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5절 끝에 '참 연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연보라는 말은 헌금과 같은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말하는 연보는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
을 위한 구제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구제금을 모금하고 있
는 것입니다.
교회의 헌금 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참 연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사도들은 여러
교회들이 부조를 해서 돕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을 바나바와 바울에게 맡겼습니
다(행11:28∼30).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이 연보에 동참할 것을 권하면서 디도와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한 형제를 보내 연보를 미리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바
울이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보
면 피차에 민망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고린도교회는 열심히 있는 교회이다. 우리도 열심을 내어야하겠다'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것을 보면 부끄러운 일이 생길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참 연보는 우선 이같이 미리 준비하는 것을 말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 하나에 집중해서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오늘은 이
'참 연보'라는 말을 중심으로 '무엇이 참된 헌금인가?' 하는 것을 살피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첫째, 자원해서 바치는 것이 참된 헌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참 연보'는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물'(「표준
새번역」)을 말합니다. '자진해서 바치는 것'(「공동번역」)을 말합니다.
헌금은 자원해서 해야합니다.
헌금 생활에 모범을 보인 분 가운데 한 분이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 목
사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매년 수입이 많이 늘어나도 평생 30파운드 정도만
생활비에 쓰고 나머지는 다 헌금하였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많은 액수를 자선사업에 쓰는 것을 보고 세무서에서 그의 재
산을 조사한 일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세무사찰을 했습니다.
조사를 나온 세무서원이 웨슬리 목사님에게 은그릇이 몇 개나 되느냐고 질문하
자 웨슬리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는 런던에 은 숟갈 두 개, 브
리스톨에 두 개 밖에는 없습니다. 내 주위에 빵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지기
전에는 영원히 은그릇을 더 사지 않을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평생 이렇게 하기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일 년이나 이 년 이
렇게 하다가 '이제 할만큼 했다'하고서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평생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 것 가운데서 얼마를 주님께 드릴 것인가?' 계산하지 말고 '주의 것
가운데서 얼마를 나와 내 가정을 위하여 쓸 것인가?' 묻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
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연보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데 여기에 자
주 나오는 말이 '자원해서'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연보를 넘치게 한 것
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원해서 그렇게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8
장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자원
해서 헌금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왕래하며 바울은 도운 사람은 디도입니다. 디도도 자원하여 이 일
을 했습니다.
8장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
에게 나갔고",
그 다음에 18절과 19절에 우리가 퍽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하나 나옵니다. "또 그
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
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디도와 같이 바울의 구제금 모금을 도운 또 한 형제, 우리는 이 형제의 이름을
모릅니다. 사도행전 20장4절에 바울과 함께 아시아까지 간 사람들의 이름이 여
럿 나옵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 디모데,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따름인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일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
과 사도의 원하는 것을 나타내고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사도와 동행하는 사
람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임원 임명 예배를 드렸는데 임원들도 이 무명의 동반자와
같이 복음으로써 칭찬 받는 사람, 주님의 영광과 교회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택함을 받아 은혜의 일로 교회와 동행하는 임원들이 되어야합니다. 특별
히 교회의 헌금을 담당하는 재무부원들은 여기 나오는 무명의 형제와 같아야합
니다.
바울 사도는 자원하는 헌금에 대해 9장7절의 뒷부분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자원해서 해야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참된 헌금이 아닙니다.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은 참된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의 법에는 헌금이 때로는
의무금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고 헌금을 하는 것이 교인의 의무 가운데 하나
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를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발적인
의무이지 교회라는 조직에 대한 의무는 아닙니다.
헌금은 세금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될 수 있으면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 힘씁
니다. 이것을 절세(節稅)라고 하지요.
방송사의 세무상담 프로그램에 들어오는 전화내용을 들어보면 '어떻게 하면 세
금을 조금이라도 덜 낼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세무사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말이 되면 소득세 정산을 하기 위해 기부금 납입증명서를 발급 받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에 대해서는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헌금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자원해서 하는 것이 참된 헌금이기 때
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교회 건축을 위해 힘쓸 때 한 성도가 "목
사님, 교회는 성도들의 자원봉사로 유지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관
목회 식으로 일을 해나가니까 아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이
퍽 강하게 기억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많은 부분을 성도들의 자원봉사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퍽 잘 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저희 교회는 특별히 이
런 면에 강하고 자원봉사활동의 질도 아주 높습니다.
반대로 소홀해지는 부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것도 자원봉사로 하겠지'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방치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헌금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시고 교회 일도 구석구석 자원봉사로 하시
기 바랍니다.
자원해서 하는 헌금이 참된 헌금입니다.
우리의 헌금이 자원해서 하는 헌금이 되기 바랍니다.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많은 헌금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믿음이 자라기 바랍
니다.
