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시대에 빛을 발하라 2002-02-02 11:25:07 read : 208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약 말기의 선지자 시대는 요즘 말로 ‘오리무중’ 시대였다. 이사야서는 어둡고 길 잃은 시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에는 빛을 바랐지만 어둠뿐이었고 캄캄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며 산 자가 죽은 자와 같았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적 종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형식적 종교 행위에 어느 때 못지 않게 열심이었다. 그들은 집회에 모이고 금식도 했으며 간절히 기도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와 금식과 기도 등 외적 종교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사 58:3).
백성들의 이의 제기에 하나님께서 그 이유가 그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
구체적으로 어떤 죄악이 그들과 하나님을 유리시켰는가? 첫째는 폭력이었다. 당시에도 요즘 같은 조직 폭력이 유행했는지 이스라엘 백성들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만연했다. 그들의 손은 피에, 손가락은 죄악에 더러워져 있었다. 아마 당시에도 ‘수지 김 사건’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했다.
무엇보다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였다. 허위는 선지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죄악이다. 그들의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였다. 그리하여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진실성이 희귀한 사회가 되자, 정직한 자와 성실한 자들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 “성실이 없으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사 59:15).
시대가 조금 더 진행되어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는 그야말로 처참한 형편이 된다. 그 넓은 예루살렘 대로에서 진실하고 정의로운 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의인 열 명을 찾으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다던 소돔과 고모라 성보다 더 악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거짓은 즉시 불의로 연결되는 법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회 정의, 특히 사법 정의가 완전히 무너졌다. 모든 소송과 판결에 공정성이 사라졌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사 59:4).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리가 지배하여 잘못한 편이 승소하고 정당한 편이 패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재판관들이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았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흑암으로 광명을 삼고 광명으로 흑암을 삼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거짓된 가운데 죄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한마디로 이사야 선지자 시대는 의와 공평이 사라진 때였다. 선지자는 반복해서 공의의 실종을 통탄한다. 공의가 없으며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공평을 바라지만 없고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가장 결여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의와 공평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불의, 불공평, 불공정은 가장 큰 사회 문제이다.
총체적 죄악상
보다 구체적으로 선지자들은 각계 각층의 죄악상을 열거했다. 먼저 정치 권력자들의 죄악은 수탈과 부정 부패였다. 그들은 약한 서민들의 포도원을 삼키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탈취한 물건들로 집안을 채웠다. 선지자는 이런 불의한 방백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했다.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10:2).
사회 지도층 가운데 정·관계 인사들 못지 않게 영향력이 있는 집단은 종교인들이다. 불행하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사장들은 성화를 포기하고 세속화되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선지자들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사명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전해야 할 말씀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영적으로 너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극히 모욕적인 호칭인 ‘벙어리 개’(Dumb Dog)요, ‘소경’이라 불렀다. 자기가 지키는 집에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설령 보더라도 짖지 않는 개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나태와 무능과 탐욕을 비판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요, 다 꿈꾸는 자요, 몰각(沒覺)한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디 있든지 다 자기 이(利)만 도모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했다.
지도층만 불의와 부패에 가담한 게 아니었다. 백성들도 자기 수준에서 나름대로 악을 행했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수탈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했다. 힘없는 빈민, 과부, 외국인 노동자 등을 늑탈하고 그들에게 강포를 행했다. 물론 이 모든 윤리적 종교적 죄악의 원천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데 있었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 데서 돌이켜”(사 59:13).
이처럼 민족적 부패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진노와 심판의 경고였다.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벌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겔 22:31).
예레미야 선지자에 따르면 하나님 심판의 세 가지 주된 방법은 칼과 기근과 염병이었다. 전쟁과 경제난 그리고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살육이 있고,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굶주림이 따른다. 그리고 기아와 비위생적 상황에서 전염병이 돌게 된다. 결과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줄어드는 것이다.
회개의 요청
하나님의 진노와 임박한 심판을 면하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며 자백해야 했다. 모든 패역한 사회와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무서운 심판을 피하려면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사 59 : 12).
그런 다음에 실제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 개혁과 정화를 필요로 했다. 선지서는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이며 개인적 미덕보다 사회 윤리의 문제점을 많이 언급한다.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사 1:16~17).
회개의 요체는 억압을 제거하고 약자의 권리를 회복해 주는 것이다.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압은 이스라엘 죄악 중에 자주 언급되는 목록에 속한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 즉 참된 경건의 증거는 단지 종교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멍에의 줄을 풀어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는 데 있다.
경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게 생의 기본적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도 회개의 본질적 표현이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떠도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는 자비의 행위가 참된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사랑과 정의를 행하는 것이 회개의 내용이었다.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사 56:1).
오리무중의 길에 빛을 발하라
참된 회개는 구원의 첩경이었다.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참된 회개를 행하면 그들의 빛이 아침같이 비칠 것이요,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신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참된 회개 뒤 비로소 오리무중을 벗어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빛을 볼 수 있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며 어둠이 낮과 같이 될 뿐 아니라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게 된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이 주어졌다. 죄악이 창궐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목전에 있는 때에도 그들에게 구원의 길은 있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가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이 나라가 부패 공화국임을 자라는 청소년들도 다 알고 있을 만큼 어두운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깊은 회개를 위해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어야 한다. 특히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그러한 회개와 개혁의 선봉에 서야 하지 않을까.
