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요단을 건너가자 2002-01-06 18:47:37 read : 217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 8. 26. 여호수아 3:1-6, 14-17
I. 교회 : 세상의 등불
영국 해안에 조그마한 예배당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십자가 탑이 크지는 않았지만 밝은 등불 밝히며 서 있었는데 그 예배당이 어느날 폭풍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재정사정도 여의치 못했고 세울만한 사람도 없어 무너진 채로 예배당을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군 제독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예배당을 왜 세우지 않습니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우리가 세워 드리지요. 어둔 밤, 이 작은 예배당은 우리 해군 병사들의 이정표가 되었고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우리 배들의 등대가 되었으며 우리의 푯대가 되어 주었지요.”
한국교회가 크지 않은 불빛이었습니다만 지난 세기 어두운 이 민족에게 역사와 함께 발을 맞춰 걸어왔습니다. 한국교회는 19세기말 선교된 어린 교회입니다. 지난 100년, 숫한 민족의 아픔과 발을 맞춰 아픈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어두움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어 주었습니다. 서러운 역사의 굴곡과 함께 발맞춰 성장해 왔습니다.
"동방의 등불"이라는 「타고르」의 시가 아니라 할지라도 오래 전부터 21세기가 되면 한국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나라, 교회, 민족이 되리라 기대들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마지막 때 제사장이 되고 복음 릴레이의 마지막 주자가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많이 그 힘을 잃은 듯 보입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을 보면 약속의 땅을 찾아 요단강을 건너기 전 삼일을 강가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불빛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교회는 요단 도하를 준비하는 중이라고요. 지난 100년을 돌이켜 보며 회개도 하고 반성도 하고 앞으로 가야할 길과 목표를 확인도하고 새롭게 꿈도 꾸는 기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II. 꿈을 꾸라
이스라엘 광야 교회는 일주일이면 지나갈 광야 길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40년간이나 광야에서 방황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지루했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꿈의 땅, 희망의 땅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입니다. 출애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땅을 늘 뒤돌아보던 어리석은 백성들의 실수를 재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 가로막혀 있는 아말렉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도 걷어치워야 할 것입니다. 걸핏하면 불평하고 넘어지고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신음소리도 그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옛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에게 설교할 때 가끔 그렇게 얘기합니다. "오르지 못할 큰 나무가 있으면 쳐다보기라도 해라 그래야 꿈이 생긴다. 쳐다보면 길이 보인다."
한 추장이 나이가 들어서 세 아들 중 누군가를 후계자로 삼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세 아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랐습니다. 푸른 창공이 펼쳐져 있고 저만큼 언덕 위에 나무가 보이고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맏아들에게 물었지요. “아들아 무엇이 보이느냐”“네,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둘째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네게는 무엇이 보이느냐” “네, 저 큰 소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보입니다” 막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네게는 무엇이 보이느냐” “네, 독수리의 가슴팍이 보입니다” “쏘아라!” 그래서 이 셋째 아들이 추장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도 어두운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도 미래를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공격의 오메가 포인트가 우리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약속의 땅이 내 눈에 들어와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의 모습, 우리 주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여십시요. 가슴을 여십시요.
일찍이 패턴 장군은 전역하는 부하 장병들을 훈시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먼 훗날 그대들의 후손들이 그토록 처절했던 전쟁 때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물을 때 그대들은 자랑스럽게 그렇게 대답해라. 나는 대 패턴 전차군단의 일원이었다고.” - 「나는 주님이 그토록 아름답게 쓰시는 한 교회의 일원이었다. 그 교회의 사역자였다. 그 교회의 리더였다.」 심판대 앞에서의 자랑스런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대열을 놓치지 마십시오. 신앙인 가운데도 패잔병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승전군인처럼 자신만만하고 긍지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패턴 장군의 훈시는 우리모두 우리의 시대가 지난 다음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가? 사명과 비전 앞에 성실을 다했는가? 진리 앞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거기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당신은 용감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피하는 비겁쟁이는 아니었는가?
