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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믿으면
    2002-01-14 17:37:06   read : 226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11:28-3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최대의 약속입니다. 또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한 분이 없습니다. 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성인들, 또 군왕들, 영웅들이 이 세상에 많이 등장했지만 그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간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입니다. 그래서 보통 인간의 4고를 얘기합니다.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거쳐야 할 단계입니다. 또 이 세상 사는 모든 삶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마치 파도가 일 때마다 이 세상의 모든 풍랑이 다 우리에게 쓴 물로 덮쳐오듯이 세상이 우리 인간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고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또 어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다 고통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다 이런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데 이 수고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 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6-17)
    인간에게 주어진 이 수고가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이 수고를 누가 해결할 것이냐? 아무도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에게 해방을 주십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해결한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는 기도로 해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은 계속 반복될 뿐이지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체험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절)
    분명히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믿음도 배워야 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그 배움이 인간의 마음에 안식을 주지 못하고 평생 고통을 더하는 배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배우는 그 배움이 저들에게 무엇을 주는 것인가?'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들은 아무런 목적도 모른 채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좋은 세대에 태어나 인생을 살고 가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구나!' 그때는 배우는 고통이 저들의 고통과는 달랐습니다. 저들은 새벽부터 배운다고 말하지만 그 배움이 고통을 더할 뿐이지 저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는 십자가를 지고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멍에가 있습니다. 그 멍에는 짐승들이 메는 멍에였습니다. 나귀나 소 두 마리가 한 멍에 안에 들어가 둘이 짐을 나르고 또 밭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멍에' 하면 반드시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메는 멍에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멍에를 말할 때 저들은 짐승이 메는 멍에를 연상했지만 주님께서는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메는 멍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멍에 속에 두 마리의 짐승이 있듯이 두 인간이 한 멍에 속에 들어가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과 제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은 십자가의 멍에입니다. 십자가의 멍에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별세의 멍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멍에 속에 두 마리의 짐승이 들어가지만 힘센 짐승이 있으면 힘이 약한 짐승은 그냥 힘센 짐승이 가는대로 따라만 가면 됩니다. 큰 짐승이 힘을 써 주니까 작은 짐승은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멍에 속에 두 마리의 짐승이 있는 비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 내가 지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 십자가 속에 나는 들어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 '죽는 것은 내가 죽을테니 너희는 내 속에 들어와서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속에 참 안식이 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다 자기 마음에서 죽지 않는 인간의 욕심, 번민, 괴로움, 불안, 이런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으면 참 안식이 오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자의 축복인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인들, 석가,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또 위대한 영웅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이래 어느 세계에 들어가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든지 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22억의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큰 변화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 전체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인격의 변화를 체험했으며, 자기 죽음을 극복했으며, 인간고에 있는 모든 고통에서 해방을 얻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미개한 사회가 문명의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노예가 해방을 얻고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미개한 나라, 가난한 나라들이 예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부요한 문명국가로 개발되었던 것입니다. 전 세계 역사상 잘 사는 나라 하면 예수 믿는 나라입니다. 모슬렘, 불교, 힌두교 이런 종교로는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은총과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큰 축복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들의 삶에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만 이 축복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함께 이 축복을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와같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느냐? 죽었다가 살아난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성인도, 영웅 호걸도, 군왕도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한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갔으며 무덤에 갇히므로 끝장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지 아니하고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분명히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죽지않고 살아나셔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 자에게는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셨기 때문에 그 능력과 은혜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는 놀라운 축복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죄사함을 받습니다.
    인간의 수고 가운데 가장 큰 수고는 죄의 수고입니다. 이 수고가 죄로부터 왔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은 죄의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이고, 사회고, 국가고, 모든 고통의 문제는 죄로부터 발생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질병이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이 죄에 있습니다.

