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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2001-12-28 20:47:22   read : 176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눅11:14-26

    동양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유교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용의 도
    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
    는 것입니다.
    동양문화권의 철학적인 배경뿐 아니 라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상 우리는 쉽게 믿
    을 기독교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본성상 충돌과 분리를 싫어합니다. 가급적이면 양편을 다
    만족시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담에는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쪽을 선택하기를 원합니
    다. 어느 쪽이든 극단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
    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
    이나 사고가 지닌 취약점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적당주의로 몰
    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어떤 본성보다도 우리의 문화
    적인 영향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습니다. 신앙에
    관한한 우리는 중립적인 자리를 고수하면서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
    음과 태도가 중용의 자리에 설 수는 없습니다. 흔히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
    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
    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
    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
    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차라리 바 울
    이 사울이었을 때처럼 화끈하게 반대하려면 하든지 믿으려면 딱부러지게 믿든지! 그렇게 주
    님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때 신
    앙은 제 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
    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보적인, 타협적인, 반신반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늘과 세상을 동시에 사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습니다. 세
    상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어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더
    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단 없이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교인은 세상사람에
    게 유익을 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 헌신만이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
    인의 수준입니다. 전적 헌신만이 여러분과 제가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신앙 생활하는 길입
    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달리 말해서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3절) 결코 중립적이거나 중용적인 입장에 설 수 없음을 주님은 선언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
    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
    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귀신 들렸다가 귀신이 나가므로 깨끗해진 사건을 볼 수 있습
    니다. 반면 여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귀신이 들리지 않았음을 자처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빈 집'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귀신은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자,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하고서는 다시 전에 있던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청소를 깨끗이 해놓은 빈집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잘되었구나,
    더 잘되었다고 기뻐하며 이번에는 다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전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더욱 포악하고, 더욱 더럽게 일그러진 그런 모습의
    귀신들린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여기에 빈집의 허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날
    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뉘
    우치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 되지, 이 죄에서 떠나야 해"
    때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회에 참석했
    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삶을 계속 살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리면 큰일납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났습니다.
    그만입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 같습니
    다.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눕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그
    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가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본문
    은 이런 상태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마땅히 내 속에 있어야 할 것으로, 내 영혼의 집에 있어야 할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있는
    공허한 집, 이 집을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깨끗하게 청소해도 이 집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빈집은 빈 집 그 상태대로 계속 유지될 수가 없기 때
    문입니다. 이 빈집은 머지않아 거미들을 초청하여 거미줄 왕국을 만들 것이며, 쥐들을 초청
    하여 혼란과 파괴의 왕국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유리창에는 검은 그늘이 깃들고 마룻바닥
    은 삐그덕 거리고 대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이 유령의 집, 이 귀신의 집을 한 번 상상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세력은 물러가고 그 마음속이 비어있는 사람, 이 사람을 일컬어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다고 말합니다. 세탁하고, 다시 만들어진 것이 아
    닙니다. 소제는 먼지를 털고 쓸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 또는 "기독교에 대해 관심
    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술, 담배를 끊고 예배 출석도 착실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제하는 것과 세탁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은 소제하는 것으
    로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의 먼지를 대충 털어낸 정도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의 피로써 더러운 곳을 완전히 씻어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은 적당
    히 자기 자신을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
    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죄 때
    문에 회개하는 눈물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또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에 부딪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도 그 마음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쏟
    아 놓는 기도의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또 성령 충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약간의 상식적인
    대답을 할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살 동안 세상에다 정을 두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다 소
    망을 두고 걸어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을 케케묵은 생각으
    로밖에 여기지 않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마음은 비어 있습니다. 주님이 당장 그 자리에
    오시지 않으면 그 속에는 금방 자기 중심적인 여러 가지 잡초들이 우거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는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상입니다. 자기 자신이 판단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
    람입니다. 마음은 비었고 마귀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지 않으므로
    "내"가 지배합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종교인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유대인처럼
    종교적인 의식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다른 데는 별
    로 관심이 없고 단지 예배보고 간다는 종교적인 의식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설교자, 혹은 성가대, 교인 수, 분위기 등 외적인 면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
    다. 이런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지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지성을 중요
    시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예수의 사상을 좋아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헬라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보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으로밖에 여기지 않습니
    다. 이런 사람은 "사상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로마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매우 존중합니다. 그래서 법과 질서를 통해서 자신을 수양
    하려는 도덕자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됩
    니다. "내가 좀더 깨끗이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고, 인생의 어떤 의미를 발
    견하기 위해서 교회도 다니는 거야!"라고 말하고 이런 생각으로 자기 수양과 교양을 쌓으려
    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적이든, 헬라적이든, 혹은 로마적이든 간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 사람의 겉모양이 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 중심의 주인은 한 마
    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서 성경을 판단하고 자기 기준에 따라서 모든 신앙
    생활을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항상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에 순종합니다. 이런 사
    람이 바로 종교인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 안에는 마지막으로 무너져야 할 벽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숨겨놓은 벽이다."
