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그 이름의 능력 2002-01-06 18:51:07 read : 237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 9. 30. 마태복음 1:21, 사도행전 4:12
I. 교회의 힘이 무엇인가?
지난 7일 (2001.9.7) 뉴욕의 한 메디칼센타 외과의사가 7,000km 대서양 건너 프랑스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담낭을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을 했습니다. 광섬유로 연결된 아주 작은 수술칼을 이용해 미국에 앉아서 프랑스에 누운 환자를 수술했다는 겁니다. 이 원격수술은 시간차가 0.15초에 불과해 실제 수술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수술의 이름을 1927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던 찰스 린드버그의 이름을 따 “린드버그 수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과학의 힘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빌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책에서 정보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정보가 힘이요 돈이요 재산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번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에서 현대무기가 얼마나 가공스런 것인가를 보여줄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의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 이 말씀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이름의 능력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힘을 가지지 못해도 세상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신령한 힘이 있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권투 왕 무하마드 알리를 잘 아시지요. 그는 현재 파킨스씨 병에 걸려 투병중에 있습니다. 지난번 애틀란타 올림픽 때 마지막 주자로 성화 점화를 위해 단상에 올라섰는데 점화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떠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전성기 시절 "나는 이 땅의 힘의 제왕이다"라면서 큰소리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경우 점화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느냐고 안타까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
천번 만번 옳습니다. 인간의 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만든 힘은 다 유한합니다. 정보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세월이 흐르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능력은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II. 예수 - 구원의 능력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한다. 영생을 얻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게도 예수님이 필요한가? 내게도 구원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도 언젠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는 날이 옵니다. 여기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장 잘 가르쳐주는 한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를 성경에서는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마치 신화나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유치한 소리로 간주해 버리고, 지옥이라는 말조차 비웃고 무관심으로 일축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꿩 한 마리가 대가리를 풀섶에 쳐박고 “사냥군 없다. 사냥꾼 못봤다!”소리친다고 해서 사냥꾼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끝날 천사가 와서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9-5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이토록 엄청난 벌을 내리셔야 했나요? 풍성한 천국 대신 왜 지옥 형벌을 내리셔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이라 말씀하신 바로 그 성경이 하나님은 공의롭고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죄인을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교회에 오면 듣기 좋은 소리, 재미있는 얘기, 위로가 되는 말을 해줄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쁘게 죄, 지옥 소리만 하고 있구만!"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그러나, 목사는 영혼의 의사입니다. 수술을 해야만 살릴 수 있는 환자에게는 싫어도 매스를 대야만 합니다. 칼을 대어 찢어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라야 하는 곳에 자꾸 반창고만 붙이면 그 사람은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아무리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부패한 성향이 있습니다.
일전에 피택자들과 설악산에 갔다가 케이블카를 타보았습니다. 산을 오르는 그 길고 긴 줄이 아주 튼튼하고 완벽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긴 줄 가운데 단 1cm라도 녹이 슬고 썩어 있다면 과연 그 케이블카가 무사히 산을 오르내릴 수 있을까요? 케이블카는 졸지에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99% 선을 행하고 1% 죄가 있어도 지옥으로 추락하고 말 운명 - 이것이 인간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을 아십니까?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죄 짐을 해결해주고 지옥 형벌을 면케해 줍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단 한마디만 들어야 한다면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들어야 한다면 역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제 힘으로 걸을 수도 없고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는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시인은 “그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사랑을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그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그렇습니다. 일찍이 설교가 버나드는 말하기를 예수의 이름 속에 있는 그 비밀을 깨달은 자의 입 속에는 꿀송이처럼 달콤함이 있고, 예수의 이름을 듣는 귀에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리고, 그 마음 속에는 기쁨이 샘처럼 솟아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고요한 시간, 기도를 시작하면서, 혹은 기도를 마치면서 예수의 이름을 즐겨 부릅니다. 그때마다 예수의 향기가 마음과 마음 깊은 곳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 놀라운 이름 아름다운 영광의 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은혜로우신 생명의 주
