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집에 거하는 복 2002-01-14 17:24:37 read : 204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84:1-12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잠자고 사는 집을 주택이라고 말하고, 배우는 집을 학교라고 말하고, 일하는 집을 직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생을 집에서 살다가 집에서 그 인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집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집의 신비한 비밀을 잊어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을 건물로 생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건물이 집이 아닙니다. 부모의 품이 나의 집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나의 집이 되기 때문에 집을 찾아갈 때는 건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은 집이 싫어서 가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품이 싫어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우리는 집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결혼한 후에는 남편은 아내가 집이 되고 아내는 남편이 집이 됩니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건물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내의 품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포근하고, 아늑하고, 남편의 집이 될 때 그 남편은 아내 곁에서 안식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미모가 아름다워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의 곁을 남편이 떠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모도 별볼일 없고 전혀 매력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곁에 있으면 아늑하고 편안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수록 집이 소중함을 느낍니다. 제가 이번에 교단의 증경 총회장님들을 모시고 선교여행을 다녀왔는데 70 넘은 후에 홀로 된 목사님들이 더러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살 맛이 없다고 그래요. 아내를 사별한 후에는 이 세상에 대하여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소중한 줄은 알았지만 막상 곁을 떠나니까 이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고 빨리 천당에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운 얘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98세 된 원로 목사님이 작년에 사모님이 떠나시니까 결혼을 하려고 78세 된 권사님과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자식들이 와서 결혼식을 파토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불효자식들이라고 그랬습니다. 98세 된 원로 목사님도 결혼해서 집을 가져야 되는데 98세 된 원로 목사님을 홀로 둔 자식들이 얼마나 불효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한 분 모시기도 힘든데 새 어머니까지 모시려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은 힘든 것만 생각하지 자기 아버지가 외로운 것은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집에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머니" 하고 불렀을 때 "나 여기 있다" 그러면 마음에 안식이 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안계시면 집에 있기가 싫으니까 방황합니다. 어머니가 집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내가 집이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비한지 모릅니다. 아내가 집이 되어주기 때문에 살고 있는 아파트라든지 장막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에게 집이 되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이 되어주고 살아가면서는 아내가 집이 되어준다 하지만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또 중간에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 되어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고, 거처가 되고,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은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집을 만난다는 것이 큰 축복인데 하나님을 나의 집으로 삼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 최대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절)
이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 집으로 삼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 거처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집이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를 고라의 자손들이 썼다고도 말하고 다윗이 썼다고도 말하고 시인에 대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것은 은혜받은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왜 주의 장막을 이렇게 사랑했을까요? 만약에 이 시를 다윗이 지었다고 한다면 당시에 성막이라는 것은 성전을 건축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법궤가 안치된 자그마한 천막 집이었습니다. 거기는 거할 집이 아니었습니다. 거처가 될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조그만한 텐트입니다. 이것은 어느 건물에 대한 공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장막이고, 거처고, 삶의 터전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어디 한 공간을 거처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보다 넓으신 분이고 전 세계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느 공간에, 어느 건물 안에 갇혀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어느 건물 안에 우리가 모신다면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건축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성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걸어갈 때 모세를 통해 지었던 성막도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로 성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성전을 짓게 하셔서 그 성전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집으로 만들어갈 때 하나님은 그 우상화 된 성전을 파괴시켰습니다. 물론 바벨론이나 앗수르의 침략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처소인 성전이 지상에 오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땅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거니시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때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2:19-21)