둘째, 당신의 판단과 결단은 옳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모두가 심판입니다.
셋째, 당신은 성실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했느냐는 것이지요.
넷째, 당신은 얼마나 헌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알고도 몸을 던지지 못한 사람, 늘 몸을 사리고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느냐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교회에 사명과 비전이 주어졌으면 함께 그곳을 향해 함께 건너 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III. 요단강을 건너 가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위대한 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 "핫비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은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강을 건너갔다는데서 히브리민족의 근원이 있고 히브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강을 건너가야 할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강을 건너감으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감으로 노예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민, 천국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제 최후로 건너가야 할 한 강이 저들 앞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누릴 수 있고 안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홍해는 60만 장정이 건넜습니다. 허다한 잡족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건너갔습니다.
요단은 믿음의 사람만 건널 수 있는 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요단을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거인족을 보고 두려워 떨던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불평하던 사람은 아무도 그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거룩한 시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요단을 건너가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언제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약속의 땅을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 제가 살던 마을에 교회당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던 목수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집엔 누가 살거예요?" 그 아저씨가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집엔 하나님이 사신단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사신다는 그 큰 집에 나도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그 이후 제 가슴속엔 좋은 교회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 심장을 파 본다면 거기엔 교회에 대한 영상이 있음을 알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내는 책들엔 대개 「무엇 무엇하는 교회」 -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100년동안 교회 씨리즈로 책을 낸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교회 씨리즈는 저의 로얄티가 되었습니다. - 꿈대로 되는 교회, 치유가 있는 교회, 축제가 있는 교회,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이 이후에도 수많은 교회 씨리즈들이 제 가슴에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영광스런 그림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 교회 그림은 한국 교회에 나누어지게 될 것이고 주님 오시는 그날 영광스런 면류관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곳을 향해 함께 나아가십시다. 꿈을 가지고 나아가십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미래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새 시대는 믿음의 사람, 꿈의 사람들에 의하여 펼쳐져 갔습니다. 나는 아무런 꿈도 도전도 없이 성공하는 사람보다는 위대한 꿈을 꾸고 위대한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는 사람이 되겠다 결단 하십시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요단강이 무엇입니까? 요단강은 죽음이요 가나안 땅은 천국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성경을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선 저들은 중단없는 전쟁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그 땅이 천국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가나안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하신 땅이었습니다. 도시를 정복하고 새공동체를 세워가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축복의 땅입니다. 사명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요단을 건너 가야할 땅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세계를 말합니다. 축복이 있는 곳이요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를 복음화하게 될 사명 가진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민족은 약속이 있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무엇입니까?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만 했던 첫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불순종하다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신 분이 계십니까? 이제 광야에 묻어두고 새 세계를 향하여 건너가십시다. 습관적인 죄 때문에 한발자국도 믿음의 향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갈등과 번민 때문에 믿음의 향상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두 광야에 묻어두고 이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건너가십시다. 예배에 실패하고 기도 생활에 나태하고 말씀 생활에 게을렀던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제는 요단을 건너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만 겨우 드리던 사람이 있습니까? 찬양예배, 성령축제, 새벽기도회에로 몸을 담아 보십시요. 모두 당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준비하십니다. 풍성한 선물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훌륭한 목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운 여정을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요단을 건너는 모험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할 것을 요구하고 땀과 피를 흘려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축복은 때로 고난이라는 보자기에 쌓여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느낌이 아닙니다. 결단입니다. 결단 할 때마다 한 걸음씩 전진해 가는 세계입니다.