이 신기한 예수의 이름은 인간의 머리나 혹은 땅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친히 그 뜻을 풀이해 주신,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름입니다.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1)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가장 적합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아들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예수의 이름을 들고 나가면 하나님은 기쁨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의 이름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우리교회가 5층 상가 교회시절 전도간증을 왔던 집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고구마 전도왕으로 알려진 과천교회 김기동 집사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현재로는 아주 탄탄한 중소기업 두개를 경영하는 아주 성공적인 기업인입니다. 그런데 10여년 전만 해도 이분이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사철만 되면 전세 값이 올라서 늘 싼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던 모양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다말고 그때 집주인을 만나 간증을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반 지하에서 살다가 싼 방을 구하러 이곳 저곳 다니다 어느 복덕방에 들어갔습니다. ‘싼 방 하나 없습니까?' 한참 복덕방 주인이 생각을 하더니‘싼 집이 하나 있기는 한데 젊은 사람에게 소개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왜요?' ‘폐가 아파트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안 살고 아예 방치해 놓은 폐가 아시죠. ‘왜 폐가가 되었는데요?' ‘2년동안 네 가정이 그 집에 들어갔는데 3개월도 안되서 남편이 죽기도 하고, 아내가 죽기도 하고 식구 중에 한 사람이 죽어서, 지금은 아무도 안 들어갑니다.’그 집이 과천 주공아파트 404동 605호였습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 했습니다. 왕거미 9마리가 거미줄을 치고 있더랍니다. 문은 덜커덩거리고 창문은 깨어져 있었고 금방 뒤에서 누가 머리풀고 나타날 것 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믿는 사람이니 이까짓 것 내가 못 가? 싶어서 ‘계약합시다.' 그랬더니 ‘당신 아직 젊고, 애가 둘이나 된다면서 괜찮겠소?'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니까요.' 그랬더니 복덕방 주인이 연락을 해 가지고 집 주인이 대전에서 올라왔어요. 그 주인이‘당신 정말 괜찮겠느냐고.' 계약서를 쓰다말고 ‘괜찮겠어요.' 도장 찍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몇 번이나 괜찮겠냐고 다짐을 하더래요. 집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부인과 아이들에게 얘기합니다. ‘얘들아, 귀신의 집으로 우리가 이사를 가게 됐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집에 이사가는 거야. 당신 알겠지? 얘들아 알겠지?' 그래서 이사 왔네. 이사를 와 놓으니 그 주변에 있는 아파트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염려 반 호기심 반 쳐다 보는 거예요. 저 불쌍한 사람이 가족을 잃게 생겼구먼. 그렇게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는데 3달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과천 교회에 김기동 집사라는 사람입니다.' 6개월이 되었습니다. 어려웠던 기업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1년이 지났는데 직원이 수백명으로 늘어났습니다. 2년 만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복덕방 부부가 예수를 믿었고 대전에 있던 국장이란 집주인이 예수를 믿었고, 404동에 사는 사람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아파트 신청을 했는데 40평 아파트가 당첨이 되어서 이사를 간다고 하니까 404동 주민들이 다 모여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어요. ‘고맙습니다. 이 아파트가 다른 옆동 아파트보다도 무려 3, 4천만원 싸게 나갔는데 당신 때문에 오히려 404동이 복받은 동이 되었습니다.' 그 잔치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일장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면 귀신, 잡신 문제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환난의 문제가 다 사라집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나처럼 시시한 것에 매여살지 아니하고 영원한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하시는 분, 손 한번 들어 보세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손 들었어요. 그래서 손든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나오기 시작했는데, 과천 시내에서 아파트 한 동이 100% 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동은 그 동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똑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렇게 신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똑같이 예수를 믿고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무력하게 비실비실 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그분을 진정으로 우리 삶속에 적용하며 그 분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이 차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III. 예수 - 전도의 능력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이 온통 소동이 났지요.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성전 입구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한 40되어 보이는 남자인데, 들어가는 사람, 나오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손을 내밀어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날 따라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감동했습니다. '너 저 사람을 고쳐주라.' 성령의 음성이 들렸어요. 가다가 그 앉은뱅이 앞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쳐다보았습니다. 앉은뱅이는 자기에게 뭔가 동전이라도 한 닢 줄 줄 알고 쳐다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3장 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쉽게 말하면 나는 돈은 없다 그 말이요. '그러나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노니, 한 가지가 있는데 이것 내가 너에게 주겠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가 네게 주노니 너 그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40년동안 앉은뱅이로 살았는데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가 기록하기를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다리를 움직이면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가 손을 잡고 벌떡 일으켰어요.
