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교회 청년교회를 맡고 있는 심상철 목사가 현대교회를 향해 던진 일성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공동체인가? 공룡체인가?”우리교회 역사 이 질문 앞에 예외일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몸집은 대단히 커졌는데 그 안에 진정한 가족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세상을 정복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교회라고 한다면 그건 공동체 일 수가 없고 공룡체 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자기 몸집 하나 가누기에도 급급한 현대 교회가 공룡체에 불과하다면 그 공룡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 없이 나 못살고 나 없이 너 못사는 아름다운 가족, 서로 돌봐주고 서로 세워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성장하고 함께 쓰임받는 멋진 가족교회 - 이것이 바로 공동체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은 환경속에 살면서도 마냥 공허해 하는 이유가 바로 소속감의 결여, 공동체 경험의 부족에서 온다는 겁니다.
저희들이 어릴 때 자란 고향 마을엔 나름대로의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한 가정의 문제는 마을 전체의 문제였고, 한 사람의 기쁨은 마을 전체의 경사였습니다.
몇몇 소수의 사람만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집, 자기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저희들 어릴 땐 강변 백사장에서 소먹이는 언덕에서 온동네 얘들이 모여 씨름하며 멱감으며 기마전하며 하루종일 어울려 살았습니다. 거기엔 왕따도 없었고 빈부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요즘아이들은 저마다 홀로 T.V. 앞에서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도 모자라 귀에는 이어폰까지 꼽고 귀막고 혼자삽니다. 철저히 혼자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회복하고 물려주어야 할 교회의 유산이 있다고 하면 바로 공동체입니다.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어른들도 마을공동체를 이루기가 어렵고, 아이들도 초등학교 한번 졸업하려고 하면 학교를 두 세 번 옮기기가 일수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계속되는 관계와 교제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니 경험이 부족합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교회의 지상과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우리교회가 마냥 커지기만 원하는 공룡체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II. 한국 교회의 지상과제 - 공동체
한국교회는 19세기말 미국의 부흥운동의 영향아래서 태동된 교회입니다. 부흥운동은 개인주의적 신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오염되고 나면 그것을 벗어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떤 청년이 은혜를 받고 나니까 나 혼자만을 위해서 늘 기도한다는게 송구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기도 한번을 하더라도 타인지향적인 삶을 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신랑감만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이제는 그것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부모님에게 훌륭한 사위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좋은 사위감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제는 저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제 여동생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저 여동생에게 좋은 형부를 만나는 게 얼마나 기쁨이 되겠습니까?
웃지만 우리 모두도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부흥운동은 개인적 중생, 회심, 체험 등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말씀을 중시하고 중생의 사죄의 은총을 강조하는 좋은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동안 부흥회, 사경회를 통해 한국교회는 놀라운 축복과 성장을 경험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주의적 교회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성의 약화입니다. 둘째는 모임밖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복하는 Out-Reaching 즉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일에 대단히 약할 수밖에 없었지요.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창세기 에덴동산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66권을 달려가며 공동체로 끊임없이 충만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천년왕국 공동체로 그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공동체로 시작하여 시작하여 공동체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공동체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복되어라 공동체여!」 설교제목을 잡고 어떤 찬송을 성도들과 더불어 부를까? 찬송가 600장 또 다른 복음성가집 1,000여 곡을 뒤졌는데 함께 부를만한 마땅한 공동체 찬송이 모자라다는 사실에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강점으로 성장되어 왔는데 선교 100주년이 지나면서 오히려 약점으로 아파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 앞에 조롱거리가 오히려 되었습니다. 그 옛날 선지자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앞에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선지자들의 심정으로 이제는 우리가 한국교회를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의 약점을 붙들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교회를 공동체로 만들어가기 위해 몸부림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된 여성작가 마러 폴 (Marla Paul) 이라는 사람이 「시카고 트리분 (Chicago Tribune) 이라는 잡지에 고백적인 글을 썼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우고 유지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면서 슬픔과 실망을 토로하는 자기 고백적인 글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교회를 공동체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습니까?”하는 고백이었지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교회들로부터 이런 실망과 낙심을 경험했다는 수많은 편지들을 수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한 독자의 편지 가운데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나는 초대받지 않은 파티장 밖에 서서 창문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으십니까? 저는 한교회를 섬기는 목사입니다 만은 시시때때로 이런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공동체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몸부림을 했습니다. 서로의 시간을 냈습니다. 거기다 신앙과 인생의 승패를 걸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빛으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소금으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빌 하이블스의 윌로크릭 공동체교회입니다. 그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보며 미국에 있는 5,000여 교회들이 그들과 똑같은 철학과 원리로 교회를 섬기기를 원합니다.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교회에 전체, 커다란 영적인 부흥을 하나님이 주시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교회들이 똑같은 원리를 배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의 교회의 지상과제가 있다고 하면 우리교회를 얼마만큼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느냐, 하나님의 가족으로 세워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III. 가정 공동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인 에덴동산의 가치는 동산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 많은 과일열매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절이 없는 관계의 장소였고 진정한 공동체의 자리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 공동체라는 말의 의미는 함께 움직이는 몸, 함께 살아가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몸은 함께 살고 함께 죽습니다. 