드디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될 때 하나님은 또 나의 집이 됩니다. 공기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집 삼고 여기 생기로 거할 때 나를 살리면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공기가 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비밀입니다. 공기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생기로 삼을 때만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공기가 나의 집이 되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는 나를 집으로 삼기도 하지만 내가 대기를 집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땅을 디디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대기가 나의 집이 되어서 그 안에서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앞두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할 때 제자들이 근심했습니다. 걱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능하신 권능의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살았는데 그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사나 누구를 의지하고 사나 이 세상 어느 곳에 가서 우리가 살 수 있나" 걱정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에 충만해서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듯이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듯 함께 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믿는 것은 육신의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고 또 내가 없으면 없는 것으로 알지만 이제 내가 부활해서 주의 영으로 온 천지에 충만하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할 때 내가 함께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이 말은 '내가 너희의 집이 되어줄 것이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의 집이 되지 못하지만 성령으로 오셔서 온 우주에 계시면 하나님은 나의 집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첫째가 나에게 안식을 줍니다. 그래서 친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공중 나는 참새도 거룩한 주의 장막의 지붕에 자기 안식처를 삼고, 제비도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자기 집을 삼는데 그리고 새끼들이 거기에 보금자리를 삼고 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어찌 주의 집에서 안식을 얻지 않으리이까 그래서 하나님을 집으로 삼는 사람들은 안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쉬는 곳입니다. 집은 평안을 누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집으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27절)
밤이 오면 들어가 쉬는 곳,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피하는 곳, 그리고 독수리가 하늘을 날으면서 참새를 낚아채려고 할 때 숨어들어 안전을 피하는 곳, 이것이 바로 제 집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집으로 삼는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그는 안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성도들이여, 이곳에 와서 안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서울 시내 한 장로님이 사업이 잘 될 때는 교회당을 나그네 집 드나들 듯 했습니다. 그러던 장로님이 사업이 부도가 나서 채권자들이 달려들어 냉장고, TV, 심지어 장판까지 다 가지고 갔습니다. 장로님은 갈 곳이 없어서 부천 어느 지하 방을 얻어 사글세로 들어갔는데 방이 춥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그가 은혜를 받는데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심령이 깨졌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든지 눈물을 쏟고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을 못해봤는데 자기 집에서 쫓겨나면서 하나님이 자기 집이 됩니다. 성전에 와서 앉아 있는데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빚쟁이도 안오고, 전화도 안오고, 전날의 교만이 변하여 겸손이 되었고 전날의 허영이 변하여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부도 잘 났다. 내가 거들먹거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없이 물질을 탐욕으로 배를 하나님 삼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구나!' 그래서 그가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자 이리 오라"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이 우리 심령 속에 차고 넘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7절)
힘을 얻으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갈 때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사막땅을 지나갑니다. 메마른 땅에 물 한모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른비를 내리시면 샘에서 물이 솟아올라 그 물을 마시고 가는 은혜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이 시인은 이 때를 회상하면서 이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실패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질병의 골짜기를 지나서 병상에 누워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자식이 속 썩이면서 눈물의 골짜기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가슴에 멍들게 해서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수없는 눈물의 골짜기를 우리가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힘을 얻게 합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받는 은혜가 생수가 되어 샘물이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이 자리가 바로 내게 은혜의 생수가 된다면 그 눈물의 골짜기를 거치지 않고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받는 복의 천배에 비교할 수 없는 복이 이 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로 받는 복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받는 복은 아무와도 상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복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낫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장막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집에서 문지기라도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배하는 자의 행복을 얻어야 됩니다.
유명한 나폴레옹이 전 세계를 정복해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패배해서 저 대서양 센티에르나 조그만한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한 기자가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폐하여, 폐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씀해 보십시오." 그때 나폴레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옛날을 회상하는 듯 두 눈가에 눈물을 적시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수십년 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전투가 치열할 때 어느 주일날 아침에 종소리가 들려 나는 그 종소리를 따라 갔노라 갔는데 마침 조그만한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에 나도 철모를 벗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나는 성가대의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비한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노라 그 순간이 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감격과 환희와 행복으로 남아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순간도 많고 즐거웠던 순간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 순간에 비하겠습니까 우리가 듣는 찬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시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감동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은혜스럽게 하고 있습니까 이 행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세상의 첫날보다 나은 것이며 악인의 장막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는 것보다 나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또 하나의 우리의 삶에 새로운 행복으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