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한 생활 2001-12-28 20:56:23 read : 208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행4:23-31
어느 늦은 밤에 술취한 사람이 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마침 교회 사찰 집사도 술에 취
해 있었고, 귀찮은 듯이 "누구십니까?" "신자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왜, 신자가 되려 합니
까?" "마음이 답답하고 문제도 많고 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왜 교회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까?"
"예수님이 기쁨을 주신다고 해서요."
그때 사찰 집사가 대답합니다. "이 교회에 예수님 없소."
예수님이 없는 교회는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은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놀라고 감격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충
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
히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생각을 하고, 자기 경험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상상해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간접 경험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의 범주 안에서 생각하
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교육받은 지식이 자기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든지, 하나님을 경험한다든지, 하나님의 지식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닙
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충격적인 일이 아니라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령 충만과 그에 따르는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 가운데는 유식한 사람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
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편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
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 모양의 사람을 강권적으로 고용하시어 당신의 놀라
운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 그 자체가 사도행전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행전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그 충만함의 결과는 어떠한 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한 사도들에게 핍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
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핍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핍박이 없고 고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대입니다. 흔히들 장사도 잘되고 시험에도 합격하고, 그리고 항상
건강하고 만사가 형통해야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
면서 어떻게 고난 당하고 죽고 쫓겨나고 비난당하고 핍박을 당할 수 있느냐, 그것은 말도
안된다 라고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
십 세가 넘은 사람, 누가 생각해도 일어나서 걸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웁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희한한 능
력까지 보였는데 왜 핍박을 받아야 하고, 왜 감옥에 끌려가 매를 맞고 능욕을 당해야 합니
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자에게는 핍
박이 따른다는 것을 , 고난이 있고 실패가 있고 역경이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른 신앙은 시작됩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교회로서 성령의 역사가 있고, 이적의 기사가 있고, 사도들의 권세가 있
고, 은혜 충만한 교회입니다. 유무상통한 교회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핍박은 성경을 이해해 나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없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핍박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고난이 있습니까? 베
드로는 체포당하고, 야고보는 목베임 당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까?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저들은 이 핍박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까? 안계시는 것
입니까?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핍박을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과 환난이 죄의 값으로 주어진다고,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의 실수
로, 시행착오로 말미암아 이 핍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
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당했습니까? 어떤 실패를 겪었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에 내가 하
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없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 고난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동안 건강하게 산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이 내 죄
때문이라면 그동안 사업이 잘 된 것은 내 의 때문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논리로 생
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내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내 죄를 벌하시려고 주시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고난을 당하고 어떤 실패를 만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은 결코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심판적 의미가 아
닙니다. 또한 버려진 결과도 아닙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무자격해서 하나님께서 버리셨어.
그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시절,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핍박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핍
박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28절에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엄청난 말씀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질병--- 어
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
두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큽니다. 하나님의
지혜도 큽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보면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하나님은 알고 사십
니다. 우리는 현재에 매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저 앞을 내다보시고 게십니다. 보십시
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고난 가운데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하신 지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또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선교를 위한 필수적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
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고난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
기 위하여 핍박은 있어야 합니다. 이 환난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분명하게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선교를 위해서는 그 고난과 사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고난의 맥락을 알았습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
은 죄 때문도 아니요 저주 때문도 아니요 형벌도 아니라는 것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연계된 사건이라고 하는 높은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과 연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오늘의 말씀을 보십시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
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
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27,2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더니 그것도 모
자라 오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려고 이 성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들
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의 의미에 연계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한 의미의 고난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
이 지금 우리를 핍박하려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고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고난에는 그리스도적 고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난 당한다고 다 슬
픈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격의 고난을 받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적 고난, 십
자가적 의미의 고난을 당할 수만 있다면 까짓것 매맞는 것이 문제입니까? 죽는 것이 문제입
니까? 그렇습니다. 고난의 성격이 문제입니다. 고난의 의미가 문제입니다. 이렇듯 성령 충만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높은 가치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추
호의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모여서 기도합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
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23,24절)"
이것이 성령님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합심기도했
고,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
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29,30절)" 기도의 내용이 너
무도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보십시오. 큰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
한은 벌써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를 믿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런 위협과 고난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나
사도행전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면 핍
박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복음을 전하면 또 끌려 들어가서 매를 맞을 것입니다. 그
러나 그들은 그러한 고난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
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하나님이여, 큰 능력을 더하사 우리 핍박당하는 것을 돌아보시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소멸하옵소서. 우리의 핍박을 면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그런 기도가 없습니다. 특별히 그 사건 자체에 변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핍박도 없게
하여 주시고, 고난도 없게 하여 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경의 변화를 위하여 하
는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간혹 보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부동 자세로 서 있으면서 '남편의 마
음을 감동하사 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이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나에게 효도하게 하
여주옵소서. 우리 구역의 사람을 감동하사 나를 존경하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자
신은 가만히 부동자세로 있고 주변의 환경만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서 그저 나 하나 편안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수준입니다.