여러분, 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한 달만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어서려고 해도 하체가 후들거리면서 일어서기 힘든 게 인간입니다. 40년동안 한번도 일어나 보지 못한 앉은뱅이, 다리가 말라붙은 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법석을 떠니까 그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그 주변에 모여 쌌습니다. 그리고는 그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을 무슨 신을 보는 것처럼 신기해 가지고 쳐다보고 있어요.
이 권세가 어디에서 나왔느뇨. 3장 15절- 16절에 보면 "너희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5-16) 여기 예수의 이름이란 말이 한 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 이름을 가지고 이 사람이 나았다고 막 소리를 치고 베드로가 증거하니까 그것 때문에 붙들려 가지고 영창에 들어갔어요. 하룻밤을 잔 다음에 그 다음날 재판석에 끌려 나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재판석에 앉았어요. 재판을 담당한 대제사장들은 궁금했어요. 도대체 갈릴리의 어부 출신인데 무슨 이름을 가지고, 누구 권세를 가지고 이런 기이한 일을 행하느냐? 그걸 알고 싶어서 그들을 신문했습니다.
여러분 4장 7절 봅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7,10)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2천년동안 기독교의 모태가 되었던 오직 예수!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예수요, 예수 이름 빼놓고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 이름을 증거 했습니다. 위협을 당하고 핍박을 만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싸웠습니다. 병자를 앞에 놓고 예수 이름으로 그들을 일으켰습니다. 귀신과 악령의 역사 앞에 예수 이름으로 대적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그들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전도를 해 봐야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전도하다보면 어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분들이 전도를 하면 "여편네들이 집에서 살림은 안하고 떠들고 돌아다닌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교회의 약점을 들춰내서 우리의 말 문을 막아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내 경건과 도덕적인 능력과 선행의 본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이름 앞에 무력한 전도 앞에 무력한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폭도들 앞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했을 때에 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3천명이 돌아왔습니다. 5천명이 돌아왔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인도 선교사로서 선교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탠리 존스는 인도에서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가 89세에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보스턴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사들에게 “의사선생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고 명해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여러 번 거듭해서 부탁하자 치료하러 들어오는 의사들마다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탠리 선교사는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아멘!”간호사에게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간호사도 치료 도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스탠리는 그 즉시 대답했습니다. “아멘!”혹시 노망이 든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그 분은 6개월 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90세의 나이에 또 다시 인도로 선교를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야 물러갈지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건강할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미국 교회의 한 통계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질병을 치료하는데 선포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92%가 되더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1년이 지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지하게 한 번도 전하지 않는 사람이 98%라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전혀 발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못난 그리스도인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나 영광스러워 나만 알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너무나 존귀하여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나 능력이 커서 숨겨놓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라는 이 운동은 사탄에게 배앗겼던 영토회복 운동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신자를 전도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겼던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능력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버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불신자 전도운동을 우리가 익혀가고 또 몸부림 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남의 일처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과연 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맞는가? 정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정말 저 사람들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받고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때론 제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급해 하실 때는 멍하니 구경만 하다가 내가 급할 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안타까워 할 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내가 조금만 안타까운 일을 맞게되면 쩔쩔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이 얼마나 못난 그리스도인들입니까? 하나님이 급해하는 사역에 여러분들도 급해 보시면 어떨는지요. 하나님이 안타까워하는 문제를 여러분들도 가슴에 끌어안고 안타까워하시면 어떨는지요.
IV. 그 이름의 능력을 주신 이유?
예수 - 그 이름이 구원의 능력, 전도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 이름을 주신 이유는 분명해 집니다. 전도하여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치유하라는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예수를 전하여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지 아십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구체적으로 역사합니다. 성령의 은사도 복음전하는데 사용하면 폭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왜요? 거기에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지방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월요일이라 피곤하기 때문에 잠을 청하는데 앞에 사람이 계속해서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성령님이 계속 마음속에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라. 저 사람에게 복음를 전해라.' 알려주는데도 ‘하나님 저는 피곤해요. 지금 가서 복음을 전해야 돼요. 이 사람에게 복음 전하다가 피곤을 쌓으면 오늘 집회부터 망쳐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졸다가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서 보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나가더니 기차 난간에서 뛰어내렸어요.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하나님 평생 이제는 하나님 앞에 민감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성령의 임재, 성령의 명령에 민감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때부터 성령 앞에 순종하기 시작했고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루는, 성령하면 생각날만큼 성령님에 민감한 사역을 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발전소로부터 각 가정까지는 전력을 공급하는 전선으로 일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소가 아무리 크고 또 엄청난 양의 전력을 공급한다 해도, 가정에서 스위치 하나를 올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밥도 짓지 못하고 전등도 켜지 못합니다.
