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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2001-12-28 20:39:53   read : 201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고전4:14-17


    이 세상에는 다음 세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미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땀흘리
    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먹을 것을 구하는 기생충 같은 인생입니다.
    둘째는 개미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셋째는 꿀벌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개미처럼 부지런할 뿐 아니라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
    며 열매를 맺게 하고 꿀을 날라줍니다. 말하자면 자신보다 사람을 위해 살고 세상에 광명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이웃과 사회에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이 얼마나 보람
    된 삶이겠습니까? 요즘 우리는 이 사회가 어둡다, 썩었다 등등 말을 많이 합니다. 정말 지도
    층 인사들이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하며 본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는 참 부럽기도 하고 또 어찌 생각하면 너무나도 높게만 느껴지는 한마
    디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누구를 향
    해서 '나를 닮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닮을까봐 걱정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제발 이런 것은 안닮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나를 본받으라'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할 수 없으면 아무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교육은 교육이 될 수 없
    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그런 전도는 전도가 못 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나가서는 그저 '하나님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지 사람보고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합니다. 하지만 일이 그쯤 되었으면 그 교회는 부흥이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구를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믿는 사람들,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어. 교회라는 데 가봐야 마음만
    뒤틀려'- 자 이렇게 느껴진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게다가 어떤 예수믿
    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강한 실망을 받았다면, 아주 실망했다면 바로 그 사건 때문에 한평생
    예수 안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받으라 받지 말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본받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
    다. 그런 의미에서 교역자가 중요합니다.
    또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늘 앞장서 많은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교회
    라고 해서 온 교인이 다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을 하나 봉사를 하나 일부분만 열
    심입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를 끌고 나가는 것이고, 나머지 분들은 그저 줄레줄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앞에 서서 지금 일하고 뛰는 이런 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느냐, 그것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본받는다는 것- 어차피 본을 끼치게 되어 있고 본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이란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나를 본받으라' 말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가장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된 자기 정체를 밝히
    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아버지로, 고린도 교인들을 자녀로 부르고 있습니
    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울 그와 고린도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듭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미리 설명을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 합니다.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를 낳았다 합니다. 복음으
    로써 아주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복음으로써 낳았다, 복음 안에서 낳았다, 복음이 역사해서
    생명이 이루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 생명의 큰 역사가 있습니
    다. 신비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을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그런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제 바
    울이라는 사람이 수고를 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음으로
    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수고를 하는 것처럼 수고하는 자들이 있고 오늘도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루시고, 그리고 성령이 역사
    합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자인 사도 바울이 여기서 아버지의
    역할을 합니다. 수고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위치와 기능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가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낳는다는 것은 생명의 계승
    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신비로운 출산,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절대적 수고, 절대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자식을 가르치면서 부득불 아버지는 법도를 가르쳐
    야 하기 때문에 진노적 사랑을 베풉니다. 자라는 가운데 아버지가 보여야 할 본이 많습니다.
    진노적 사랑-때로는 때리기도 하고, 책망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이것이 사랑이니까요.
    공의로운 사랑을 베풉니다. 그것이 어버이된 마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또 부모에게는 선택적 소원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자마자 소원을 합니다. 장차 너
    는 무엇이 되어다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낳자마자 그런 소원을 가지는 법입니다. 아이
    가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벌써 소원이 있습니다. 선택적 소원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
    어라, 되어다오'-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입
    니다. 거기에 필요한대로, 그쪽을 향해서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좀 밖으로 돌기도 하고, 딴
    길로도 가보겠지요. 그러나 어버이된 소원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아버지된 도리에서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이러한 사
    람이 되어달라고 할 때에는 뭔가 모델을 주어야 합니다. 표본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를 본받으라'하고 말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표현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나를 본받으라- 자기를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말
    을 한다고 합니다. '부모는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다.' 슬픈 일입니다. 부모의 교훈, 부모의
    생애, 부모의 경험은 내 생애에 참고할 정도는 되지만 본받을만한 것은 못된다는 이야기입
    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가 이렇듯 어렵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더 깊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그렇습니다. 선생은 많습니다. 한평생
    사느라면 선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치원 선생부터 시작해서 대학교수까지 온통 선생입니
    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선생이 많습니다. 내게 영향을 준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비는
    많지 않고, 하나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성서학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 말씀에서 스승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 '파이다고구스'입니다. 이것은 보통 선생
    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선생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선생은 선생인데 조금 특별
    한 의미의 선생입니다. 일반적인 선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trainer-
    훈련시키는 자, 혹은 tutor-가정교사라고 번역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것을 몽학 선생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몽학 선생, 이것은 아주 한문적인 이야기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