성경에서 몸으로 표현된 두 집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학교나 회사를 만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토록 소중한 가정을 공동체로 만드셨을까요?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은 삼위일체가 뭐냐?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한 분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교도들은 모일 때마다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고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두 분이서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위일체면 되는 거지요. 왜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공동체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 안에 가장 가치 있는 삶의 형태를 공동체 안에 존재하도록 하나님은 고민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것들은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숨겨두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습니다.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아내를 주었고 자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소중한 공동체가 깨어져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나무 그늘 밑에 숨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내가 부끄러워 나무 그늘 밑에 숨었나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 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나와 나의 관계가 깨져버렸습니다. 니가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당신이 만들어준 여인이 먹으라 그래서 먹었습니다. 가족 공동체가 깨져버렸습니다. 핑계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교제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말았습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아담을 유혹하여 공동체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적 본질을 인간으로부터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에게만 역사 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아담의 자녀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렸습니다. 가인과 그 재물은 열납 받지 못했고 아벨과 그 재물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서 시기심이 불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쟁대상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만 없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 이니이까? 그렇습니다. 형은 동생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는 형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세워주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가도록 하나님께서 가정을 고안해 주셨는데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 이니이까? 공동체를 버린 것입니다.
공동체는 언제나 사탄의 공격과 증오,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관계, 교제, 공동체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탄의 계속되는 작전을 보십시오. 그 가인의 후예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기록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도시를 건설했다. 야발은 육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두발가인은 철로 기구를 만들었다. 라멕은 두 사람을 죽인 미친 살인자가 되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가인의 후예들을 살펴보면, 공동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가 중요하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관계와 교제, 공동체 위에 세우도록 고안하셨는데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성취 위에, 업적 위에, 다른 성도들과의 경쟁관계 위에, 자신의 인생을 세우도록 사탄은 우리를 속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탄의 일은 바로 개인주의와 성취감이란 무기를 가지고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가족인 아담과 셋의 후예들을 살펴보면 그저 누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 무슨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은 전혀 기록에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셋은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에노스는 90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게난은 91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무드셀라는 96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마지막으로 에녹은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 가셨다.
무슨 얘기입니까? 구원의 후손들은 얼마나 하나님과 오랫동안 동행하며 살았는지가 중요하게 나타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 무슨 업적을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오랫동안 동행했느냐? 하나님과 어떤 교제관계, 어떤 관계속에서 살아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교통을 나누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삶은 소중한 것입니다.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일생은 우리의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하나님과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의 삶은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노력과 범죄함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끊임없는 인간의 이야기가 가득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공동체가 파괴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민들을 공동체로 만들기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갈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때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포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해 논 공동체를 영원히 이어지는 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가정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담의 옆구리가 터진 다음에야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터지고 피 흐른 다음에야 그 피 위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IV. 교회라는 공동체
범죄하는 자리는 공동체가 파괴되어진 자리요, 용서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 가족은 영원히 더불어 함께 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베소서 2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고 얘기했습니다.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손님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경꾼 신앙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중심에 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속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네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가족의 일원이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보면 이 집은 오이코스 - 이 가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가 이제는 자명해 졌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소망교회가 하나님의 가족, 진정한 공동체로 나아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선언하고 다짐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소망교회는 가족이다. 우리 셀목장은 공동체다. 선언하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서 성도들의 할 일도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세워 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목사가 존재하고 집사 장로가 존재하고 성도들이 존재하는가?
