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A집사가 주일 아침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 아내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께서 오늘 아침에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었다. A집사는 대답하기를 목사님께서 죄에 관해서 말씀하셨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아내가 다시 한번 죄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고 물었고, A집사는 대답하기를 “내 생각에는 목사님이 죄를 반대하시는 것 같았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는 그 날 아침의 설교가 무엇을 말씀하였는가를 정확하게 집어내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A집사가 그날 따라 설교를 진지하게 듣지 않아서 였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회중들이 A집사의 경우처럼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설교자들이 그들의 설교에서 한가지의 분명한 중심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다 심각한 문제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한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에 그들은 한 주일 내내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며 지낸다. 설교자들의 마음속에는 오는 주일의 본문 말씀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회중들은 그 메시지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단 30분 정도밖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설교자는 일주일 내내 본문과 씨름하며, 본문을 묵상하며, 본문의 주제를 생각하지만, 회중들은 그렇지가 않다. 더군다나 회중들은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에 그 메시지를 반드시 듣지 않아도 되며, 그 중에는 설교자가 선포하는 말을 주의해서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그런 회중들을 향하여 30분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을 전하고자 한다.[1] 결국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교가 끝나고 회중이 세상 안으로 돌아갈 때에 그들은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갈 만한 메시지를 받은 기억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 회중들은 많은 말은 듣지만, 정확하게 짚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행함으로 연결이 안된다.
2. 몸 말
1) 한 설교에서 하나의 위대한 중심사상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한 설교에서 하나의 위대한 중심사상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 현대인들은 한 설교에서 여러 가지 사상들이 주어질 때에 그것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현대의 회중들은 설교자가 설교에서 말한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배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때, 회중들에게 한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갖고 돌아가게 하는 설교자는 훌륭한 설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설교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설교는 다른 어떤 훌륭한 연설들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전체를 포괄하는 중심사상을 구체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널드 밀러(Donald G. Miller)는 성서적 설교의 핵심을 논하는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설교라도 단 하나의 중심사상이 있어야 한다. 대지나 소지는 이 중심사상의 일부분이어야 한다.....이제 우리는 가장 단순한 말로 이 장의 요지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설교는 하나의 주제를 가져야 하고 그 주제는 그 설교의 본문이 가진 주제여야 한다’”[2]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도 “잘 준비된 설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상의 구체화요, 발전이며, 완전한 진술”이라고 주장한다.[3] 조웨트(J.H. Jowett)는 그의 예일 설교학 강좌(Beecher Lectures on Preaching at Yale)에서 설교의 중심사상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설교의 주제를 수정만큼이나 선명하고 간결하며 의미심장한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어떤 설교도 선포하거나 기록하기에 충분할 만큼 준비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은 나의 설교 준비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지만 다른 한편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두는 일인 것입니다.....암영이라고는 없는 달처럼 맑고 분명한 그러한 문장이 떠오르기까지는 설교를 하거나 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4]
결국 설교자가 진정 효과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중심적이고 전체를 통일시키는 사상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는 성서적 개념의 전달”[5]이기 때문이다. 즉 설교는 “총탄(bullet)이어야 하지 산탄(buckshot)이어서는 안된다”[6]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는 다른 사상들의 뒷받침을 받는 하나의 단일한 지배적 사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과 적용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중심사상이란 무엇인가?
2) 설교의 중심사상이란?
헤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그의 유명한 설교학 교재에서 설교의 중심사상은(Main Idea) 주제(subject)와 보어(complement)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어떤 하나의 중심사상이 완전해 지려면 이 둘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주제란 “‘내가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What am I talking about?)라는 질문에 대한 완전하고 명확한 대답을 의미한다”[7]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사상을 말할 때, 주제는 한 단어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랑” “섬김” “찬양” 같은 단어들은 주제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주제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이것만으로는 불완전하며 따라서 보어가 필요하다. 여기서 보어는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것(주제)에 대하여 나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What am I saying about what I am talking about?)라는 질문에 대한 답”[8]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어는 주제를 완성시켜 주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사상이란 이렇게 주제와 그것을 설명해 주는 보어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시편 117편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이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시에서 시편기자는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 즉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시의 주제는 언뜻 보면 “찬양”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찬양”이라는 말만으로는 너무나 추상적이다. 분명히 이 시에서 시편기자는 찬양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시의 주제는 좀 더 한정되어야 한다. 좀 더 정확한 주제는 “우리가 주를 찬양해야 할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시편기자는 앞선 주제, 즉 “우리가 주를 찬양해야 할 이유”에 관하여 무슨 말을 보충하여 설명하고 있는가? 시인은 이 주제에 대하여 두 가지의 보층설명, 즉 보어들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들은 첫째로 주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크시기에 찬양을 받아야 하며, 둘째로는 그의 진실하심이 영원하시기에 찬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7편의 중심사상은 “우리가 주를 찬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크기 때문이며, 그의 진실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교자는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중심사상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지고 설명하며, 해석하며,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프린스톤의 설교학 교수인 토마스 롱(Thomas G. Long)은 설교자가 설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 중심사상을 “설교의 초점”(Focus)라고 말하면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키는 과정의 첫 단계에서 이 설교의 초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설교자는 설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표(What the sermon aims to say), 즉 “설교의 초점”(Focus)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초점진술”(A Focus statement)을 분명히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초점진술은 “설교의 중심이 되며 전 설교를 통제하며 통일시키는 주제를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전체설교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다”(A focus statement is a concise description of the central, controlling, and unifying theme of the sermon. In short, this is what the whole sermon will be "about").