영국의 캐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열심 있는 여신도가
자기의 거의 반생을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이 여자의 유일한 기도의 제목
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똑같은 기도를 계속적으로 들
으신 하나님은 마침내 화가 나시어 그녀 앞에서 문을 꽝 하고 닫으시면서 나가 버리셨습니
다. 그러면서 꼭 한 마디를 내뱉으셨답니다. "제발 시험에도 한번쯤은 기회를 주어라." 하나
님은 우리가 아무런 시험도 환난도 없는 무사 안일한 상황에서 허약하게 자라는 그런 자녀
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고 강인한 체력을 가진 그런 자녀들이 되기
를 원하십니다. 일찍이 유명한 미국의 설교자였던 포스딕 목사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
리가 슬퍼하는 악에 대하여 너무 약하게 체념하는 데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
실제로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너무 두려워합니다.
겁을 집어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콩나물 교인들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뿌리도 박지 못하고
가지도 없고 가지가 없으니 열매도 없고 비바람에 고되게 마주서서 신앙생활 할 필요도 없
고 교회의 보자기가 덮어 주는 그늘에 숨어서 때때로 강단에서 흘러내리는 은혜의 물을 받
아먹기 위해서 얼굴이나 내밀고 세상에서는 감히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 그런 허약한 교인들
로 교회는 가득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밖에 나가면 맥을 못씁니다.
힘을 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탄로 날까봐 겁을 집어먹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초대교회 사람들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같이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환경의 변화가 있기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 그대로를 수용하
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의 안일이나 평안을 위하여 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환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해주세요. 비겁해지지
않게 해 주세요. 핍박을 겁내지 않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도
가운데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벙어리 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
니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사 기도했습
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표적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하여 표적을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고 하는 표적, 하나
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표적,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
는 표적을 주십사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
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참으로 모범적이요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 내용 전부가, 그
소원 자체가 초대교회의 성령 받은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
니다. 오직 전도를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내 일을 하
나님께서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게 해주십사 하는 이야
기도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참아
야 할 시간에 참게 해주세요, 내가 전해야 할 시간에 전하게 해주세요, 내가 사랑해야 할 사
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
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주제입니다. 참으
로 귀한 마음이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 31절에 참으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에 거
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
기서 말하는 '충만'은 무아지경이라든지 종교적 절정 경험이라든가 환각, 환상을 말하는 것
이 아닙니다.
기도를 마치니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의 성령 사건
과 똑같습니다. 오순절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리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것도 진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
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
을 따라 담대히 말하였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성령이 충만함으로 의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 다한 역사
의식,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나아가 자아의식이, 사명의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어
느 한 사람 만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아닙니다. 어느 한 사람만 특별히 충만해졌다는 이야기가 아
닙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여기에 교회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충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는 데에 있습니다. "담대
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 충만의 목적이 장사 잘되고 시험 합격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
여 고난의 선교적 의미와 그 효과적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
오. 기도와 응답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기도
속에는 충만하게 해 달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사도행전만 연구한, 사도행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모리야라는 학자가 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 충만 자체를 위하여 기도한 흔적이 없다.' 사도행전에
는 충만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충만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벌게 해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좀 많이 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돈이 벌리더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
하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 자체는
은사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선물 자체를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주세요 하고 열심히 구했더니 거기에 필요한 충만함을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필요한 용기도 이적도 표적도 능력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일을 힘써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학자금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건강도 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건강주세요'하니 하나님께서 '건
강주면 다른 짓만 하는 녀석이 건강만 달라고 조르는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겨워하시
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건강 자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
도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일 좀 많이 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건강 필요하면 건강을, 지식 필
요하면 지식을, 돈 필요하면 돈을 주실 것이 아닙니까? 돈 자체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
석은 기도입니까? 오래 살기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기도입니까? 얼마나 불신
앙적인 기도입니까?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충만은 개인적 신비체험이 아닌 것
입니다. 충만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것입니다. 저들의 궁극적 목적은 핍
박을 면하자는 것도 아니요 안일하자는 것도 아니요 영광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요 명예를
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용기 있게 전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해 주세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과
이적과 기사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기도는 하지 맙시다. 자꾸 뒤로 도망가면서 '하나님, 저로 복
음을 전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좋고 핍박을 받아도 좋고 환난도 좋고 가난도 좋고 질병도 좋습
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 주세
요' 하고 진심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더하실 것입니다. 충만
함을 더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