에베소서 4장 12절에 보면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들을 잘 훈련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되게 하는데 목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사역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공동체를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가족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덕을 세우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덕을 세운다고 그러니까 인격적인 향기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오이코도메오라는 말 - 이것은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는 얘기입니다. 공동체를 세운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끊임없이 세워 간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교회 일원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받고도 여전히 내가 이 땅에 더욱더 행복한 삶을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직장을 가지고 내 가정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가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 19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고전 14장 12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살전 5장 11절 "그러므로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고전 14장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수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그 은사들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 건강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몸 -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내가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내 집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공동체로 세우기 위하여 흔쾌히 내어놓았고 그 집에 아름다운 셀목장 하나를 세우는 것이 그들 인생의 목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얼마나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 힘 쓰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어떤 성취를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얼마만큼 주님의 몸을 세웠느냐 공동체를 세웠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내게 물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시험 들지 않게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온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나 교우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존경하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결혼 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부부가 서로 가까이 하지 말고 따로 사는 것이 좋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지만 서로가 갈등을 느낄 수 있다. 부부싸움 할 수 있다. 아픔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한 방에 잠을 자서도 안되고, 함께 밥을 먹어서도 안되고, 한 집에 살아서도 안된다. 우리 떨어져서 살자 하는 것과 뭐가 다를 게 있습니까? 우리는 가족입니다.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건강이란 것은 질병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요소가 내게 침범해 온다할지라도 그것을 퇴치하고 해결하는 자생력이 내게 있을 때 그것을 건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여 자녀 낳고 한 집에 산다고 우연히 요술적으로 마술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는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예술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우연히 공동체가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헌신하지 않아도 충성하지 않아도 아무런 노력이 없어도 요술적으로 마술적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듯이 우리가 함께 애를 쓸 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눈물 흘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피흘려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그 교회가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장되어지고 성숙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교제란 기쁨을 연상케 하는 식탁이나 잔치와 관련된 일들로 여러분들이 연상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코이노니아는 잔치나 기쁨의 차원을 넘어서서 성도들이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얘깋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교제라고 번역하지만 참여라고도 번역한 것입니다.
V. 당당히 댓가를 지불하라
공동체가 무너진 곳에서 그토록 소중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소중한 헌신과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비젼이 임하면 우리는 그 비젼을 위해 미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이 일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오염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원하는 교회 하나님 나라된 환상, 공동체적인 비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에 마지막 때가 되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이고,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사람들의 눈이 열려져서 공동체에 대한 비젼과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구약은 우리에게 예언하고 있고 신약은 그런 비젼으로 충만되어져 있습니다.
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가 아직도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는 무력한 집단으로 남아있는 것입니까?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기독교 안에 「오사마 빈 라덴」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이미 1998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인물입니다. 모슬렘권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는 그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그토록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일찍이 세계가 주목했던 인물입니다.
그 이유를 사가들은 그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알라신을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알라신을 거스리는 모든 세력과 싸워 이기는 것이 내 인생의 사명이다. 사명 선언문을 그렇게 두었습니다. 모슬렘의 투쟁신학, 행동신학을 완성한 모슬렘 신학자입니다.
두 번째, 열정적인 행동가입니다. 그와 함께 알라신을 위해 언제든지 목숨을 흔쾌히 바칠 준비가 된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공동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순종, 즉각적인 순종을 맹세한 행동대원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모로부터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재산에 한푼까지도 알라신을 위해서 쓰겠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무섭게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 엄청난 재산을 언제든지 흔쾌히 모두를 그가 믿는 신을 위해 내어놓을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 그는 사실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키운 인물이지만 미국에게 굴종하거나 미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미국의 미움을 샀던 인물이었지요. 걸프전에서 미국군인들이 신발을 벗지 않고 이슬람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반미운동을 펼쳤습니다. 오직 모슬렘과 알라신만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한다고 외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물질적 헌신, 그의 몸을 바치는 충성, 그의 불같은 열정이 오늘 기독교들에겐 없습니다. 그들은 악한 방법을 위해서 자기 종교, 잘못된 종교예식을 위해서 잘못된 신 의식을 위해서 신개념을 위해서 그의 생애를 바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종말의 심판자가 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이 그 많은 헌신자들이 우리 기독교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종교학 교수는 무당과 신분을 비교 연구하고 그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사제들이 무당만큼이라도 자기 신에게 신실하고 충성한다면 세상은 이미 바뀌어져 있을 것이다. 미신을 믿는 것만큼 만이라도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신도들이 믿고 따랐다면 그들은 기적을 맛보았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 참된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역설했습니다.
