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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 복 의 선 택
    2002-01-11 01:26:49   read : 201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세기 13:7-9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런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한 일이 없으며, 내가 조국을 선택해서 태어난 일이 없습니다. 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용모를 가지고 태어나야겠다고 선택한 일이 없습니다. 전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어났으며, 내 용모를 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용모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리고 나는 이 땅에 태어날 선택에 관계없이 이 한국을 나의 조국으로 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나에게 이러한 예정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반적인 말로 운명이라고 말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성서는 이것보다 더 큰 신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도 나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사랑으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사도 바울은 친히 우리에게 선택받은 자의 은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2-13)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거저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아야 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살지 아니하면 이것은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선택하는 생활,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하는 영감과, 지혜와,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처럼 선택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선택할 때 부자집 아이들은 고르는 것부터가 비싼 것을 고릅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싼 것을 고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을 선택하며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선택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이나 고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아야 됩니다. 분수에 맞는다는 것은 자기 형편에 맞는 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형편에 맞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의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택한 바에 대하여 일생을 두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선택을 잘 했으면 축복을 받고 선택을 잘못했을 때는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선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선택이 있고,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선택이 있습니다. 많은 물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물건을 고를 때 쓰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상품적 선택입니다. 상품은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를 고르면 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선택은 많은 것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고 일대 일입니다. 하나를 고르면 하나를 포기해야 됩니다. 이것은 결단입니다. 이것을 갖기 위해서는 저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인격적 선택인데 신앙적 선택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택받은 자의 선택의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선택해 주셨기에 우리는 자녀로서 합당한 선택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욕심으로 세상을 선택했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선택받은 자로서 위대한 선택을 했던 최초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땅을 선택하기 위해서 본토 친척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선택하기 위해서 그는 이방 땅의 부모와 친척을 다 버렸습니다. 하늘나라의 많은 권속을 친척으로 삼기 위해서 이전에 족보의 친척을 다 포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의 결단으로부터 그의 조상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향과, 친척과, 본토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피난갈 때 자기 조카 롯을 데리고 갑니다. 롯은 그의 형 하란의 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 그가 조실부모 했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애굽으로 피난갈 때도 같이 갔습니다. 피난 가서 몇 년동안 거기 있는 동안에 금은보화가 늘었고 많은 가축떼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롯도 가축이 많았고 아브라함도 가축이 많았기 때문에 각각 목자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목자들끼리 서로 싸웁니다. 목초지와 마실 물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 자기 가축떼를 기르기 위해서 싸웁니다. 그때 롯과 아브라함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롯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드디어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네가 눈으로 보는 이 땅 중에서 어느 땅이든지 차지하면 내가 그 땅을 너에게 포기하고 나는 네가 차지하지 아니한 땅으로 갈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롯은 얼른 물이 많고, 평지요, 목초지로서 좋은 요단 들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그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삼촌, 삼촌은 저를 어렸을 때부터 길러준 아버지와 같으신 분 아닙니까 먼저 택하시죠. 제가 남는 땅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야만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욕심 많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얼른 좋은 땅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택했고 롯은 요단들을 택했습니다. 저들이 어느 땅을 차지하든지 자유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받은 자의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졌고 롯은 선택받은 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축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느 땅을 차지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요단으로 가든, 가나안으로 가든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문제는 그 선택의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롯은 세상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각했고 롯은 세상을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보았고 롯은 땅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였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신자와 신령한 신자가 여기에서 차이 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령한 신자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롯은 언제나 세상을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생각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생각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동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자기 조카에게 양보할 때는 '이 세상 어디를 갖든지 너는 마음대로 하라 나는 상관이 없다. 나는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살 것이니까 나는 상관이 없다.'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전혀 관여치 않습니다. 사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았습니다.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이 땅을 보아도 자기 욕심으로, 하늘을 보아도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자기 탐욕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거의 모든 것이 다 선택입니다. 친구의 선택, 학교의 선택, 전공 과목의 선택, 배우자의 선택, 거주지의 선택, 또 작은 것으로 본다면 옷 입을 때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하는 것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것도 선택인데 그 동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 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직업을 가질 때도 이 직업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봐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이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살 것인가'를 봐야 합니다. 거주지를 선택할 때도 자연환경이나 학군도 봐야겠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적으로 살아가는데 장애는 되지 않는가를 봐야 합니다. 여기에서 선택의 표준이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하는데 신앙적인 바탕 위에 서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에게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매사에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편으로 세워지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려있습니다. 보는 눈이 열려있습니다. 그는 보는 세계가 달랐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보았고, 믿음으로 하늘을 보았고, 믿음으로 자기를 보았습니다. 직업과, 지위와, 명예와, 재산 어떤 것도 그는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사람은 이 세상 것이 작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 것이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자기 의가 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에 대하여 질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 작은 의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허물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너무 큰 사람은 상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하시면서 우리의 허물을 덮습니다. 이것이 큰 사랑입니다. 하늘은 땅을 감싸고 있습니다. 큰 것을 가진 사람은 작은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큰 것을 가진 사람은 땅에서 어떤 사람의 것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

    둘째, 아브라함은 사랑으로 평화를 택했고 롯은 자기 욕심으로 물질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행복을 알았습니다. 화평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말합니다.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다투고서는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화목이 없으면 가정생활이 불행해집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가난하게 살 때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애굽에 가서 많은 재물을 얻고 보니까 성경은 "소유가 많으므로 동거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소유를 가지고 동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산이 많으니까 부부가 헤어지고 부모 자식간에 원수 되고, 형제간에 미워하고, 친구간에 의리 상합니다.
