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4:9-10
일시: 5/27/01(주일 낮)
-------------------
이 세상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어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다이아몬드 회원>이 되었다고 회원증을 보내 왔습니다. 그것을 받고 지갑에 그냥 넣어 두었는데, 지난 번 서울 갔다가 갑자기 일찍 올 일이 있어서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약시 이름만 대니까 알아서 척척 예약을 해주고, 비행기 타기 전에 표를 끊는데 알아서 편안한 자리에 배정해 주었습니다. VIP 대접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 동안 많이 이용했다고 주는 특전이었습니다만, 어찌되었건 귀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존귀한 사람이 하나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야베스입니다.
존귀한 자 야베스
야베스라는 인물을 살펴봅시다. 9절에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왜 야베스를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을까요?
1. 노력하는 사람이었기에 존귀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역대상 2장 55절에 보면 "야베스에 거한 서기관 족속 곧 디랏 족속과 시므앗 족속과 수갓 족속이니 이는 다 레갑의 집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족속이더라"고 해했습니다. 여기서는 야베스가 지명으로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곳에 서기관 족속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야베스란 곳은 야베스의 이름을 딴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 직은 자손 대대로 계승되었는데, 서기관이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율법을 필사하며, 율법을 해석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볼 때 야베스는 학식에도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문은 꾸준한 사람이 하는 겁니다. 머리; 좋다고 학문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은 궁둥이가 무거워야 공부한다고 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성실하게 한 우물만을 파야 합니다. 또 옛날에는 학문이 깊은 사람이란 곧 덕(德)을 갖춘 사람을 뜻하였습니다. 단순히 많은 걸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존경받는 퇴계나 율곡 선생 같은 분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학문에 있어서 당시 제 1인자였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 門下에서 배웠습니다. 목회자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신학이 뭐가 필요한가"하며 학문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목회자는 신학자여야 하고 심리학자여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학문으로 목회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꾸준히 노력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난주간 저는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로 있었던 이 현호 목사의 전화였습니다. 미국 비자 인터뷰에 통과했다고... 그 동안 유학을 가라고 제가 적극 권유했었는데, 드디어 유학의 길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더니 결실을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야베스를 존귀한 자라고 한 것도 그가 늘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하며 주의 뜻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귀하게 써 주시는 것입니다.
2.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기에 존귀한 자라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존귀한 자란 옛날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에는 학식이 뛰어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세상이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을 잘 읽어보면 야베스가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라고 인정받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훌륭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봐도 교인들 중에 귀하게 여겨지는 분들은 믿음이 좋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정말 품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있거나 재물이 풍부하거나, 많이 배웠다고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는 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도 그렇고, 성도들이 볼 때도 훌륭하고 존귀한 분들입니다. 시편 16:3에 보면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늘 깨어 간구하며, 매일 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자기 능력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부족한 죄인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며 늘 엎드려서 주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늘 주 앞에서 겸손하게 삽니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허둥대지 아니하고, 꿋꿋한 모습을 보입니다. 누가 보아도 이런 사람은 멋있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늘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살피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제목
야베스는 제목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제목을 가지고 매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제목은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1.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복을 약속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또 1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이 말씀대로 여러분이 단순히 복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복을 전해 주는 채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신명기 1장 11절에 보면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백 배의 축복이 아닙니다. 천 배나 많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 복을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녀된 이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이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다른 그 누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복이 어떤 자에게 임하는 것일까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다"(시편 144:1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하나님께 무릎꿇고 항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어서는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나는 주의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나에게 임하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한 사람이 야베스입니다. 이것은 매일 마다 튼튼하고 강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나라도 날마다 든든해 져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은 큰 믿음을 구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큰 믿음이란 큰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50년 후, 100년 후의 꿈을 가지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전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란 다른 말로 꿈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넘어졌다 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이 비전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교회의 선교의 터가 넓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인물을 기르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개척 교회를 시작하는 것보다, 아니면 교회를 크게 확장하는 것 보다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매일 마다 비전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달라져 보일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금방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헛된 망상이나 몽상을 가진 것도, 아니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상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확실한 꿈을 가지고 모든 시련을 이겼습니다. 우리도 삶의 지경이 넓혀지는 꿈을 꿉시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꿈을 꿉시다.
좀 더 편안하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꿈꿉시다.
주님의 교회의 지경이 더욱 넓어져서 선교와 봉사와 교육이 활성화되는 꿈을 갖고 기도합시다.
병들고 약한 몸이 더욱 강건해 지고, 매일 마다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사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 봅시다.
3.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모든 사람이 드리고 싶은 기도일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근심에 눌려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시련과 고통과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것이 닥쳐올 때, 대개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거나 아예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시편 시인은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31:9)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우리가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 고통에서 건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걱정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한다고 일이 더 잘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근심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때, 주님의 평안이 고요히 자리잡게 됩니다. 그때 근심이 사라집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는 말씀을 기억하며, 이 시간 어떤 문제 가운데서도 기도하며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립시다.
야베스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 이제부터 믿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존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