    면 그 본래적인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옛날에 귀족이 있었습니다. 혹은 왕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좌우간 이런 양반 귀족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을 잘 키워야겠는데 밖에다
    내어놓으면 아이들하고 돌아다니면서 장난을 하고 못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안되겠다, 깨
    끗하게 법도대로 키워야 훌륭한 양반이 되겠다, 그러면 누구와 친구와 되어야 하겠나?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것을 계속 가르쳐야 되겠는데----'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
    로 '파이다고구스'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 집에 있는 노예 중에 40년, 50년 동
    안 있어온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진실하고, 머리도 좋고, 학식도 있고, 순종
    도 잘하고, 덕도 있는, 아주 모범적인 노예를 고릅니다. 나이 많은 사람, 다른 일은 하기 어
    려운 그런 좋은 노예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종과 같은 그런 노예를 딱 골라
    서 "자네는 이제 다른 일은 하지 말고 내 아들을 가르쳐주게"-이렇게 됩니다. 그 사람은 이
    제부터 더 공부를 많이 하면서 이 아이와 같이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먹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
    다.---' 학교 갈 때도 데리고 갑니다. 돌아올 때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법도를 가르칩니
    다. 말을 가르치고 가정의 모든 가풍을 가르칩니다. 너는 커서 앞으로 왕이 될 것이니 지금
    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선생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도덕률을 배우고 법도를 배우고 예절을
    배웁니다. 바로 이러한 trainer, 훈련시키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본문에서는 번역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이런 tutor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어도 아비는 하나뿐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아
    비는 하나뿐이다- 아비는 오직 하나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고, 깊은 사랑이 있고,
    소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받아야 할 자는 가정교사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유업
    을 이을 자가 바로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어떤 의미에서 가정교사도 그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정교사가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닮으세
    요. 아버지는 훌륭한 분입니다. 보세요. 아버지의 저런 점을 배우세요. 아버지의 용기를 배우
    세요. 아버지의 지혜를 배우세요. 저 아버지를 본받으세요.---'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나를 본받으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정의 전
    통과 덕과 권세와 명예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습니
    까?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너희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다. 돈은 잘 못벌어도 사
    람 하나는 진국이다. 어떤 때는 조금 실수하는 것 같아도 그것은 아버지가 속상해서 그런
    것일 뿐 너희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다'- 이렇게 해야 뭐가 좀 되겠는데, 꼭 못할 말만
    합니다. "제발 네 애비는 닮지 마라." 이래서야 뭐가 되겠습니까? 오늘의 성경에서 가정교사
    라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쪽을 향합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
    다. 이래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아몬든 리콜리라고 하는 정신과 교수가
    쓴 논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와 미극의 아버
    지들을 비교했습니다. 러시아 아버지들은 대단히 동양적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랄 때 하
    루 평균 두 시간을 아이와 함께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37초, 하루에 겨우 37초
    를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계산해보니 러시아 아버지들의 200분의 1입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아버지들은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아이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
    고 합니다. 옛날에는 숫제 하루종일 같이 지냈습니다. 자녀들이 여기서 본받는 것입니다. 여
    기서 모든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른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 내가 너희에게 자녀에게 같이 권하노니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본받고야 순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나의 행사를 생각나게 하리라- 나를 본받고 나의 행사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하라, 내가 뜻하는 대로 너희도 뜻하라, 내가 말하는 대로 너희도 말하라, 내가 기뻐하는 것을 너희도 기뻐하라, 내가 목적 삼고 있는 것을 너희도 목적으로 삼으라, 내가 간절히 소원하고 잇는 것이 너희의 소원이 되라, 나의 행복이 너희의 행복이 되라, 나의 믿음과 나의 신앙고백이 바로 너희의 신앙고백이 되라, 내가 사랑하는 자를 너희도 사랑하라, 내가 죽고자 하는 바로 그대로 너희도 위하여 죽으라 이것입니다.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본받으라 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나처럼 이런 직업을 가져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못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 내가 목표로 하고 목적으로 삼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 본받으라, 나의 기도생활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말하지 않아도 그대로 되는 것이니까 본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
    이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본을 받습니까? 본받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존경하면 본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본받
    게 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으면 어느 사이에 그만 나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있는 것
    입니다. 다 따라갑니다. 가만히 보면 존경하는 사람의 옷입는 것도 따라가고, 말하는 것도
    따라가고, 행동도 따라가고---- 다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본받는데는 별도의 노력이 필
    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결혼 생활을 하시면서 입맛이 바뀌었습니까?
    안바꾸어졌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입맛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맛으로 바뀌는 것
    입니다. 30년 살아도 바뀌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는 사이입니다. 취향도 바뀌고 성향도 바
    뀝니다. 왜요? 그가 하는 일이 좋으니까, 그가 하는 일이 다 좋아보이니까 따라갈 수밖에 없
    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받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명 문제가 있었습니다. 분쟁이 있었고, 제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분쟁이 있었으나 바울과 아볼로는 친밀합니다. 화해하고 있습니다. 이 화목한 관
    계를 본 받으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저들을 비판하면서 어느
    사이에 아볼로 파, 바울 파, 예수 파, 게바 파--이러고 있는데 아볼로와 바울은 서로 사랑합
    니다.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받으라 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알지만
    특별히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본 받으라 하면서 하나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바로 디
    모데입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안에서 내 사랑하고 진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
    었노니"- 디모데야말로 바울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직접적으로는 그런 말씀을 쓰고
    있지 않지만 '디모데가 나를 본 받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
    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서슴지 않고 부릅니다. 빌립보서 2장 19절을 보면 사도 바
    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
    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
    느니라."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 주안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본을 보이는 여러분의 믿
    음의 삶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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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하는 사람이 되라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좁은 문에 집중하라
    대표선수 교인이 됩시다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너와 함께 하느니라
    신앙 성장의 방해물을 제거하라
    우리의 멘토 다윗
    은혜를 받아야 산다
    아름다운 면류관
    부지런히 가르치라
    성도의 기도
    하늘에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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