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보기도의 핵심(1) 2001-12-28 13:59:01 read : 189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골로새 1:9-10
일시: 7/15/2001(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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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本格的)인 휴가(休暇)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 강릉 경포 해수욕장도 며칠 전에 개장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한 낮의 온도가 강릉이 전국 최고입니다. 섭씨 34도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뜨거운 햇빛이 내려 쪼이는 무더운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지내다 보면 일의 능률도 잘 안 오를 뿐더러 몸이 쉽게 피곤해지기 마련입니다. 주말(週末)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나 강, 또는 산으로 다 나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한 여름에는 교회 출석률이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평소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나와 뜨겁게 기도하는 걸 보고 흐뭇했습니다. 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생활을 중단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하나님과 교통(交通)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과 연속적(連續的)으로 교통하는 생활을 통해서 영적(靈的)으로 활력을 얻고, 또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맞이하시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고 계시기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기도하면,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으로 교통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살펴보면, 역시 기도생활을 바르게 하는 신자(信者)가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하고, 또 영적으로 건강한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은 신앙생활의 척도라고 저는 봅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무조건 오래 한다고 꼭 그 사람이 모범적인 신앙인(信仰人)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왜곡된 신앙을 가진 이들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나, 분노나, 혹은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속에 그러한 악한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이 한 군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보면, 이럼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제단(祭壇)에 제물(祭物)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怨恨)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물론 이 말씀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다가, 누구하고 불화(不和)한 것이 생각나면 얼른 그 사람에게 가서 악수라도 하고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악한 생각을 품고 기도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중보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중보 기도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욕조(浴槽)와 같아서 개개인이 날마다 들어가야 하는 곳이며 교제(交際)가 다 이루어 져야 할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중보 기도의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여호수아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순간 그의 두 보좌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중보 기도를 한 것입니다. 모세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기도했는데, 그도 인간인지라 피곤해서 팔이 내려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두 팔을 아론과 훌이 해가 질 때가지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중보 기도는 제사장(祭司長) 적인 사역(使役)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보 기도를 통해서 제사장적인 신성한 의무와 특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중보 기도 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일 중보기도 사역을 통해 많은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중보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9절에 보면,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믿고, 온 힘을 다해 그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그저 나의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판단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허무한 생각도 들고, 또 그런 일은 100%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평소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무렇게나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헬라 원어(原語)로 '소피아'(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물의 이치(理致)를 살필 때에 그것의 관계와 목적을 잘 이해하는 통찰력(洞察力)을 가리킵니다. 또 <총명>이란 말은 헬라어로 '쉬네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편적 사리(事理)를 바로 보아 아는 판별력(判別力)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이 제일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혜와 총명이 있을 때 바른 통찰력이 생기고, 또 판단을 잘 할 수 있으며, 이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왕이 되자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지혜를 받아서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혜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는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타이릅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 가지고서는 부족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한 중보기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우리 아이들에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까? 그래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정말 어긋난 길로 가지 않고 매일 마다 생명수가 풍성하고 주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복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대개 70-80년쯤 사는데, 이렇게 짧은 생을 살면서, 사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성도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하나님이 주시는 바른 통찰력과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달아 모두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범사(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10절 앞부분에 보면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께 합당히 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엡 4:1) 또는 "복음의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빌 1:27)을 뜻합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이 세상에서 합당(合當)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망나니처럼, 제 멋대로 살아 교회와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들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녀가 되기를 다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부모 된 이들이 속상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 보호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그 자리는 노약자가 앉도록 되어있고, "이 좌석은 노약자석이니 양보하라"는 글귀가 쓰여 있고, 또 가끔 안내 방송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이 들어와도 떡 버티고 앉아 일어설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 부모를 욕 먹이고 있다는 걸 모르나 봅니다. 주위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주어도 눈을 딱 감고 모른 척 하고 뻔뻔하게 앉아 있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이가 노약자 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전철 안이 꽤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가 어떤 역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노약자 석에 어떤 젊은이가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들고있던 신문지를 말아서 다짜고짜로 "네 이놈! 어서 일어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엉겁결에 얻어맞고서야 아무 말도 못하고 저쪽으로 피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제 서야 "뉘 집 자식인지... 원 참... " 하고 한 마디씩 다 내 뱉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똑같은 일이 있었던 일이 아니고, 제가 한번 상상해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식이 잘못하면 자기 부모까지 욕을 먹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 된 우리가 믿음으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절에 보면,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서 배운 대로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또 디모데 후서 2장 4절에는 "군사로 다니는 자는 ...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즉 "나는 지금 성도로서 바르고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힘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10절 하반 절에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 옛날에 과수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복숭아와 배나무를 주로 심었는데 과수원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몇 년이 되어서야 수고한 결과 열매가 맺히는데, 어떤 나무는 아무리 수고해도 쓸모 있는 열매가 별로 없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아주 속상합니다. 우리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마땅히 선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영적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고, 인격적·영적으로 성장하지도 않는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큰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교회 왔다갔다한 것입니다. 성전 문만 밟고 다닌 것입니다. 남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런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걸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나중에 심판 주(主)로 오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느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았느냐를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선한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얼마나 우리가 인격적·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우리 주님은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無條件) 성공(成功)하고 또 무엇을 많이 성취(成就)하려고 하기보다는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노력을 부단히 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충만(充滿)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외적인 것을 성취(成就)하고 소유(所有)하려 하기 전에,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 즉 인격적(人格的)·영적(靈的)으로 성숙(成熟)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충만(充滿)한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위해 힘써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주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주와 같이 되기를>(찬송 508장)이란 찬송 시(詩)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와 같이 되기를 내가 항상 원하니 온유하고 겸손한 주의 마음 줍소서. 세상에 서 우리가 나그네로 있을 때 주의 형상 닮아서 살아가게 합소서(1절)
주와 같이 되기를 내가 항상 원하니 평화로운 주 곁에 편히 쉬게 합소서. 주 은혜로 거듭나 말씀 위에 굳게 서 영원무궁하도록 주와 함께 살리라(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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