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당신도 압니다. 2001-12-28 20:43:17 read : 173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행26:24-32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천황을 하나님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
다. 그때 많은 성도와 목사님들이 생명을 걸고 이를 거부하며 투쟁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목회자들이 일제에 잡혀 수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 모진 고문 등으로
극도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순교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형무소에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보내던 목사님들이 가끔 마당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로를 위하여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홍포를 입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청포를 입고 있으니 얼마
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이 믿음 흔들리지 맙시다."
죽음과 고문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과 믿음의 절개를 지킨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
게 무한한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강한 인상, 더 진한 감동을 주는 한 사람을 본문에서 만납니다. 그는 재
판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의 앞에는 왕과 총독이 앉아 있고, 그 옆
으로는 당대의 권력가와 유명인사들이 배석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엄청난 도전을 합니다. 초라해 보이는 죄인의 신분이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기죽지 않고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그
리고 쇠고랑을 찬 두 손을 번쩍 치켜들어 보이며)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
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큰 소리로 당당하게 외
쳤습니다. 누가 재판장이고 누가 죄수인지 모를 정도로 그는 법정의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
하고 있습니다. 쇠사슬이 사도 바울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과 총독의
위엄과 권세가 그의 용기를 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과 총독의 권위가 바울의 권위 앞에서
초라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습니다. 할 일이 있고 해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갈 곳
이 있고 가서는 안 될 곳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먹어선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들어야
할 것이 있고 들어선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능력은 사람이 제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과 결단이 분명치 않으면 신앙생활은 물론 세상사도 성
공하기가 어렵습니다. 할 말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 때나 어디서나 입을 벌리고
주절대는 사람은 사랑받고 인정받기가 어렵습니다.
판단력, 분별력, 결단력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적재, 적소, 적시
에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짐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덕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생 동안 예수 복음만을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할 말만
하고 산 증인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기 전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받은
기사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죄인에 대한 최종 판결권은 그
지역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본인이 로마 황제인 가
이사에게 상소를 하면 황제가 재판하고 최종형을 확정했습니다. 바울은 다행히 아버지 덕택
으로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
습니다. 이유는 그가 꿈에 그리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할만큼 그 당시 로마는 세계 정치, 경제, 교통, 문화의 중
심지였습니다. 그러한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면 세계 복음화가 가능했습니다. 한마디
로 바울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복음 전도를 위해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양한 가능성과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이든, 돈이든, 재주든, 지식이
든, 권력이든 하나님과 복음 전도를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그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선용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은 자기 변명에 힘을 다했습니다. 이유는 유대
나라를 벗어나 로마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왕 앞에서 자기 변명이 부실하면 로마로
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예수의 복음이 부끄러워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변명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본래 정통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해 보다 밝은 빛과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 예수님을 믿어야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다. 내가 그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에 게 붙잡혀 당신 앞에
서 있다. 당신도 내가 믿는 예수님을 믿기 바란다.
이와 같은 바울의 자기 변명이 끝나자 배석했던 유대 총독 베스도가 소리쳤습니다.
"바울아, 너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만드는구나." 바울의 대답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선
지자를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 왕이 소리쳤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시시한 말로, 하찮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
다." 바울의 용기 있는 전도가 계속됩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을 심문한 아그립바 왕과 유대총독 베스도가 내린 결론은 "죄가 없다. 만
일 이 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풀어 줄 수 있었겠다. 그러나 가
이사 황제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로마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매우 중요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투옥된 것은 유대인들의 모함 때문
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요, 메시아라고
전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모함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감옥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감옥에 들
어간 지 2년이 다 되었는데도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설사 석
방되더라도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
습니다. 바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입니다.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벗어나면 유대인들의
손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상소하자 총독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수를 로마에 보내려면
확실한 범법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바울을 아무리 심문해 보아도 특별한 혐의 사실을 발견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황제의 재판정에 보낼만한 잘못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고민
하고 있을 때 마침 아그립바 왕이 방문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왕에게 자기의 고민을 이야
기하며 한번 심문해 볼 것을 넌지시 제안하였고 왕이 승낙하여 이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먼저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석에 앉아서
심문하고 있는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그리고 버니게라고 하는 여자, 이 세 사람은 우리
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 전도할 때 흔히 만나게 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 대상자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어
느 정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을 갖는다면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베스도를 보면 유대의 현직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이
기에 로마에 충성하는 황제의 대리자이며, 식민지의 정치와 군사, 사법의 모든 통치권을 감
독하고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가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 있는 왕들과 재판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진수를 전
하고 있습니다(23절).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베스도 총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
다 하니"(24절).
베스도는 바울에게 "돌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자 주위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바울을 향하여 곧바로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는 것입니
다. 세상에서 들리는 작은 풍문만 듣고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의 기독교인의 실수
를 보면서 모든 기독교를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왕을 봅니다. 이 재판에서 주심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핍박하던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익숙한 사람이었습니
다. 그래서 겉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거부하고 있습
니다. 알고 있으나 교만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도덕성이 문제가 될까봐 결단을 하지 못하
고 거부합니다.