    오늘 이 민족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뿌리는 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문제는 경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도 이 정도면 해결된 것입니다.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을 뿐이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더 가져도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더 가졌다고 해서 사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의 문제인데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께로 난 자만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자는 모두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어떤 사람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께로 난 자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만 죄에서 해방을 얻고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가 인간이 구원받는 수단으로서 선행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교리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죽음을 이긴 생명이신 주님이기 때문에 내게로 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모슬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의 생명을 믿습니다.
    유명한 힌두교의 간디도 그의 자서전 마지막에 "나는 내 악함과 곤고함 때문에 내 생명이신 그에게 아직도 멀고 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끊임없는 고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고행하고, 오직 민족을 위해서 살아간 그도 힌두교를 통해서는 참 생명과 자유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고통이라고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효대사 이후에 불교의 대승이라고 말하는 성철 스님도 마지막 죽을 때 "내 죄악이 구만리 너머 저 지옥에 빠지는구나!"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그러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이 죄악의 짐을 누가 풀어주겠습니까?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죄를 지고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석가도 늙어 죽었고, 공자도 나이가 들어 죽었고, 다 때가 되매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기에 믿는 자마다 죄에서 해방을 얻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목적을 주십니다.
    인간이 받는 고통 가운데 삶의 허무와, 공허와, 무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가지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는 목적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사는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이러한 목적 때문에 인간의 수고를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중심에 공백이 있습니다. 그 공백에 예수님이 좌정하시기 전까지는 공허를 메꿀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공허하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권력을 잡아도 혼자 먼산 바라보면서 "이것이 전부는 아닌데...." 하면서 혼자 공허해 합니다. 아무리 향락을 누려도 돌아서서는 이 속에 채워지지 못하는 공백 때문에 '아, 공허하다' 하고 탄식합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인기있는 명사가 되고, 유명한 저명인사가 될지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거친 바다 위에 키도 없이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는 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공허를 인간은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마음 가운데 오셔서 나의 공허를 메꿀 수 있습니다.

    셋째,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간에게 참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에서 용서함 받고 삶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 학자인 웰즈는 61세가 되었을 때 "나에게는 평안이 없다. 나는 내 인생의 종점에 와 있다."라고 말했고, 시인 바이런은 "내 인생은 가을 낙엽이라 꽃과 열매는 다 떨어지고 질병과 늙음과 비애만이 내 것이 되었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 문인 소로우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고요한 절망 속에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모두 다 자기 마음속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별장에 사는 사람이나 오두막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탄식 속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성 어거스틴은 "오 하나님! 주님은 주님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처를 얻을 때까지 우리 마음은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물질로 행복을 얻은 사람이 없습니다. 돈을 사랑해서 소유하려는 탐욕은 끝없는 갈증을 일으킵니다. 재물은 바닷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집니다. 인간이 물질로 안정과 평안을 얻으려고 하지만 물질은 인간에게 불안과 염려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결코 물질로는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생수, 예수의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성은 살 수 있으나 사랑은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별장은 살 수 있으나 별세는 사지 못합니다.
    돈으로 관광은 할 수 있으나 천국은 못갑니다.

    마음의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믿음을 통해서만 얻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끝으로 인간의 실패의 수고, 가정의 상처의 수고, 또 모든 경쟁에서 탈락되는 좌절,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 수 있느냐? 주께서 우리에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넷째,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 가운데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이별의 고통입니다. 그 이별은 내가 사랑했던 것이 떠나는 이별인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랑했던 돈과의 이별, 권력의 이별,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는 이별, 직장에서 떠나는 이별, 이러한 것들이 수없는 고통입니다. 또 가지려고 할 때 갖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 고통에서 어떻게 내 인생을 승리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승리를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16)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돈버는 힘을 재력이라고 말하고, 공부해서 얻는 힘을 실력이라고 말하고, 운동해서 얻는 힘을 체력이라고 말하고, 권세를 잡아서 얻는 힘을 권력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다 힘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힘은 더 큰 힘을 만날 때 깨집니다. 내가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졌어도 더 큰 재산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부요한 마음을 흡수해 갑니다. 체력, 넘어지면 깨집니다. 실력, 더 실력있는 전문가를 만나면 그게 무효가 됩니다. 권력, 무너집니다. 더 큰 무력을 가진 자가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는 힘, 이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했던 나폴레옹도 말년에 세인트헤르나 섬에 유배되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알렉센더, 시저 나는 칼과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 그러나 유대 땅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손에 칼 하나 들지 아니하고 세계인의 가슴을 정복했으니 위대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는 무릎을 꿇는다. 인간의 어떤 능력도, 권력도 유한할 뿐이다."
    혹시 이 가운데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교만한 생각을 갖거나 목에 힘이 들어간 분이 있습니까? 겸손하십시오. 물질, 실력, 사회적인 지위, 이것 때문에 목에 힘이 들어갔습니까 빼십시오. 다 무너집니다. 오직 예수를 믿고 힘을 얻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이 힘은 바로 예수가 주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능력을 받고 승리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을 하늘 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굶는 것이 아니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조용한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편지를 써서 그의 영감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매를 맞으면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이 되게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우리에게 위대한 것입니다. 삶을 완전히 바꾸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받는 가장 큰 은혜는 죄에서 용서받는 은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찾는 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괴로움에서 자유하는 근심을 극복하는 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서는 능력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 주님이 주십니다. 이 은혜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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