[10] 결국 설교자가 설교의 중심사상, 또는 초점진술을 하나의 문장으로 분명하게 만들 수 없다면 그는 아직도 설교단에 설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의 중심사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설교는 목표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설교는 세상의 많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회중들에게 그들이 의지하고 살아갈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설교의 중심사상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3) 설교의 중심사상은 본문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강해설교는 “어떤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고 전달되는 성서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11]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사상은 본문의 주석으로부터 직접 나와야 한다. 온전한 설교는 회중에게 본문의 주장을 증거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즉 본문이 설교를 지배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기 개념이나 주장을 설교할 권리가 없다. 설교자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전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가 강해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의 질문에 대한 그의 정직한 대답에 달려 있다. 즉 “당신은 설교자로서 당신의 생각을 성경말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사용하려고 하는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있다. 설교자가 그의 설교에서 본문을 하나의 발사대(Launching Pad)[12]로만 사용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강해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자가 본문의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나면 벗어난 정도만큼 그는 설교할 권위를 잃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설교의 배후에 있는 권위는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에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을 다룸으로써 회중들의 주의를 성경에 집중시키게 해야 한다. 한마디로 본문이 설교를 지배해야 하며, 설교의 중심사상은 바로 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설교의 중심사상은 명료하고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13]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유혹은, 한 설교 안에 본문에서 보고들은 모든 것을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만약 이러한 유혹을 거부하지 않으면 설교는 거의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체, 산탄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설교에서 그가 본문을 대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모두 이루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행해야 한다. 즉 설교는 본문으로부터 뽑아낸 중심사상에 통합되어야 한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설교를 준비하고 있던 한 목사님이 너무 고단하여 그만 서재에서 잠이 들었다. 책상에서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은 다음 날의 주일 예배 장면이었다. 목사님은 힘들게 설교 준비를 마치고 예배당으로 달려갔는데, 예배당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상한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안내 집사가 인도하는 대로 그 사람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의 모습은 위엄이 있었고, 예배에 아주 신중하였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마치 자기는 그 사람 하나를 향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목사는 생각하기를 예배가 끝나는 대로 곧 저 분을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인사를 하면서 나가는 교인들 속에서 아까 그 사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에 보이지를 않았다. 목사님이 안내 집사에게 “그 사람이 어디에 갔느냐?”고 묻자 안내 집사가 대답을 하기를, “목사님,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세요?”라고 하였다. 목사님은 “그 분이 누구시냐?”고 물었고, 안내 집사는 “목사님, 그 분이 예수님 아니십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목사님은 속으로 크게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 분이 예수 님이었다니, 하필이면 오늘같이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날 주님께서 오시다니...” 그러자 안내 집사가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 염려하지 마세요. 그 분이 가시면서 다음 주일 예배에도 또 오시겠다고 말씀을 했으니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잠이 깨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매번 설교를 할 때마다 주님은 예배에 함께 참석하셔서 나의 설교를 들으신다!” 이날 이후 목사님의 설교는 과거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꿈은 그 목사님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보스톤에서 목회를 하던 고든(A.J. Gordon)이라는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든 예배 때에 행해지는 설교를 주님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이 믿음과 깨달음을 가지고 평생 그의 목회와 설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설교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바로 선포되어지고 전달되어질 때, 거기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교회가 흥왕하게 된다.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바로 선포되어질 때 교회는 흥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 교회는 병들었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학자인 포사이트(P.T. Forsyth)는 지난 2천년의 교회와 설교와의 관계를 “나는 감히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하거나 설교와 함께 망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 선포되어진 말씀(the written Word)인 설교가 바로 설 때, 거기에는 살림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매 주일의 설교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오늘 설교자들에게 자신의 설교의 현장에 주님께서 앉아 계심을 볼 줄 아는 영안이 있다면, 우리들의 설교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한 설교학자의 말이 있다.
“설교자의 왕좌는 설교단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 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의 주위에는 불멸의 영혼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구세주께서 그의 곁에 계신다. 성령께서 회중들에게 역사하고 계신다. 천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막대한 책임인가!”
당신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3. 나가는 말
여기 설교의 중심사상과 관련하여 총탄(bullet) 보다는 산탄(buckshot)이 난무하고 있는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현장에서 설교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한 설교자의 말이 있다.
“설교자가 자신이 했던 설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 사항은 바로 그의 회중의 생각 속에 한 설교에 한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심겨 주는 노력에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평균적인 사람은 설교자가 말한 것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마치고 각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때, 자기 성도들에게 한 가지의 위대한 진리를 갖고 돌아가게 하는 설교자는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이는 설교 한 편에 반드시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전달해서 도전 받은 성도들로 하여금 한 가지 위대한 일을 실천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