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2001-12-28 20:36:56 read : 184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시119:33-40
인도의 교육학자 케일리 여사는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이 있다"라고 말했
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자처하
지만,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은 배우러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귀한 진리가 있을 때에는 이것을 남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더 많은
사람이 알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그 아는 것마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가 현대
인의 정신적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배운다는 것도 항상 배울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배울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를 놓치면 배울 길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놓
치면 가르치지도 못합니다. 행한다는 것도 언제나 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게 주어지는
기회가 있을 때에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어리석음, 이것이 곧
죄악인 것입니다.
인격 형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연적인 변화가 있고, 개척적
변화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이 나이가 먹고 몸이 자라면 그에 따라서 지식도 자라고,
생각도 자라고, 경험도 자라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사건에 부딪치면 따로이 공부를 안해
도 알만큼은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통해서 압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공
부를 통해 배워서 내 마음속에서, 내 인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몸이 먼저 가는 것은 자연적 변화요, 정신이 먼저 가는 것이 교육입니다. 경험이 먼저 가
는 것은 물리적이고 동물적인 것이요, 지혜가 먼저 가는 것이 교육입니다. 배운 바 인격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내적 성장이 있는가 하면 외적 성장이 있습니다. 또 지식의 성장이 있는
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안다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이 형성되어야 합
니다.
조금더 나아가서 성품의 성장이 있습니다. 사람됨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인
격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인생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이 될 것이냐, 얼마나 성장했느냐, 그리고 얼마나 잃었느냐 하는 문제 자체보
다도 그 문제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가 일류
학교에 갔느냐 삼류 학교에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학교 어느 학과를 공부하더
라도 공부하는 자세가 훌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뒤늦게 인생을
뒤돌아볼 때, 양심에 가장 괴로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어떤 자세로 살아 왔느
냐고 하는 그 문제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심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
을 하든지 몸가짐과 마음 자세와 그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본 자세가 바로되지 않고
는 아무 것도 바로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자기가 하는 일에 기본
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과학하는 사람에게도 과학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이 이룩한 기계 문명 속에 살아갑니다마는 과거의 미신적인
문화권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과학과 미신의 혼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이 따로 따로 되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믿는 것은 대단합
니다. 그런데 아는 것은 없습니다. 흔히들 이 날은 좋은 날이다, 저 날은 손 있는 날이다 그
러는데, 이 날은 왜 좋고 저 날은 왜 나쁘냐 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입니
다. 믿는 것만 있습니다. 아직도 길가에 트럭을 세워놓고 그 앞에 제삿상을 차려서 올해에도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비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 만들어 놓은 기계 앞에서 과
학하는 자세는 어디 가고 요행을 바라는 사행적인 자세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
입니다. 좌우간 믿는 것은 대단합니다. 철학하는 사람에게는 깊이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이
해하는 철학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교적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외길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직업도 바꾸지
않고, 생각도 바꾸지 않고, 전공도 바꾸지 않고, 한 번 시작한 것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들입
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런데 궤도 수정을 자주해서 이런 직업을 택했다가, 이런
전공을 택했다가,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몇 번 수정하고 나면 성숙할 겨를이 없습
니다. 시간이 모자랍니다.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방향이 정해
지고, 모델이 정해지고,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목적 변경 없이 그대로 일생을 사는 것, 거기
에 성장이 있습니다. 방황하는 생활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안정이 없는 생활에는 경제고 정
치고 무엇이고 간에 어떤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에게도 신앙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에는 경건한 예배의 자세가
있고, 봉사할 때에는 성실히 봉사하는 봉사의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시간은 말씀을 통해 나
와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배가 예배되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교회에 나오는 마음부터 시작해
서 이 자리에 앉기까지 그 자세가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의 기본 자세가 흐트러
진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까? 성공에는 반드시 그 성
공적 동기가 있습니다. 그 성공적 동기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바로 성공적 자세입니다. 어느
직장이든 어느 시간이든 자세가 분명한 사람에게는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신앙적으로 가장 성공한 기본적인 자세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
고 있습니다. 그의 자세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기도 속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습
니다. 다윗의 자세를 살펴보기 전에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범적인 신앙인을 먼저 생각
해 봅니다.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으로 로마 군인입니다. 그는 하나
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으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베드로를 모셔오게 됩니다. 온 식구와 친
척들을 다 모아놓고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나타나니 그 앞에 가서 꿇어 엎드
려 경배를 했습니다. 물론 그의 경배는 베드로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이
지만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너무 송구스러워서 그
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황송해했습니다. 고넬료의 자세에 가식이 있고
위선이 있거나 다소라도 흐트러짐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겠습니까? 그의 태도가 경건했고 진
실했기에 베드로는 규례를 어기고 이방인인 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세례까지 베풀었
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뒤늦게 설명하고 있
습니다. 아무튼 고넬료의 자세는 베드로로 하여금 규례까지 어기면서 세례를 베풀도록 감동
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무릎을 끓으면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바로 이 말씀 듣는 자세야말로 큰 축복이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
각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바른 자세를 그의 기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배우는 자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33절) 율례의 도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이것을 가르쳐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난날의 자신의 실패를 저지른 것이 몰랐기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 사건이 얼마
나 무서운 것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
까?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도 꼭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그 때
에 그 일이 얼마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
서 하신 말씀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몰라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떠들어 보아도 그
렇게 잘못된 일인 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구하기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점점 더 우매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잘
듣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만이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등 모두를 잘
안다고 떠들면 인간 관계는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본 자세는 배우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겸손한 생각으로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배우는 마음은 아름다운 자세입니
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해서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로 말을
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듣는 자세로 바꾸어야 합니다. 항상 먼저 말하는 편이었습니까?
