? 고민하는 사람들, 노숙자들이 있고, 깨어진 관계로 인하여 상한 심령을 가지고 절망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난주에 너무나 가슴 아픈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직장 생활하던 30대 후반의 남성인데 몸이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고 치료를 받고 있는데 부인이 당신을 수발하기에는 내 청춘이 아깝기 때문에 더 이상 당신을 수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고통스러워서 전화를 했으니 좋은 말씀을 들려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으나 오늘 내가 살아야 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를 수없이 되 뇌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자기 중심주의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 저희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너무 이기적이고 대립적입니다. 함께 고통을 짊어지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기심과 투쟁심으로 가득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되 전국 각처에 퍼져 있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50, 000개의 교회들을 통해서 이 민족을 회복하여 주옵소서. ’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제 마음속에 주시는 메씨지가 있었습니다.
‘ 그래 사랑하는 종아 교회를 통해서 이 민족을 회복해주마. 그런데 먼저 교회가 교회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 그럼 교회가 교회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
‘ 교회가 성령 충만한 것이란다. 50, 000개의 교회들마다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영혼,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겸손하게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란다. 그러면 그런 교회를 보고 이 민족을 회복하여 제사장 국가로 삼아 열방과 족속들을 구원하는 민족으로 축복하겠다. ’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이웃을 섬기는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되고 인간과 인간이 화목된 것처럼 교회가 교회 되면 각 사람마다. 각 현장마다 치유와 회복과 구원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공동체는 주님의 주권을 순종합니다.
36절과 37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은 행진을 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들은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주님이 가시는 곳에 함께 가고, 주님이 멈추는 곳에는 멈추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교회입니다. 그 주님의 주권은 교회 울타리 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학생이 시험을 보는 현장에서, 다른 사람이 다 컨닝을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게 시험을 치름으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크리스쳔 사업가가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직장인들은 주님께 하듯 직장을 위해서 일을 함으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으로 부부 관계 속에서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녀가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함으로, 부모는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함으로 그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38절을 보시면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불이 여호와의 성막 위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축복을 특정한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여기 모여 있는 모든 지체들이 다함께 맛보고 경험하게 됩니다. 영아부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동체가 축제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석처럼 여기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한 사람도 덜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소중합니다.
“ 당신은 소중한 덕일의 가족입니다. ”
성령이 충만함으로 이 곳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새롭게 하고 병들고 상하고 지친 영혼들을 구원하고 삶의 희망을 주는 덕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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