둘째, 신앙의 표현으로 드리는 헌금이 참된 헌금입니다.
'그 성도가 어느 찬송을 좋아하나?'에 따라서 '그 성도의 신앙 형태가 어떤 것인
가?' 또는 '그 성도의 신앙수준이 어떤 것인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올해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만 작년 새해 축복심방에 2교구와 3교구를
심방 하면서 좋아하는 찬송이 무엇이냐고 그 찬송을 먼저 부르는 것으로 심방
을 시작했습니다. '아, 목사님이 내 신앙수준을 알려고 그랬나보다', 그런 것은
아니고 찬송을 부르는데 이왕이면 심방을 받는 성도가 원하는 것을 부르는 것
이 좋으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찬송가 356장을 좋아하는 성도가 신앙수준이 높은 성도라고들 말합니다. 356장
은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
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입니다. 그렇지요. 나를 위해서 온 몸을 내
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정말 바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누가 '어느 찬송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물으면 너도 나도
"356장입니다!"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은 참된 헌금이 아닙니
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헌금을 하면 축복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은 헌금에 따라오는 일이지 헌금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 목적으로 헌금을 하
는 것은 하나님을 장사꾼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마음으로 하는 헌금은 참된 헌금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 하나님이 우리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헌금과 교회에서의 발언권이 비례한다고 생각하면서 드리는 것도 참된 헌금이
아닙니다.
저희가 속해 있는 용인서지방에 교회가 24개가 있는데 저희 교회가 지방 전체
예산의 반 가까이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70% 가까이 까지 부담한 일도
있습니다. 약한 교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저희 교회에서는 재정을 많이 부담한다고 권
리를 주장하거나 큰소리 치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주보 11쪽을 보면 제일 위에 저희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교회와 선교기관들 명
단이 있습니다. 올해 두 곳을 더 늘였습니다. 11년 전에 남선교회에서 고령에
고령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는 지금 고령 군 안에 유일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와 그리고 통일을 생각하면서 탈북자를 위한 기관을 넣었습니다. 사실은
이 보다 더 몇 배 더 많은 기관과 교회들의 선교에 동참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 교회가 돕고 있는 교회와 선교기관들"이라고 하는데 저희 교회
에서는 '돕는다'라는 말 대신에 '선교에 동참하는'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한 장로교회에 직물공장을 경영하면서 헌금을 많이 하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교
육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교육전도사가 "장로님, 오늘 당회를 하는데
(감리교의 기획위원회를 장로교에서는 당회라고 부릅니다) 교육부의 이 안건이
통과되도록 힘써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전도사님, 제가 될 수 있으면 전도사님을 도와
드리려고 하는데 이 부탁은 들어 드리기 어렵습니다. 전도사님도 아시다시피 제
가 헌금을 좀 많이 하지 않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적게 해야
덕이 되는 법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전도사는 이제는 한국교회의
중견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했는데 장로님의 이 말을 지금도 잊지 못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 집 바로 앞에 월곡감리교회를 건축하는데 요즘은 이런 경우에 일조
권(日照權)도 따지고 무형의 피해도 보상받으려고 하고 민원을 일으키는 일이
많습니다. 이 장로님은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오히려 많은 것을 양보하고 교회
에 믾은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월곡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장로님 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헌금이 참된 헌금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 해가 지
나면 그 해의 일들을 정리해서 요약된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
다. 올해는 책을 몇 권 읽었다, 올해는 글을 200자 원고지로 몇 매 썼다, 올해
경제생활은 수입이 얼마였다, 올해 헌금은 얼마를 했는데 전체 수입의 얼마이
다, 이런 것을 다 정리합니다.
전체 수입에서 헌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지요. 지금은 건축헌금을 하고 있으니
까 더 높습니다. 건축헌금 2억 원을 약정하고 지금까지 1억2천5백만 원을 헌금
했습니다. 우리가 작년 5월에 건축헌금을 약정하면서 2003년 말까지 다 헌금하
기로 했는데 그 때가 되면 은행의 대출을 받아 약정된 헌금을 교회에 다 하고
융자를 갚아나갈 계획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족하는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아, 얼마, 몇 퍼센트를 헌금했
다!', 최근에 실수로 이것을 입 밖으로 낸 일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 놈아, 예
수님은 너를 위해 백 퍼센트를 내 주셨어!" 이것을 생각하면서 호되게 자신을
질책합니다.