예수 그 이름의 능력 -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온 관심은 사탄에게 빼앗긴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집나간 아들들에게 쏠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 잃은 성도들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잃은 백성들을 바라보십시오.
몇 년 전 괌에서 끔찍한 여객기 사고를 기억하십니까? 그 사고로 우리는 장래가 촉망되던 정치인 한 분을 잃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에 소속되어 있던 신기하 의원이라는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그의 노모에 관한 기사는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자녀가 있었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막내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그날로부터 그분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괴로워하다가 곡기를 끊은지 50일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찾아와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교회에 모여서 찬양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행복해 하시며 바라보고 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불신 세계에, 사탄에게 빼앗겨 주님 앞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미래의 성도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5장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시는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잃은 영혼은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해야되는 일이 있다면 이 일입니다. 교회가 이 일에 능력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은사를 잃어버립니다.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무력한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전 미국 대통령 카터가 출석하는 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 주일 출석 교인의 약 ⅓ 정도는 카터 대통령이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안내를 하고 새가족을 돌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방문하는 방문객들이라고 합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Why not the Best? -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육사를 졸업할 당시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적을 본 대통령이 이 성적이 최선을 다한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Why not the Best? 이 말은 그때부터 그의 인생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래 전 그는 교회의 전도대원으로 10년동안을 섬기는 동안 140가정에 복음을 전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은근한 자부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하는데 3개월동안에 무려 30만명에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때 문득 무서운 마음의 가책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3개월에 30만명을 만났다. 그런데 예수를 위해서는 10년동안에 겨우 140가정이라?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거룩한 양심의 가책이 필요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 그 이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V. 예수 - 그 이름의 능력을 업 그레이드 시켜라
얼마전 세계적인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세계를 접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DNA를 변경, 컴퓨터를 앞지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호킹 교수는 지난 1일 (2001.9.1.) 독일 잡지 포쿠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컴퓨터 지능이 발달해 세계를 접수할 위험은 실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컴퓨터 성능은 매달 두배로 개선되는 등 발전이 빠르기 때문에 속도가 느린 인간 DNA를 바꾸지 않으면 컴퓨터에 반드시 뒤쳐질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에 대해 위험하고 순진한 발상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주목해 볼 교훈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 영적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은 급속도로 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게을러져가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접수하고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에 지금 우리는 영적능력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DNA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의 능력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서구 일부 나라에서는 교회들이 팔려나가는데 이슬람 사원으로 팔려갑니다. 지난 120년동안 기독교 역사속에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버젓이 한소망교회가 몸담고 있는 일산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당에서는 대통령까지 나가고 큰소리 뻥뻥치던 목사님 한 분이 섬기는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 유지가 어려워 복덕방에 예배당을 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주교회가 그것을 접수했습니다. 일산 신도시에 가장 크게 지은 한 교회가 후곡마을에 있었습니다. 지나가다 보면 버젓이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얼마전에 그곳을 지나가다 보니까 후곡성당으로 간판을 바꾸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옆으로 가서 중산마을 들어서려고 하면 산 밑에 널찍하게 큼직한 예배당 땅을 준비하고 아담하게 지었던 예배당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도 천주교회로 팔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보았더니 길거리에서 천주교 교인들이 우산을 세워놓고 “신앙상담”이라고 써 놓고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전적으로 공격적으로 자신감에 넘쳐서 저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위축되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의 능력의 잃어버린 교회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줄 모르는 교회들,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어찌하실런가?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운전하다 성당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그 건물 옆을 지나다 말고 손 발에 힘이 빠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전도의 능력을 잃고 있었던 영국 땅에서 윌리암부츠 대장이 외쳤던 절규가 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눈을 열어 지옥에서 고통중에 신음하는 우리 가족, 우리 이웃들의 비참함을 한번만 보여주십시오. 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의 눈을 열어 사탄의 간교한 작전을 한번만 보여 주시고 택한 백성들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가슴을 한번만 보여 주십시오.”
저도 이 시간 윌리암 부츠 대장의 절규를 이 땅에 외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전도의 감격과 기쁨, 그 보람을 상실했습니다.
전도의 영광도 부담도 잃어버린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이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주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세요.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세요.
사탄의 사악함과 하나님의 구원의 열망을 보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