IV. 떠나라
어떻게 우리는 요단을 건너갈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여호수아 3장 시작하는 말씀에 "여호수아가 일찍이 일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정직과 성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싯딤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4장 10절에 보면 싯딤은 역청 구데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싯딤에서 떠났다는 얘기는 이 땅, 썩어질 것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매여 살고 그 재미로 살아가던 속물근성을 떠나야 합니다. 예배 한 시간 드리고 그때마다 필요한 약간의 감동을 받는 것 - 이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 양 살던 전통적인 가치를 떠나야 합니다. 양반 근성 때문에 감격해 할 줄도 모르는 예배를 떠나야 합니다. 미신적인 기도를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방해가 되는 습관적인 죄와 갈등과 불신앙과 의심을 떠나야 합니다. 싯딤에서 떠나야 합니다. 습관적인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실패의 흔적에서 떠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떠나야 합니다.
캐논 선교사가 선교여행을 하는데 하늘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더니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 치고 땅에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어떻게 해서 꼼짝못하고 하늘에서 저렇게 떨어지나, 가까이 가서 봤더니 독수리가 먹을 것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가 땅에 족제비 한 마리가 지나 가길래 쏜살같이 족제비를 낚아 챘지요. 그런데 족제비란 놈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탁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을 털어내야 하는데 털어내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족제비란 놈이 독수리의 가슴팍을 다 갉아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견딜 수 없어 독수리는 빙글빙글 하늘을 날다가 가슴팍이 다 헤어진 다음에야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며 떨어졌던 것입니다.
창공을 솟아올라야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광활한 새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야 될 거룩한 성민들이, 축복의 세계를 만끽하고 살아가야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땅을 향하여 곤두박질하고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털어내야 될 족제비 한 마리를 털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짜를 것을 짜르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늘 나는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싯딤에서 떠나야 됩니다. 여러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죄 짓고 살아가던 어제의 모든 허울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실패의 흔적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불평과 원망과 입술의 실패들을 벗어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2장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사람을 가만히 정탐하러 보냈습니다. "싯딤에서 떠나라" 무슨 얘기입니까? 정탐하는 신앙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경꾼 신앙생활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고 주저 앉아있던 신앙생활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인공이다" 선언하십시요.
엘리야가 바알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 머뭇 머뭇 하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것이요 바알이 너희의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를 것이니라" 세상도 좋고 천국도 좋고, 세상의 쾌락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천국의 복락도 누리고 싶고, 어느 사이에 천국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겠습니까?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너희는 오늘날 너희 섬길 신을 택하라" 하늘 나라는 천국은 공동 우승이 없습니다. 무승부가 없습니다.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게끔 되어있고
신앙생활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먼저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만 매여있던 끈을 자르고 정탐만 하고 구경만 하던 신앙생활을 벗어 던지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중심을 실어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주사위를 하나님편에 던지십시요. 거기엔 실패가 없습니다.
V. 주님을 바라 보고
요단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야 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쫓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2,000 규빗쯤 되게 하고 언약궤를 보고 따라 오너라."
무슨 얘기입니까? 200만 대군이 광야를 여행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도록 법궤를 너무 가까이 두지도 말고 너무 멀리 두어 법궤가 보이지 않아서도 안된다. 200만 모든 백성들이, 장군들도 사병들도 노인들도 어린아이들도 남자도 여자도 법궤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두고 법궤로부터 시선을 떼지 말고 법궤를 바라보고 따라라! 제사장을 따르라. 법궤를 보고 쫓아 오너라. 내가 너희를 앞장 서 가리라. 너희 가는 길은 내가 개척하리라. 앞장 서 가는 하나님! 얼마나 멋진 하나님입니까?