빛과소금/ 양낙흥 / 고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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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과 악인은 종이 한 장 차이다”란 말이 있다. 이른바 위대한 일, 훌륭한 일을 하는 리더라고 자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그들의 위대성만큼 위험한 검은 그림자들이 가능성으로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는 이것을 가리켜 불시에 튀어나와 우리와 주위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암살자(Assassin)적인 본능”이라고 했다.
불우한 가정 환경
지난 46년 8월 19일 미국에 빌리(Billy)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빌리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 그의 아버지는 교통 사고로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홀몸으로 빌리를 낳은 어머니는 장차 살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생각 끝에 어머니는 뉴올리언스로 가서 간호사 학교에 다니기로 하고 빌리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겼다.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어린 아들과 엄마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빌리의 어머니는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한 상태였다. 의붓아버지는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사생활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가족에게 폭력까지 행사했다. 빌리와 어머니는 이 남자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빌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자신과 어머니를 향해 총을 쏘는 의붓아버지를 피해 달아나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빌리는 아버지의 숱한 폭력의 위협에 시달리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빌리가 16세가 되던 해에 참다 못한 어머니는 의붓아버지와 이혼하고 만다. 이때부터 빌리는 자신이 맏이로서 가정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함을 알게 된다. 빌리는 자신의 불우한 가정 환경을 상쇄시키기 위해선 세상에 나가서 하는 모든 일, 학업이나 운동이나 사회 봉사 활동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족의 새 영웅이 됨으로써 기억하기도 싫은 힘든 과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빌리는 탁월한 리더로 성장했다. 보이스카우트가 되어 워싱턴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기도 했으며, 웅변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고, 학교에서도 최고 우등생 반열에 올랐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른 술주정뱅이 의붓아버지로 인해 우울해진 집안의 이미지를 지우려 했다.
빌리와 그의 어머니는 결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안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겉으로 더 도덕적으로 보이려했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 했고, 외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함으로써 남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빌리와 어머니는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가훈으로 정해 엄수하려 했다. 빌리는 늘 다른 사람 앞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의 좋은 매너와 화술은 어디서건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이 잘 돼 가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려했다.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감정을 투명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속으로 분노와 고통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천사의 마스크를 쓰고 사는 이중적 삶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빌리는 명석한 두뇌와 무서운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씩 자신의 꿈을 이뤄나갔다. 조지타운대학에 진학하고, 로즈 장학생으로 뽑혀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고, 예일대학 법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정치가의 길로 입문한다.
리더의 붕괴된 내면 세계
이 빌리가 바로 92년에 46세 젊은 나이로 미합중국의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빌 클린턴(Bill Clinton)이다. 클린턴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인격의 투명성에 대해서 계속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 학창 시절에 징병을 기피했던 사실, 대학생 때 마약을 했던 사실, 주지사 시절의 여성 편력 등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는 부인했고 거짓말로 일관 했다. 심리학자들은 클린턴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하는 거짓말을 하게 했고,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보다 핑계를 대고 교묘한 말재주로 자신을 미화시키려 하는 이중 성격을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또 가정의 불화를 상쇄시키기 위해 항상 외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호감을 사야 했기에 명확한 신념 없이 모든 이익 단체들에게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책임한 지원을 약속하는 줏대 없는 모습을 계속 보였다. 폴라 조운즈, 모니카 르윈스키 등과 대형 스캔들에 끊임없이 연루되면서도 부인하고, 핑계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안타까운 이중성을 보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닮은 점이 많다. 삼손도 겉으로 계속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블레셋인들을 계속 물리치는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깊이 오염되어 있었다. 끊임없는 여성 편력으로 허물어져 가다가 마침내 두 눈이 뽑혀 적의 포로가 되는 수모까지 당한다.
클린턴은 대단히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보화 사회로 흐르는 세계의 기류를 일찌감치 감지하여 미국의 경제 정책을 이끌었다. 정보 통신 산업, 최첨단 디지털 산업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유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는 소수 민족들을 위한 많은 복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좋은 일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또 다른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켰고 그것에 대해서 거짓말을 일삼아 국민들을 기만했다.
클린턴은 거대한 나라 미국은 괜찮게 다스렸는지 몰라도 자신의 영혼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클린턴과 삼손은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가정의 심한 엘리트 의식,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 속에서 자라난 것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둘 다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 업적은 대단했지만 그 뒤로는 짙은 리더십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투명한 리더가 필요하다
원죄(原罪)의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나 할까? 천 명에 가까운 우상 숭배자들을 물리쳤던 엘리야도 평생 우울증을 지니고 살았다.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바울과 베드로도 불같은 성정을 자제하지 못해 많이 힘들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뻔히 그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들을 귀히 쓰셨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분명히 있는 이 리더십의 그림자를 부인하지 않고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 묵상 속에 이 그림자가 누수 현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성령의 통제를 간구하는 것이다.
올해는 대선(大選)이 있는 해이다. 누가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힘을 쥘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욕구가 강한 때이다. 오리무중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담대하게 리더십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강하면서 투명한 리더십이 요구된다. 새로운 리더는 잠언의 명쾌한 충고처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홍 / 한동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