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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비운 사람
    2002-01-14 17:31:32   read : 220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빌립보서 2:6-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소원은 그 사람됨을 결정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소원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인격은 형성되고 그 운명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좋은 소원을 가진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소원을 가진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소원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을 닮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의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인물이 더 낫거나 지식이 많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가짐이 주님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의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무엇을 바라봅니까 주님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을 사모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노래를 부를 때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담고 언어로 선포할 때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습니다. 그 형상이 뭐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속에 담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인간은 육으로 전락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그래서 구약에 보면 성경 어느 구절을 보아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 인간들에게 준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처럼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전지하심이나, 무소부재하심이나,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과, 영원과, 무소부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성을 그 몸에 담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의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외적인 행동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외모와 가시적 행동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적인 마음의 생각을 살피십니다.
    내가 나에게 갖는 기대 보다도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우리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늘 반성하고, 회개하고, 자신에게서 일어나야 할 최대의 변화는 외모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처럼 되는 소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님처럼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마음에 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요, 새로운 존재가 되는 비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절)
    여기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성경 흠정역에는 '자기의 명성을 버렸다, 자신의 원래의 영광을 버렸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동등한 그 영광을 포기하고 사람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비워'라는 말은 사람의 몸을 입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회복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처럼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된 것처럼 나도 자기를 비워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십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다 포기해버리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우는 것과 우리가 비우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은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우고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우는 것은 뭐냐? 우리 속의 타락한 자기, 하나님의 뜻을 반역한 자기, 부패한 인간의 속성을 가진 정욕적인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비우는 것과 내가 비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서 우리같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를 비워서 예수님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우는 목적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 교만과 자존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비워 자기를 포기한 것처럼 우리는 자기라는 인간의 교만을 포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존귀를 다 포기하고 사람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인간의 모든 허탄한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비우기가 힘듭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배운 것이 많을수록, 명예가 있을수록 이것을 비우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조금만 잘 살아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아는 것이 있어도 자기를 나타내려고 합니다. 조금만 인물이 잘나도 뽐내려고 합니다. 조금만 인기가 있어도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지의 온갖 영광과 위대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모든 지식을 다 가진 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말했습니다. 천지의 모든부요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함으로 인기를 한 몸에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인기를 포기하고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진 사람이 가진 것을 포기하기란 죽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지위를 가진 사람이 지위를 포기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을 버리고 땅에 오셨고 그 영광을 버리고 온갖 수모를 겪었으며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다 비워버린 모형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욕을 비우지 못하고 탄식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자기 자존심을 건드려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가문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는 천지의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분으로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의 모든 교만을 다 비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소한 교만을 버린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내 가운데 모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예배시간에 기도를 맡은 장로님이 주일 예배를 빠졌습니다. 나중에 알아 봤더니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고 오찬에 간 것입니다. 그 다음날 목사님께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장로님, 무슨 일로 주일예배를 빠졌습니까?" "어제 영국 여왕께서 저를 초청하셔서 거기에 가느라 빠졌습니다." 그 장로님은 굉장한 자존심을 가지고 얘기했습니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여왕의 초청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여왕의 초청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우월감을 가지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장로님, 우리 주님께서 초청하신 오찬에 오셔야 되겠습니까 여왕이 초청하신 오찬에 가셔야 되겠습니까?" 장로님은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거룩한 몸을 성찬으로 이루어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왕의 초청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셨습니까 장로님은 거룩한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셨으므로 지금부터 3년동안 근신하십시오. 이제 당신은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은 예배시간에 조용히 앉아서 회개하면서 은혜를 받으십시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저는 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한번 빠지는 것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장로님은 3년동안 말없이 교회에서 근신했습니다. 3년이 지나고 근신을 회복하고 그에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 보다 훨씬 훌륭한 인격자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를 이렇게 무시해' 그러면서 얼마든지 노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포기했습니다. 교만을 버렸습니다.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우러러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자존심을 버린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자기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자기를 버린다는 것처럼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절)

    둘째,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버렸습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하면 천국이 들어옵니다. 자기 마음을 비우면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천국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를 비워서 예수님이 곧 천국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가지려고 한다면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저는 가끔 아이들이 고무 풍선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을 봅니다. 고무 풍선에 바람을 넣어가지고 묶으면 위로 붕 뜹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렇다, 하늘을 담아 다른 것이 못들어오도록 꼭 묶으면 내가 하늘로 뜬다' 하늘로 뜬다는 것은 슈퍼맨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땅에 있으나 하늘을 담아 자유하는 존재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많이 가지면 살기가 불편합니다. 집안에 많은 것을 가져다 놓으면 일생에 한두번도 쓰지 못하면서 깨질세라 거기에 얼마나 시달립니까? 장롱 속에 옷을 여러 벌 갖다 놓으면 세탁하느라, 무엇을 입을까 고르느라 스트레스 받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밤에 잠자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잠이 안옵니다. 비워놓아야 하늘의 안식이 옵니다.