지난 얼마동안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21세기 참된 교회의 모습 -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 셀교회를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놀라운 확신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그토록 세우시기를 원했던 바로 그 교회요. 1세기를 정복했던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교회의 모습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저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묵상하는 중에 저 자신을 많이 죽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모자라 지난 주간엔 성령님께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위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구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때 우리가 꿈꾸는 그 교회가 바로 지금 이 시대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 종말론적인 교회의 모습이라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원형 - 종말론적인 교회의 영광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분에게만 우리의 초점을 집중시키고 가십시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 가십시다. 하나님 말씀보다 앞장서지 마십시다. 조그만한 구멍가게를 열어도 기도보다 더 앞장서지 마십시다. 예수보다 내가 앞장서서 달려가지 마십시다. 우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십시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변두리로 취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변두리 취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장 세우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인생에 앞장서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산불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두 길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는 맞불을 지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유혹을 불길들이 얼마나 크게 타오르고 있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얼마나 큰불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정욕의 불이 얼마나 뜨겁게 타오르는지 모릅니다. 이때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불을 지피는 길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불을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능력의 불을 피우고 달려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골짜기로 내려가면 어디에서 불이 오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에 타 죽는다고 합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는 겁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겁니다. 정상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이 지금 어디서 타오르고 있고 어디에 길이 있고 어디로 내려가면 되겠다 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믿음의 대열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높은 곳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높은 곳에 올라라. 믿음을 높여라. 기도의 차원을 높여라. 말씀의 차원을 높여라. 그러면 너희들이 달려갈 새 시대가 너희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갈매기의 꿈으로 유명한 리챠드 바크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높이 오르는 사람만이 먼 곳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주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하늘의 비젼을 가지고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제는 자녀 교육을 하더라도 멀리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믿음 생활하더라도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멀리 볼 수 있는 시각, 지혜의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높이고 꿈을 높이고 은혜의 세계를 높이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강아지가 자기 손에 있는 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입으로 가면 입을 쳐다보고 손이 내려와 빵을 뜯으면 빵 뜯는 손을 쳐다보다가 또 올라가면 그 입을 쳐다 봅니다. 할 수 없이 빵을 뜯어서 강아지에게 주었습니다. 그걸 바라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봐 달라고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 눈이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철없는 강아지 한 마리만도 못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보고 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장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면 신앙생활은 평안합니다.
VI. 스스로 성결케 하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이 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지금 넘실대는 요단강을 건너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이 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지금 이 요단 강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200만 행진의 대열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창궐하게 솟아오르는 물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조바심하여 "하나님 이 강을 어떻게 건널까요?" 저들이 안타깝게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데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해라!" 이 얼마나 엉뚱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업이 어려워요. 내가 하던 일들이 잘 번창할 것인지 아니면 하던 일들마저 어려움을 겪을 것인지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방황하고 비틀거리는 내 자식을 바라 볼 때마다 이 자식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 아이를 어떻게 권면해야 됩니까?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된단 말입니까? 우리 가정이 어려워요. 우리 민족이 어려워요. 우리가 통일을 원해요. 휴전선을 거둬 주세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를 살려주세요.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스스로 성결케 해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 전략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네게 중요한 것은 거룩이니라. 내가 너희를 쓰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너희를 살펴 볼 지니라. "나는 준비된 그릇대로 쓴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성결의 문제였습니다. 거룩의 문제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문을 수축하는데 양문을 제일 먼저 수축했습니다.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문을 제일 먼저 수축했습니다. 무너진 곳이 사방팔방 많지요. 그러나 제일먼저 예배를 수축해라. 기도를 수축해라. 너희 제단을 수축해라. 너희 영혼을 거룩하게 해라.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못생긴 그릇도 씁니다. 작은 그릇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대로 쓰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더러운 그릇은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원하면 여러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입술을 쓰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성결하게 하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발을 쓰기 원하십니다. 손발을 거룩하게 하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장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비전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 비전을 거룩하게 하십시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 교회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시다.
VII. 발을 들여 놓아라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15절 16절입니다.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다" 아직도 물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러 그 발이 물가에 닫자마자 물이 두 토막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이 갈라진 다음에 제사장들이 발을 들여다 놓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발을 들여다 놓았더니 물이 갈라졌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내가 믿을 거예요. 하나님 내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사업이 번창케 해주세요. 그러면 충성도 하고 헌신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내가 충성해 볼께요.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를 내게 보여주세요. 그래야 믿을 것 아니예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기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믿으라" "보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 동사를 바꾸기 원합니다. 하나님 보여 주세요 믿을께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우선순위가 똑바로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께요. 아니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입니다.
