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만일 예루살렘이 2001-12-25 20:29:15 read : 1685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마 23: 37∼39
오늘 말씀은 고난주간의 월요일 아니면 화요일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두
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라고 하신 것은 그로부터 이삼일 뒤에 일
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선지자들을 죽이려하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려 하는 자여" 이렇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 비통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아" 한 번 부르지 않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두 번 부르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서울을 보실 때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실 것이 분명합니다.
"서울아, 서울아, 서울아, 네가 십자가가 제일 많이 보이는 도시가 되게 하였거늘 제일 혼잡
하고 범죄와 타락이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도다"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교회들을 보실 때 더욱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교회여, 교회여, 교회여, 제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한국의 교회들이여, 네가 너희를 부흥
하게 하고 수가 많아지게 하였거늘 너희는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일들로 나의 이름을 더
럽히고 있도다"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게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안타까워하시지 않고 "아무개여, 나를 잘 믿고 나의 말을 따르려
하는 자여, 병아리가 암탉을 의지하는 것 같이 내 품안에 거하는 자여" 이렇게 칭찬하며
기뻐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임으로 반역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주받은 도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38절의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그대로 이루
어집니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24장 1절에 있는 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
기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복음 아래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로 모으려고 했는데 예루살렘은 모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로마라는
사나운 독수리에게 채어가서 갈기갈기 찢어짐을 당한 것입니다.
그 뒤에 예루살렘은 1900년 가까이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임으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선민
의 영광을 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랍과 분쟁 가운데
있어서 총소리가 자주 들리는 곳이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버린 유대인
을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일 년에
한 사람을 회심시켰다면 많은 일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본문 가운데 39절의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
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
니다.
선교 전문가들은 복음운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로마, 유럽, 미국, 한국을 거쳐 지금 사
회주의권인 중국에서 왕성한데 다음은 회교권,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유대교권인 팔레스타
인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그 때까지 예루살렘 주민들은 복음에 접하지 못할 것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이 이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계속해서 변함없이 환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체포당해 재판을 받을 때 빌라도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만일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입니다. 그 분
은 죄가 없습니다. 그 분을 석방해 주세요. 우리가 계속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소망입니다."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정을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으면 예루살렘의 운명이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
니다.
예루살렘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비참한 일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오늘의 워싱턴이나 뉴욕, 북경 같이 세계 중심의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니느웨의 일을 통해서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사십 일이 지나면 무너지게 되어있던 도시였습니
다.
그러나 요나가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운동이 일어나서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일을 통해서도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리는 민족반역자로 취급받았는
데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더 큰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거리에 나갈 때 누군가가 숨
어서 던지는 돌에 맞은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회당에 보낼 때 요즘 일부 사람들
이 하는 것처럼 경호원을 고용했을 지도 모릅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더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자이지만 소외감에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셨습니다. 삭개오는 "흥, 그 사나이가 이 곳에 왜 오는 거야? 와서
는 내게 불리한 소리를 하겠지!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소리를 하겠지! 그 사람이 다녀가면
사람들이 나를 더 못 살게 굴겠지!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운동을 일어날지도 몰라! 나, 모르
는 척 해야겠네! 당분간 어디 다녀와야겠네!" 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삭개오는 계속해서 소외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열심당을
비롯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세리를 암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삭개오도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새로운 삶을 서약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만일 예루살렘이"인데 이것을 "만일 한국이"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19세기말에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한국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만일 이 때
우리 나라가 복음을 거부하거나 미온적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식목일에 가족과 함께 민속촌에 다녀왔습니다. 막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민속과
관계된 곳을 찾아서 소감을 써라" 이런 숙제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민속촌을 돌아보면서 "만일 우리 나라가 복음을 거부했거나 미온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이런
생활이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민속이라는 것, 과거의 것으로 생각하고 보면 정답고 흥미 있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그렇
게 살라고 하면 모두 기겁을 할 것입니다.
중국 연변지역에 우리 풍습이 원형 그대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 그대로 보존되었
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거기 살고 있는 동포들, 화를 냅니다. "우리 보고 영원한 민속촌이
되란 말이오?"