버니게가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누이입니다. 성격상 어떤 결함이나 고약한 기질이 있었
는지 이 여자는 여러 번 결혼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동생에게 와서 얹혀 살고
있는데, 자기가 마치 왕비나 되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권력과 호화스러운 삶에 길들여 있는
아 여자는 한낱 죄수에 지나지 않는 바울의 말이 귀에 들릴리가 없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기회야말로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이나 버니게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만약 아그립바 왕이 감옥에 있거나 암에 걸렸거나 파산했다면
그때는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힘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재판장이 아니었으면 그는 예
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것이, 총독이 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예수 믿
을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 환경이 그를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만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여러분의 성공이, 여러분의 유명함이, 여러분의 자신만
만함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 혼자 믿
는 건 괜찮은데 내가 예수 믿으면 주변 사람이 다치기 때문에 못 믿는다고 합니다. 왜 진리
를 말하지 못합니까? 내가 말하면 나 혼자 당하는 건 괜찮은데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니까
할 수 없이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지위나 부, 환경은 우리를 동아줄로 묶고 있는 그런 것일지
도 모릅니다.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내가 그 위치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주변 환경을 살
려야 되기 때문에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 환경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됩니까? 아니면 도움이 됩니까? 흔들릴 때 믿으십시오.
29절에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
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말씀합니
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을 보면 거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
다. "내가 부자이거나 성공했거나 유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다 나처럼 되라." 얼마나 자유롭고 놀라운 말입니까?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몇 가지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천박한 가문의 출신
이 아니었습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멸시를 받을 만한 그런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몇 안 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고, 가말리엘 선생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석학이었고 엘리트였습니다. 가정 형편도 가난한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예수가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격한 나머지 복음 전도에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성격 탓이긴 합니다만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각각 다릅니다.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안하는 사람, 기뻐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지나쳐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의 고백과 감정 표현은 분명해야 합니다. 믿으면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다고 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죄를 깨달았으면 즉시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울고 돌아서서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사랑에 감격할 줄 모릅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교회를 들락거려도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를 신사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마모되고 억압당할수록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에 감격이 사라집니다. 바울
은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부터 끓어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안고 살며 일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만든 유머가 있습니다. 나이 많고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 할머니가 100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첨소식을 본인에게 알려야겠는데 문제는 100만 달러가
당첨됐다고 알리면 보나마나 그 할머니는 기절할 게 뻔했습니다. 고민하던 증권 회사에서
그 할머니가 다니고 있는 성당 신부님을 찾아가 전후 자초지종을 얘기하면서 그 할머니가
기절해 죽지 않도록 지혜롭게 복권 당첨 사실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이 할머
니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전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만일에 100만 달러짜리 복권이 당첨된다면 어떻게 하
시겠습니까?" 시큰둥하게 듣고 앉아 있던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전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만일에 100만 달러가 당첨된다면 신부님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부님이 기절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저라도 기절했을 것입니다. 기쁘면 기뻐
합시다. 좋으면 좋다고 말합시다. "오, 나는 예수가 좋다. 오, 난 예수가 좋다오"라고 소리
지릅시다.
바울이 정신차리고 한 말은 바로 예수였습니다
"너 미쳤구나."
"아니오. 난 미치지 않았소. 나는 정신차린 참말을 하고 있소. 내가 하는 참말, 정신차린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예수를 믿으시오."
미쳤다는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외쳐야 했던 말, 예수, 바로 예수 믿으시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대에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과 이상에 미치고, 30대는
사업과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는데 미치고, 60대는 백발과 죽음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엔 의외로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나쁜 쪽으로 미쳐 있
고 미쳐가고 있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 권력에 미친 사람, 여자 남자에 미친 사람, 도박에
미친 사람, 공산주의에 미친 사람 등 그 종류와 수를 세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미쳐야 할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에게 미쳐야 합니다. 국어 사전을 보면 "미쳤
다, 미치다"를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신경계통에 탈이 나서 언어 행동이 이상해지다." "몹시
흥분해 정신이 보통 때보다 다르게 날뛰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라는 분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삶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햇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 누구였나 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되라"고 여러분 자녀한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직업을 계승해라. 다 나
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
았지만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자기 자식에게만은 그렇게 해주고 싶은게 부모의 심정입
니다. 바울은 감옥에 잡힌 것이나 이렇게 결박당한 것은 닮지 말고 다 자기처럼 되라고 말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가리켜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을 할 수 있으면 인생 마감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식에게,
그리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후회 없는 인생
을 마감한 것입니다.
"나는 세상적으로는 그렇게 성공을 못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이 하나 있다. 내가 믿은 예수, 그분은 나에게 한 번도 속인 일도 없고 약속을 바꾼 일도 없
이 신실하게 나의 삶을 인도해 주셨다." 이런 간증을 자녀들에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성
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가슴에 예수님이 있고 내 영혼 깊숙이 주님이 자
리잡고 계십니다. 우린 제정신 없이 비몽사몽간에, 무의식 속에 예수님을 말하고 믿는 사람
들이 아닙니다. 정신차리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리고 할 말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자존심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무장합시다. 그러면 아그립바 같은 사람을
만나도, 베스도와 같은 사람을 만나도, 버니게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좋습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바울처럼 "당신들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증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