    "자기"의 벽을 깨뜨리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은 비록 교회에는 다닐지 모르지만 종교인
    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종교인들을 향하여 귀신들이 뭐라고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이들
    을 향한 귀신들의 냉혹한 조소를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안식처
    를 얻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청소된 자기의 집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
    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24절)
    이 귀신은 아직도 이 집을 자기의 집으로 주장합니다. 당신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 중심에서 왕노릇하지 못하고 삶을 다스리지 못할 때에 악령들
    은 당신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내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인이 오셔야만, 이 집의 임자가 바
    뀌어야만, 사단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 내 마음과 영혼과 삶을 다스리는 이 적극적인 신앙의
    삶이 없는 상태의 마음의 집들을 바라보면서 사단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저건 내 집이야.
    교회는 나왔지만 내 집이야."
    그래서 사단은 깨끗이 청소해 놓은 이 집에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옵니다. 빈집은 반
    드시 자기들의 주인을 초청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있지 못
    한 집은 별 수 없이 악령의 처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시기와 질투와 더러움과 오염
    과 파괴와 저주와 질시로 인도하는 악령! 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배후에, 내 인격의 배후에
    서, 내 삶을 약탕하고 내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내 영혼을 파괴하는 귀신들의 활동이 있
    습니다. 언제 우리를 다시 더 악한 배신자로 끌고 갈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본문 21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강한 자
    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정말 강력하게 왕 노릇하시며 나는 그분 앞에 순종하며 그 분은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의식을 채우시며 나를 지배하시기 때문에, 감히 사단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하게 무장이 되어 있는 영혼의 집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계시는 그런 심령의 상태가 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종내에 갔던 마귀가 다시 돌아오면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귀가 돌아와서
    "야, 이 집에 누구없니?" 하고 소리쳐 봅니다. 예수 믿는 집에는 이럴 때 예수님이 대답합니
    다마는 아무 대답이 없으면 마귀는 그 다음에 집밖으로 나와서 그 사람 마음이 문설주를 확
    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의 문설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붉게 발리워져 있기 때문에
    그가 예수의 사람이고 그 집주인이 예수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내 영혼의 대문에 "예수"라고 씌여진 문패만 보고도 십리 길을 일곱 길로 도망가고 맙니다.
    또 하나의 빈집이 있습니다.
    죄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마치 빈집과 같습니
    다. 회개하려다가 마는 자리에서 끝난 것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잘못에 대
    해서 더 이상 여간 해서는 그 잘못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
    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
    히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그것 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
    동입니다. 소극적인 종교 생활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찬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찬양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마음에서부터 기뻐하
    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에 그게 목표 달성하는 겁니다. 연주하면서도 내게 주
    신 재능가지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노력하는 그 소원을 담아낼 수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성가대 아니겠습니까. 내 가 뭘 안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
    요한 것입니다.