"만일 평양이" 이렇게 바꾸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평양은 교회가 아주 많던 곳이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도 평양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경우는 신학교가 서울에 있지 않고 평양에 있었습니다.
일본이 기독교의 세력을 꺾으려고 할 때 평양의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1938년
에 장로교 제27차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일제는 총회 대표들을 협박해서 "교회는 앞장
서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합니다"이런 결의를 하게 했습니다.
"만일 평양의 교회들이 그 때 결사적으로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가져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날 평양이 저렇게 붉은 도시가 되어버린 것과 그 일이
상관없을까?' 가끔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환영했다가 그 다음에 배반했습니다.
만일 배반하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환영하고 순종했더라면 예루살렘은 축복 받은 도시가 되
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들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전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것처럼 채찍으로 사람들을 내쫓
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
는도다"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셨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내 마음이
평화스러워야 하고 내 주변이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삭개오는 그 뒤 결심한 것이 흔들리려고 할 때, 믿음이 약해질 때, 유혹을 받
을 때,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만일 예전 생활로 돌아갔다면
삭개오의 회심은 무익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삭개오는 혼자서 몰래 자기가 올라갔던 뽕나무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뽕나무를
어루만지면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살리고 변함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를 것을 다
짐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어려울 때 도와주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합니다.
담임목사실 벽에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소박한 십자가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예전 주차장
자리에 참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습니다. 성전건축 공사를 할 때 그 밑에서 쓰레기를 태우
는데 불이 나무에 옮겨 붙어서 나무가 시커멓게 탔습니다. 그 때 공사가 중단되고 너무 어
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속도 그 나무처럼 시커멓게 탔을 것입니다.
그 나무가 죽은 줄 알았는데 봄이 되니까 잎이 파랗게 나고 왕성하게 살아났습니다. 타죽은
줄 알았던 나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런 것에서
도 위로를 구할 만큼 절박했습니다. 내력을 아는 분들이 그 나무를 "부활한 나무"라고들 불
렀습니다. '하나님, 저 나무처럼 공사도 재개되게 해 주시고 목양교회도 무성하게 해 주세요
' 기도했습니다.
참나무들이 있던 자리를 포장하게 되어 참 나무를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의 가지를 가지
고 십자가를 만들어서 벽에 걸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 때의 기도를 생각하고 그렇
게 큰 위기에서 도와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간이 나면 이 일을
소재로 수필을 하나 쓰려고 하는데 제목을 "참나무의 참 부활" 또는 "뽕나무와 참나무"는
둘 가운데 하나로 하려고 합니다.
이제 여기서 목양성서대학도 열리고 목양문화원도 개원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좋은 교육관을 주셔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오늘 예수님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며 이 말씀을 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안타까워
하실 것입니다. 아니 더 안타까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고, 지금 교회가 그렇게 많고, 선교 매
체들이 그렇게 많고 복음에 접할 기회가 그렇게 많건마는 마음을 열지 않는 자여, 네가 어
찌 되려느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 열심히 하
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오늘 예수님은 믿기는 믿으나 열심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며 이 말씀을 하실 때와 마찬
가지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아니 더 안타까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개여, 아무개여, 내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
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했거늘 네가 언제까지 미지근하려느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실 것입
니다.
"아무개여, 아무개여 내가 너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었거늘 너는 그 직분을 제대로 수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이렇게 하려느냐?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소리를 들으
려느냐?" 하면서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뜨거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충
성스러운 종들이 되어야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혹시 주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를 보며 안타까워 하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목양교회여, 목양교회여 내가 40년 전에 너희 교회를 세우고 40년을 인도하였고 새 역사를
이룩하라고 이 곳으로 인도하였건만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모릅니다. 우리는 계속 이대로 있겠습니다" 대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종려주일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이 예루살렘이 되어 예수님을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심히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흔들어야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흔들어야합니다.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과 같이 황폐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축복 받고 번영하는 내가 되
고, 우리 가정이 되고, 우리 교회가 되고, 우리 나라가 되도록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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