어떤 어린이 하나가 마당에서 뛰어 노는데 점심시간이 지나갈 동안 열심히 뛰어놀다가 달려들어왔습니다. “엄마 나 배가 아파요.” “어~ 속이 비어서 그렇다. 밥 먹으렴.” 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왔습니다. 마침 그 엄마는 밖에 나가서 없고 그 아이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조용히 기다리시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목사님이 오늘 머리가 아프단다. 집에 갔다가 다음에 오마.” 아이가 대답합니다.“목사님 다음에 오세요. 목사님 머리가 비어서 그래요.”
우리공동체가 이토록 아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이토록 아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 있어야 할 사랑과 헌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섬김과 돌봐줌과 세워줌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기를 원했던 기독교 기초 공동체!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물질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것 - 내 생애를 헌신할 가치가 있습니다.
VI. 하나님은 공동체의 창시자, 양육자, 보상자
오늘날 도시화, 교회의 대형화, 잦은 이사로 인한 교회 멤버들의 변경 등은 교회내 「군종속의 고독」을 낳았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대형화는 익명성을 바라는 젊잖은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나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조용히 침묵의 방에 혼자 있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을 걸어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가 성도를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이 모임이 있을 때 주님께서 이곳에 함께 임재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성도를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분을 만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창설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할 때에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리더 세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보면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리더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그 리더에게 비젼을 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게 비젼을 주시고 그 비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만들고 그 비젼을 이루어 가심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갱단의 한 사람으로 살다가 라디오를 통해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어 목사가 된 보스톤 한 공동체의 지도자 유진 리버스(Eugene Rivers)의 글 가운데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폭력배 세계 만큼이라도 충성과 헌신, 결속과 의리가 있다면 세상은 금방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확산자이십니다. 본문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손을 뻗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만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세상을 향하여 그 복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손을 뻗기 위해서입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우리가 한 손으로 공동체를 붙들고 한 손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한 손으로 세상을 향하여 뻗을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보상자이십니다. 우리의 비젼은 주님께서 그토록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 셀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주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애인이요 신부된 교회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순결한 신부, 복된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우리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소개할 것입니다. “아버지, 제 신부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신부입니까? 참 멋지지요. 내가 그렇게 기대했던 신부의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공동체, 아름다운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한소망교회를 어떤 공동체로 만들었느냐. 이 교회를 어떤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심판의 바로메타, 보상의 바로메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각 가정에서 셀교회를 섬기고, 여러분이 섬긴 셀교회가 어떤 모습을 갖출 것이냐 하나님의 심판대, 영원한 상급의 바로메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의 가족 여러분!
내가 셀목장 하나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그것, 그 목장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충성, 그 모든 것들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가치가 있는 사역입니다. 주님이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소그룹을 아직까지 체험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셀목장에 참여하십시오. 셀목장이 무엇인지 모르신다구요?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나 아니면 교역자들에게 요청하십시오. 여러분을 가장 적절한 장소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리더가 되십시오. 공동체의 리더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리더가 되는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많은 사역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한 사역들을 주셔서 우리교회에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사역 가운데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없애도 좋다고 한다고 하면 예배와 셀목장만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 하나만 남기라. 목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장로님이나 제직회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남선교회, 여전도회는 필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사역이 다 없어져도 마지막 사역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셀목장하고 셀목장의 리더만 남기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꿈을 꾸어야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지역사회에서 셀공동체를 세우십시오. 그 공동체의 리더가 되는 꿈과 환상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성경의 원리입니다. 셀목장, 교회를 복된 공동체로 함께 만들어 가는 멋진 꿈을 꾸십시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셀목장의 리더로 부르시고 또 공동체를 세우도록 여러분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모두 함께 일어나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미 셀목장의 리더로서 섬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여기시사 이토록 멋진 사역을 제게 주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기회가 되십시오.
아직 셀목장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 제게 비젼을 주셔서 주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내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상처받았을 때에 나를 붙들어 줄 수 아름다운 공동체를 내게 보여 주십시오. 요청하십시오.
셀목장에 참여하시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게도 리더가 되는 비젼을 주십시오. 저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멋진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을, 공동체를 세우는 환상을, 능력을, 비젼을 내게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십니까? 직장에서 우리 마을에서 나를 어떤 공동체로 세워가도록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까? 그 공동체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은사를 더듬어 보십시오. 삶의 환경을 더듬어 보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서 그 비젼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다 각자 다름대로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음성을 듣는 데에 예민하십시오. 주님 앞에 요청하십시오. 주님 제게 눈을 열어 주십시오. 비젼을 주십시오. 환상을 주십시오. 성령을 내게 내려 주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