자신을 질책하는 하나의 이유는 교회의 사랑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받는 사랑이
생활비만이 아니지요. 성미가 있고 유형, 무형의 많은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몇 퍼센트 따지는 것은 무익합니다.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천
주교 신자인데 일선 문화부 기자 시절에 종교문제를 담당해서 우리 나라 종교
계의 내부를 아주 잘 아는 분입니다. 이 분에게 명동 성당이 우리 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더니 이 분이 그에 대한
부작용도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명동 성
당의 한 주일 헌금액이 그 건너편에 있는 영락교회 헌금액의 몇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10분의 일이라고 하던가요?). 이것이 천주교의 실상을 보
여주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자신은 개신교의 그 뜨거운 신앙이 오히려
부럽다고 하였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인 동시에 하나님을 전심전
력으로 믿는 신앙고백의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김문식 목사님이 믿음이 있어야 충성도 할 수 있다고 했
는데 믿음이 있어야 참된 헌금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헌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혼
자 사는 가난한 여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어 예수님의 칭찬
을 받은 일을 지금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참된 헌금에 힘쓰기 바랍니다.
셋째, 헌신이 참된 헌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연보라는 말과 헌금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알기 위해
많은 것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거의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연보는 범위가 넓어서 헌물(獻物), 물품을 바치는 것을 포함하고 헌금은 현금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고 구별하는 것을 한 군데에서 보았습니다.
참된 헌금은 돈을 바치는 것을 포함해서 헌물, 나가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
치는 것을 말합니다. 헌금은 헌신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 때 '날 연보 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시간을 바쳐 봉사하는 것을 '날 연보'라고 했습니다. 주로 전도하는 일을
했는데 영어로는 'day offering'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헌일(獻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선교보고 대회를 열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보고를 듣고 많은 도
전을 받았습니다. 보고가 끝나고 선교를 위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헌금주
머니가 그 청년 앞에 이르렀는데 그 청년은 가난하여 바칠 돈이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헌금 주머니에 자기 두 발을 넣고 외쳤다고 합니다. "주님, 나는 가난하
여 지금 바칠 물질이 없습니다. 대신 나는 내 생애를 선교를 위해 바치겠습니
다!",
이 청년이 바로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인 데빗 리빙스턴입니다. 리빙스턴은 이
때의 서원 그대로 아프리카를 위해 자기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숨을 거두자 영국 정부에서는 군함을 보내 그의 시신
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토인들이 반대했지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은인의
시신은 마땅히 아프리카에 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함의 함장은 토인들과 교섭해서 리빙스턴 선교사의 심장을 아프리카의 묻고
심장 없는 시신을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토인들은 리빙스턴 선교사의 시신을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 밑에서 미라로 만들어 내 주었습니다. 그 시신을 가져
다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장례를 지냈습니다.
헌신은 백지에 '주님 나를 온전히 당신께 맡깁니다. 나를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하고서 도장을 찍어 드리는 것입니다. 완전위임, 백지위임입니다.
우리가 올해의 봉헌 찬송으로 정해 부르고 있는 353장도 헌금을 넘어서 생명을
주님께 바친다고, 온전한 헌신을 주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4절 가사 "주 날 위해 그 귀하신 몸 버리사 이 내 몸을 피값으로 서셨으니 내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 온전한 헌신을 약속하면서 부르
시기 바랍니다.
진젠도르프(Nicolaus L. G. Zinzendorf 1700-1760)라는 독일의 귀족이 있었습니
다. 이 분이 뒤셀도르프에 있는 박물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에 달린 그림까지 왔습니다. 스템버그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
림 밑에는 라틴어로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 달렸는데 너희는 나를 위
해 무엇을 하느냐?'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 그림과 그 글을 보는 순간 진젠도르프 백작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그 그림과 글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사이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수위가 와서 미술관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뒤에 진젠도르프 백작은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이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라비안 형제단은 가슴
의 종교를 강조합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는데 너희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이 질문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실존철학자 까뮈는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어느 신부는 "자연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성도는 "나는 헌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하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참된 헌금은 내 생명과 소유는 주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참된 헌금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입니다.
참된 헌금은 영적 성숙을 위한 훈련입니다.
참된 헌금은 은혜와 복을 받을 기회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 가정이 지방으로 이사하게 되어 그 곳에 있는 교회를 소개해 드렸습
니다. 주일이 되어 그 교회에 가면서 남편이 부인에게 "그 교회도 목양교회처럼
봉헌상(奉獻箱)을 뒤에 두고 들어가면서 헌금을 하게 되어 있어야 그 교회에 나
가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이 교회를 찾아가면서 조마조마했는데 들어
가 보니까 다행히 저희 교회처럼 봉헌상자가 뒤에 놓여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
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가정은 지금 그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습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의 헌금생활은 모범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을 많이 하실 것
입니다. 성도들의 봉헌생활을 지켜보면서 놀라고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 위에 여러분, '참 연보', 참된 헌금을 생각하면서 자원하여 드리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신앙의 표현으로 헌금하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온전한 헌신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교회와 성도들이 8장1절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처럼 참된 헌금의
아름다운 본보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