    중요한 진리를 예수님이 가르쳐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예수님은 얼마나 가난하셨습니까? 철저하게 가난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면서도 땅에 머리둘 곳이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주님께서 머리둘 곳은 하늘이기 때문에 땅에 머리를 두지 않습니다. 몸은 땅에 둡니다. 땅에 앉을 수 있습니다. 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하늘에 둡니다. 하늘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우리가 잠잘 때 등과 다리는 땅에 대지만 머리는 땅에 대지 않고 베개를 벱니다. 머리는 땅과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땅에서 떼어놓습니다. 하늘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예수님은 땅에 누워서 땅을 침상으로 삼았습니다. 낙엽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산의 바위가 베개였습니다. 시냇물은 얼굴을 씻는 물이었습니다. 산들바람은 그의 얼굴을 닦는 하늘이 준 수건이었습니다. 바람은 그의 머리를 빗는 하늘의 빗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죽을 때도 자기를 비워서 옷 한 벌 걸치지 않고 매달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볼 때마다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가난했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해져야 될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아무리 주어도 목까지 차오른 욕심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집이 모자라니까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 능력으로 집을 많이 지어서 한 채씩 다 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 채 가지면 두 채 달라고 할테니까요.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에게 부요를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불행한 가난이 있고 행복한 가난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질병이 들어오고 탄식과 저주가 떠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가난함으로 그리스도처럼 되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내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나를 탄식하게 만드는 탐욕을 비울 때 하늘의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가난해지는 것과 가난뱅이는 다릅니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방탕해서 가난한 것은 저주입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는데 가난하게만 사는 사람은 가난이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부자임에도 스스로 가난해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중세기 성자 성 프란치스코가 있습니다. 그가 20대에 회심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소명을 받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부요한 상인으로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있는 것을 가져다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것을 보는 그의 아버지는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드디어 아들을 법정에 고소를 했습니다. "내 아들 프란치스코의 재산 상속권을 박탈해 주시오. 이 아들은 자기 것도 아닌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남에게 구제한다고 재산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재판장은 프란치스코를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소했다는 것 때문에 수많은 인파가 법정의 광장에 운집했습니다. 재판을 맡았던 대주교는 좌우편에 프란치스코와 그 아버지를 세우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그대가 만약 참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기를 원한다면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아버지께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돕고 싶다고 해도 선행한다는 핑계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돈을 갖고 있을 권리가 없으니 부친의 것은 모조리 돌려 드리세요."
    그때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 주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이상으로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잠시 골방에 들어가서 자기 옷을 다 벗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돈을 담아 옷과 함께 갖다 놓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아버지로 모셨던 삐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며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았던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아버지께 되돌려 드린 것입니다." 그때 재판을 담당했던 주교가 자기 겉옷을 벗어서 벌벌 떨고 있는 프랜시스코에게 입혀주면서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부디 그대는 그리스도처럼 한 생에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시오."
    이 날로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비웠습니다. 세상 욕심을 비웠습니다. 가난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졌습니다.
    셋째, 자기를 비우고 필요한 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고 살아야 했느냐? 필요한 자에게 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버린 것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자기를 십자가에서 못박아 피흘리면서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주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게 되면 무엇인가 줄 것이 있게 됩니다. 저희 교인 가운데 김영일 집사님이 계십니다. 어느날 설교를 듣는 중에 "나는 너를 위해서 몸을 드렸거든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드리려느냐?" "제가 가진 것은 물질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그는 자기 지체를 필요한 자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기 신장 하나를 포기하고 대구에 있는 신장 질환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자매를 살렸습니다.
    자기를 비워서 필요한 자에게 주고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내 마음을 비워 살릴 수 있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주면 누르고 흔들어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 위해 오셨고 주기 위해 사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려면 나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한번 회상해 보십시다. 우리가 비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내 마음을 비우면 예수님의 마음이 채워집니다. 내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집니다. 내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내 마음을 비우면 하늘의 평화가 내게 임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일어납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비우면 평안을 얻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위대한 주님을 모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려고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목끝까지 차오른 탐욕을 비워야 합니다. 솟아오른 허영심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태산처럼 쌓아놓은 교만을 깍아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황금 우상을 철거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품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주님의 거룩한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내 마음에 이루어지고, 내 가정이 새로워지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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