이제는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가서 말하는 자세로 바꾸는 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쉽게 안다고 말하지 말고, 쉽게 비판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심판주 노릇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
나 배우는 자세로, 인내하는 자세로 사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듣
기 전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다 듣고도 잘 모르는데, 미리
짐작하고 서둘러서 저지르는 실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바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
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번 듣고 또 생각하고 또 듣고 듣는 겸
손하게 배우는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찬미하며
떡을 떼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늘 배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
심코 넘기기 쉬운 배웠다는 말에 좀더 신경을 쓰고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낼 수 있
습니다. 그 당시 배우는 자와 가르친 자가 누구였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고,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갈릴리 어부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제대로 공부한 사
람들이 아닌 무식한 사람들인데,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성
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오늘날은 배우겠다는 사람보
다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서 걱정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생동안 계속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
키리이다"(34절) 깨달음이 없이는 지식이 제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으로 배
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생각하여 이치를 따져가며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며, 몸으로 부딪쳐서 배우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때론 뭔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건으로 부딪쳐 보면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은 역설적입니
다. 이치와는 상관없이 내가 직접 부딪쳐 보고 경험한 순간에 알게 되니, 깨달음이란 자기
중심적인 아집이 깨어지고서야 얻어지는 새로운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리
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따져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임으로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내게 시련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고 질병도 주셔서 어떤 사건이든간에 부딪쳐서 나로 하여금 어리석고 복잡한 생각은 다 지워버리고 순수한 진리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셋째,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
함이니이다"(35절) 첩경이란 영어로 하이웨이로서, 고속도로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은 정말 길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우리 마음의 길이 좋아야 합
니다. 마음속에 첩경이 있어서 말씀을 듣자마자 거침없이 그대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장애물
이 많아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령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미
이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주의 말씀이 내게 직행해서 바로 들어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이 말을 좀더 깊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다시 배우고 경험하고 실패하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습
니다. 아무리 결심해 보고 맹세해 보았자 헛된 일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강권
적으로 역사하셔서 행하도록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나의 지식과 의지와 마음은 믿을 것이
못됨을 인정하오니 하나님께서 때려서라도 인도하시고 꺾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시어,
주의 길 외에는 가지 말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
유를 하나님께 헌납하는 강한 기도입니다.
제임스 디 멜로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
신에 대해서 고백합니다. "젊었을 때에 나는 혁명가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
는 항상 이런 것이었다. '주여,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옵소서. 세상을 한번 바꾸어놓아야겠습
니다. 그럴 수 잇는 힘을 주세요.' 시간이 흘러, 중년에 이른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러갔음을 깨닫고 기도를 바꾸었다. '주여,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세상이 아니라 다만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세요.'
그후, 좀더 나이가 들자 이렇게 기도를 했다.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내가 만족해야 되겠
나이다.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러나 나 자신이 늙고, 앞으로 얼마 안남은 여생을 헤
아리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나의 우둔함을 깨달았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까?'하고 나 자신을 꾸짖는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저희에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기도가 진작에 이러했더라면 나의 일생
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이런 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 여러분은 지금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위의 기도 중 어느 시점에 있습니까? 여러분,
참된 행복이 무엇입니까? 참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은 존 뉴턴이라는 목사님이 지으신 노래입니다. 그는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백인들에게 파는 노예 상인으로, 못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
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 중생하고 나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
라는 귀한 가사를 만들어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함께 은혜를 나누던 한 성도가 뉴턴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에 하
나님께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뉴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해 주시기를 요구하겠습니다."라고 놀라운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도 아시고 나의 약함도 아시며 나
의 미래까지도 아시니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기를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절대적 필
요성을 하나님께 반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기쁨이란 비 기독교인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도 믿
음이 없는 사람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괴로워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습
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소원이
바로 내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바로 내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여기
시는 그것이 바로 내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생각하십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
도가 느껴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얼마만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주어진 자유를 그대로 하
나님께 반납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것으로 은
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생애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의지로 살아가려고 애를 썼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실패하고 이지러진 모습으로 살아왔
습니까? 이제 그만 중단하고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즉 겸손히 배우는 자세,
공손하게 순종하는 자세, 그리고 나의 의지, 지성, 감정을 다 하나님께 헌납하고 전적으로
주의 뜻에 헌신하는 자세로 새롭게 출발해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보
장해 주시고 새로운 은혜, 새로운 역사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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