    "나는 저 세리처럼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안했구요. 나는 저 죄인처럼 살인하
    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어릴 때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분들
    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입니다. 착한 죄인들입니다. 여간해서는 나쁜 짓을 안하니까요.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
    입니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사셨다구요? 이레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하고 -여기에 한번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요- 소득의 십 일조도 정확하게 나는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혹시 그래서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고 종교인
    으로서 의무를 다해왔지만 여러 분의 마음속에 뭔가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라는
    안타까운 생각은 가져 보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을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무엇을 안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
    나님 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려
    고 갈망해 왔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쏟아 주신 사랑에 보답하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무엇을
    하라고 일러주어야만 아이가 진취적이 되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것도 잘못하자
    마자 '하지 말라'고 그러면 주눅이 들죠.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가르칠 때는 무엇을 하지
    말고 무엇 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 절 이하를 보십시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버려야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라'
    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버리는 데서 중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진실한 말을 사람 가운데서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 거짓 말쟁이가 거짓 말쟁이를 면합니까? 거짓말을 안하
    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잠시 거짓말을 안하고 있다고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순간 또 필요하면 언제 거짓말
    할 지 모릅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제 새롭게 참말을 하
    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
    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서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교훈을 하나 더 살펴봅시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빈궁한 자에게 구 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
    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절) 도적질하던 사람이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도
    적질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적질은 더 이상하지 않지
    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번 것으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손으로 수고하여 자기가 벌은 것으로 남에
    게 베푸는 구제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남의 것을 훔쳐서 사는 삶이었지만
    더 적극적인 삶으로 열심히 일해서 내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주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가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청소만 해 놓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교회에 발을 디딘 후부터 두 갑 피우던 담배를 한 갑으
    로 줄였습니까? 아니면, 웬만해서는 화를 내거나 더러운 욕설을 입에 담지 아니하려고 노력
    을 하고 계십니까? 집사라고 알려진 이상 속이 썩어도 참고 지냅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가 풍성해야만 합니
    다. 벌레 먹은 열매가 더 이상 달려 있지 않았다고 좋은 과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
    가 좋은 나무라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입니다. 하나님 나
    한 테는 나쁜 열매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
    으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습관뿐만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좋지 못한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그것을
    지워버리겠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애를 쓴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좋은
    생각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좋은 생각,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많은 기도로 우리
    의 생각,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채우게 될 때에 비로소 성령이 인도하는 생
    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언어생활에 실수가 많고 부덕한 말에 젖어
    있다면 이제는 선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 덕스러운 말을 하려
    고 힘쓰다 보면 자연히 나쁜 말은 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자식들을 혼
    낼 때도 이 "축복받을 놈아!", "이 담에 훌륭하게 될 놈아!"하며 혼을 낸다는 말을 들은 적
    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나쁜 말을 안해야지 하는 결심이나 맹세만 가지고
    는 거듭거듭 다짐을 하여도 아무런 변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말을 생활
    속에서 익힘으로써 나쁜 말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집니다.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
    아입고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도 나오고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으나 아
    직 성령께서 들어가서 다스리지 아니하는 마음 상태는 폭풍 전야 같습니다. 겉모습 가지고
    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 짓기를 그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
    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이제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셔
    야 합니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제 주님으로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야만 합
    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우리는 더러운 귀신이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새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빈집을 가지고 충만을 기다리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꽉 채워진 집으
    로, 그리하여 시간도 채우고 정력도 채우며,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그리
    고 우리의 행위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걱정할 것이 없습니
    다. 위험은 언제나 빈집에 있고 진공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과 뜻,
    그리고 우리의 활동이 게으르고 한가하다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선한 일, 하나님의 일들로 바빠야 합니다. 문제는 빈
    집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마십
    시오.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
    니다. 빈집은 더욱 위험합니다. 종교인은 껍데기입니다. 빈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여러분! 짧은 인생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얼마를 살았고 얼
    마가 남은 것 같습니까? 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꽉 채우십시오. 그저 열심히 뛰십시오. 그
    렇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쓰지 않는 건강은 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오
    히려 그 건강이 있으므로 많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건강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고, 참된 믿음으로 채우며, 성령으로 충만
    해져서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기회를 얻든지 못얻든지 간에 열심히 전도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내 마음의 집을 꽉 채워 나갈 것이면 이제는 의심이나 나약함도
    다 이기게 될 것입니다. 달리 의심을 없애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래서 무디는 그의 기록
    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이 있으면 기도한다는 것에 비해 자기는 의심이 나게 되
    면 나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한번 소리를 지르고 와서 다시 성경을 보게 되면 의심이 없어진
    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빈집을 마련해 놓음으로 귀
    신을 영접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
    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심령이 되어서 귀신도 이기고 죄악도 이기며 모든 좌절과 허무함도
    이길 수 있는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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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하는 사람이 되라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좁은 문에 집중하라
    대표선수 교인이 됩시다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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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함께 하느니라
    신앙 성장의 방해물을 제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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