여러분의 옛 생활, 애굽을 뒤돌아 보던 지난 날의 모든 광야생활을 이제 청산하십시오. 지루하고 저주스럽던 광야생활을 묻어버리십시오. 요단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 요단강에 믿음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사장들처럼 법궤를 메고 먼저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앞장 서서 가는 선구자가 있을 때 이루어 집니다. 개척자가 있어야 합니다.
셀교회의 아버지 랄프 네이버의 책 가운데 얼어죽은 고양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날씨가 너무 너무 추운 어느날 몸을 녹일 곳을 찾던 고양이는 문이 열려있는 한 집을 보았습니다. 마침 벌겋게 타오르는 장작불과 벽난로를 보았습니다. 고양이는 얼씨구 나를 위해 준비된 곳이었구나.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밤 고양이는 얼어 죽었습니다. 벽난로 불은 장작불이 아니라 백열전구를 셀로판지로 싸서 만든 가짜 불이었습니다.
행위가 없는 사랑이 이렇습니다.
도전이 없는 설교가 이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신앙이 이렇습니다.
적용이 없는 성경공부가 이렇습니다.
결단이 없는 신앙은 가짜 불입니다.
기적은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주변엔 일어죽은 고양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 왔다가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교회의 가짜불 때문이었습니다.
셀목장에 참여하십시요. 그래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왜요? 옛날 구역예배에서 실망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구역이 아닙니다. 천국가족 같은 셀목장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실망하더라도 들어가십시요. 가서 당신이 진짜 불을 만들어 내십시요.
태신자를 행복의 동산으로 데리고 오십시요. 의심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 총동원 전도때 새신자들을 인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가짜 불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제 진짜 불을 경험하십시다.
특별새벽기도회 기간입니다.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래도 결단하지 않고 잠을 잡니다. 과거에 한 두 번 특별새벽기도회를 참여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가짜 불을 본 것이지요.
내일 아침부터 일어나십시오.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불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몽둥이로 쫓아도 모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인다고 해도 모였습니다. 그들이 불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VIII.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얼마전 우리교회를 다녀가신 빌 벡헴 목사님의 최근 책 「Redefining Revival」- 「다시 정의를 내려보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워치만 니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1951년 정월 초하루, 워치만 니는 상하이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설교의 핵심은 떡과 물고기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설교를 마무리하였다. “곧 당신들의 능력이 당신들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시기가 오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의 마지막이 이르렀다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들 위에 함께 하기 때문에 그때가 바로 시작하는 시점이 될 것입니다.”
위치만 니는 1952년 4월 10일, 50세의 나이로 체포당하였습니다. 그는 다시는 자유를 맛볼 수 없는 영어의 몸으로 20년을 살다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죽었고 그 또한 1972년 6월 1일에 죽었습니다. 그는 누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편지에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의 기쁨을 유지하고 있어요.” 20년 동안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여전히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6년에 워치만 니는 4억 5천만 중국 전체 인구 중에 10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예측했고 그때부터 교회는 문을 닫았고 선교는 불가능했습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1996년 2월 현재 중국 내부 공산당 조사에 의하면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는 중국인 수보다 기독교 그룹에 소속된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고 추정하였습니다. 50년만에 죽의 장막 중국의 뚜껑을 열어보니 약 5천 3백만 공산당이 있는 반면, 그 숫자의 배에 해당하는 1억이상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프로그램에 맡기지 말고 성령님께 맡겨 드립시다. 주님이 이루시는 영광스런 그 교회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립시다. 함께 요단을 건너가십시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요단을 건너가십시다. 한소망가족들이여! 손잡고 함께 요단을 건너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