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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 면류관
    2002-01-06 18:30:51   read : 214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 3. 5. 마태복음 27 : 27-31



    I. 말씀을 향하여 : 이 사람을 보라

    「에케이 호모(Ecci Home)」라는 그림. 즉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독일의 화가 슈테른 베르그(Sternberg)의 작품입니다. 그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돈을 벌겠다고 나체 모델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화방에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놓여있었습니다. 모델 아가씨는 저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고, 슈테른 베르그는 별 생각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금 죽으시는 장면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모델 아가씨가 얼른 말을 받아 "우리의 죄라구요?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구 말구요" 그 순간 슈테른 베르그의 가슴은 건물이 무너져 내릴 듯 철렁하는 충격을 받았고, 그날밤, 낮에 자신이 대답했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묵상했습니다. 두손 들고 기도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두 주목으로 눈물을 닦아내야 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그분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립니다. 눈물로 먹을 삼아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메케이 호모 - 이 사람을 보라' 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감동을 받은 프렌시스 헤브갈 양은 우리 찬송가 185장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라는 유명한 찬송시를 썼고, 이 그림에 감동받은 진젤 돌프 백작은 평생 주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뜻없이 십자가를 그리고, 의미없이 말을 내 뱉던 화가 슈테른 베르그처럼 예수님의 죽음이나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나 감격이 없이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행태를 향하여 토레이 신부는 "신앙인의 무감각 질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적인 나병환자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고 하나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천하디 천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오늘부터 6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절기입니다.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나는 나의 평생의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십자가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닌게며,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고 나면 못내 자심감이 없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지만 그 속엔 계시적 의미를 가진 깊은 뜻이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으시기 위해, 나의 허물과 수치를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 자격이 박탈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 이 신분 자격이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흘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한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 면류관 대신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그의 날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습니다.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됩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그는 실로 류영모의 질고를 지고 류영모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질별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류영모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류영모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류영모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류영모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류영모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 제이름 대신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을 넣어도 여전히 진리이며 사실임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크고 작은 상처, 굵고 가는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시고 주님 앞에 상처를 들추어 내십시오.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찔림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파도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with out pain, with out crown. 고통이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 있는 한 선교사가 어느 마을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입구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울을 건너오는 사람마다 큰 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와서는 그 돌을 버리고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침 큰 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온 사람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돌을 내려놓고 대답을 합니다. "이 개울은 비록 얼마되지 아니하는 폭이나 한 가운데는 물살이 대단히 셉니다. 이 돌이 없으면 물결에 넘어지기 십상이고 또 조금만 떠내려가면 깊은 낭떠러지가 있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 돌이 있으면 혹 넘어지더라도 돌만 잘 붙들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급류가 흐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종종 무거운 돌멩이의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다. 돌이 무겁다고 그 돌을 버리면 그 돌이 나를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아프다고 내 몫에 십자가가 무겁다고 십자가를 버리면 십자가는 나를 버리게 됩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의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것으로 그의 많은 은혜로 인하여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가시의 찌름이 없이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그가 받은 많은 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보상이 없습니다. 그는 하늘의 보상만을 기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기대했습니다. 가시를 통하여 면류관 삼아주시고 이 땅에 가시가 끝나는 그 날, 하늘 생명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줄 그 날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를 아십니까?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이고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만도 무려 10판을 거듭하며 2만 4천부가 발행된 시집입니다. 일본에서는 그의 모든 시에 곡을 부쳐 성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고, 전 일본에서 그 어느 부흥사도 추종을 불허할 만큼 신자들에게는 은혜를,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최근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를 +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나에게 이토록 큰 가시가 없었던들 어찌 그토록 완악한 내동포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아픔을 통하여 잔인한 고통을 통하여 일본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보다도 열배 백배 천배에 고통을 감사할 수 있다."

    V. 말씀을 맺으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나도 주님위해 가시 면류관 쓰렵니다. 그 주님 반드시 가시를 바꾸어 면류관 삼아 주실 것입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갈보리 산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고 노래하십시다. 여러분 가슴속에 있는 고통들을 숨기지 마시고 주님 앞에 들추어 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버렸던 십자가 버리지 마시고 다시 주워 챙겨서 먼지 털고 가슴에 품고 이제는 면류관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 얻기까지 그 십자가 붙들고 함께 승리의 행진을 계속해 갈 것입니다.

    오 예수님

    1. 갈보리 산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영광 다 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3. 험한 십자가를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4.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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