    동거할 수 없는 것은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할 때는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거를 잘 하던 사람이 소유가 많아지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70년대 시골에서 가난한 부부가 농사지을 농토도 없고 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부인은 동대문에서 땅콩 장사를 하고 남편은 지게꾼 노릇을 했습니다. 아내가 땅콩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양품점을 차렸습니다. 양품점에서 화장품도 팔고 옷도 파는데 부인이 양품점을 하니까 남편도 지게꾼 일을 집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번 돈을 가지고 춤추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났습니다. 돈 벌면 가지고 나가서 탕진하고 이상한 여자들과 바람나서 돌아다니니 여자가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시골에서 올라와가지고 장사해서 양품점 하나 차려놓으니까 남편이 옛날 남편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탄절 밤에 외로이 혼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 돈 벌어도 소용이 없다. 돈이 원수다.' 그리고 아이들을 재워놓고 불질러서 자살해버렸습니다.
    '소유가 많으므로 동거할 수 없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철저하게 선택에 대한 아브라함의 결단을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물질을 선택하면 물질 때문에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참혹한 주인이 되어서 자기를 학대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 양보하고 하나님 편에서 끊임없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우애 좋기로 소문난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금덩이를 발견한 것은 형이었고 손으로 주운 것은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금덩이를 들고 횡재한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때 형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동생이 없었으면 저 금덩이가 내 것인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형이 "그 금덩이 좀 만져보자" 하니까 동생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형제가 강을 건너가기 위해 나룻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금덩이를 좀 보자" 하더니 그만 금덩이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동생은 큰 소리를 칩니다. "형님, 그것은 내 것인데 왜 물 속에 던집니까?" 그때 형은 조용하게 말해줍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화목하게 살았는데 금덩이 때문에 서로 마음이 불편해지는구나! 이런 금덩이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정말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
    서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는 물질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잃고 돈 벌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혹시 돈 때문에 가정의 화목을 잃었습니까?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줄이세요.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시비를 가리느라 개한테 물리기보다 차라리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옳은 말입니다. 서로 시비하고 재판하고 싸우느라 개한테 물린 것같은 상처를 가지고 평생 괴롭게 사느니 양보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목하기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면 물질적으로 손해보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소망으로 미래를 선택했고 롯은 현재를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그의 양보를 통해 미래에 자손들의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했고 롯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일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의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났고 롯의 후손들은 땅에서 부끄러운 자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풍성한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축복을 보았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들을 보았고 땅에 쌓은 물질의 부요를 생각했습니다. 결국 롯은 소돔성에 들어가 돈도 많이 벌고 물질도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성에 들어가 소돔성의 타락한 문화에 그 심령이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멀리했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고 향락을 누리는 일에 저들의 마음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망시키기 전 천사를 보내어 롯에게 "이 성을 빨리 떠나라" 했으나 지체하고 머뭇거릴 때 천사가 성밖으로 이끌어 냈으나 롯의 처는 소돔성에 쌓아놓은 부귀와, 영화와, 그의 모든 안일을 생각해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소돔성에 쌓은 부요가 소돔성이 불탈 때 잿더미로 화했고 그에게 남겨준 것은 허무와 후회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롯이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사위들은 농담으로 알았다가 소돔성에서 멸망해 죽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과부가 됩니다. 그래서 롯은 결국 두 과부된 딸과 성 밖으로 나와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서가 부끄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 오늘날 전 세계의 노벨상을 다 받아내는 인물들이 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우뚝 서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카고 대학을 창설한 록펠러가 있습니다. 록펠러는 100만평 대지 위에 12개의 대학을 세워 미국 사회에 헌납한 최고의 재벌입니다. 시카고 대학은 100년 역사에 52명의 노벨상 후보자가 나왔고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만도 29명이나 되고 최고의 노벨 수상자 보유학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록펠러의 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록펠러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교회에 데리고 다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록펠러야, 이제 너 혼자 교회를 다녀라. 어렸을 때는 엄마가 너를 데리고 다녔지만 이제는 너 스스로 다녀라" 그러면서 20센트의 돈을 줍니다. "이 돈을 가지고 네가 한꺼번에 다 쓰든지 일주일 동안 나누어 쓰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록펠러가 너무 기뻐서 그 돈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할 때 어머니가 한마디를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기억해라. 십일조는 바치고 써야 된다." 십일조를 바치게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았고 믿음을 가지고 십일조를 선택했습니다. 그 돈을 다 쓰든, 십일조를 바치든 그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는 십일조를 바치는 선택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고 역사상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큰 사회 사업을 했고, 하나님께 많이 헌신한 종으로 길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너는 언제나 교회에 가서 앞자리에 앉아라 똑같은 설교가 나가도 목사의 설교의 파장이 다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앞자리에 앉기 위해서 40분 전에 나왔고 록펠러를 보기 위해서 매주 800명이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800명의 사람들이 록펠러의 뒤통수만 보고 갔습니다.
    또 하나 그에게 유언한 것이 있습니다. "너는 절대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라 네가 순종하는 것은 복이고 불순종하는 것은 네게 결코 은혜가 안될 것이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세 가지를 기억하라. 십일조 바치는 것을 선택하라. 앞자리 앉는 것을 선택하라. 언제나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라"
    드디어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세계적인 대재벌로 자손들이 수많은 축복을 받는 후손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하십시다. 행복하게 살도록 화목한 것을 선택하십시다. 자손들의 축복을 위해 믿음을 유산으로 주는 것을 선택하십시다. 이런 믿음 위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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