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이야기 2001-12-28 21:07:53 read : 208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엡2:1-10
눈부신 백설을 이고 있는 설악산을 보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카메라에 담고 싶
어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댑니다. 나중에 집에 가서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현상해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열의 아홉은 전부 쓰레기통에다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
면 눈으로 직접 본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것일수록 작은 필름에 담긴 그 풍경은 너무나 초
라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장엄한 자연 경관을 35mm짜리 필름으로 재생해 보겠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무모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특별히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이
짧은 구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광대하고 장엄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
사여구를 빌려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풍부한 문장을
동원해야 이 사랑을 마음에 와 닿도록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마치 대자연을 카메라
에 담을 수 없어서 암담해하는 사람의 심정과 비슷한 그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질과 양도 초자연적
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
니다.
이제 초자연적인 사랑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
다 한번 넣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공간개념을 빌려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그리고 넓이와 길
이를 잴 수 있다면 좀더 쉽게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 한마디에 삶이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게됩니다. 한 사병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군의관이 이 환자를 두고 무심코 하는 말이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 죽
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군의관의 한마디 말에 희망을 걸고 그는 기를 쓰
고 새벽까지 몸부림을 쳤습니다. 새벽이 다가오자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넘쳐흐르기 시작합
니다. "새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살았다!" 그 군의관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죽어가던
그 사병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마디 희망의 메시지를 붙들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
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갑니까? 희망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하
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믿고 살아갑니까?
얼마 전 창조 과학 회에서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동전 10개가 있습니다. 흔든 다음
처음 1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입니다. 다시 집어 놓고 처음에는 1번 동전을 꺼내고 두
번째는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0입니다. 이런 식으로 열 번을 꺼낼 때에 1번 동전부터
10번 동전까지 차례대로 꺼낼 확률은 10에 10승 즉 1/100억입니다. 100억 번을 시도하면 한
번 나타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확률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동전
열 개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
학자들이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안계시면 창조도 운행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
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자
전속도를 1/10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납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
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
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
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
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학사가 어느 학교를 방문하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이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지?" 학생은 깜짝 놀라며 "제가 안그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학사가 담임 선생님께 "내가 이 학생에게 지구가 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느
냐고 물었더니 이 학생이 자기가 안그랬다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엔 담
임 선생님이 말합니다. "그 학생은 착한 학생입니다. 게가 안그랬다고 하면 안그랬을 겝니
다." 기가찬 장학사가 이번엔 교장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 학교 어떻게 된 겁니
까?" 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왈 "국산 다 그렇지요 뭐!"
지구가 23.5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차
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입니다.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
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
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
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겠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시19:1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
다" 히3:4을 보면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후면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을 만드신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 광고에 'GOD
LOVES YOU.'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문
구를 보면 어떻게 느끼십니까?
감격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감격이 없었습니다. 아니! 감격을 하시는 분을 본적이 없습
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만물보다 바로 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계속
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이렇게 사
랑해 주십니까?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까?
오래 전에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난 센]이라는 사람은 북극의 바다의 깊이를 측량해 보기
위해 아주 긴 밧줄을 구해 바다 속에 넣고, 어느 정도에서 밧줄이 밑바닥에 닿는지 알아보
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준비한 밧줄은 바다 밑에 닿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
날에는 더 길게, 또 다음 날에도 전 날보다 더 길게 여러 번 시도하여 보았지만 북극 바다
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바다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북극해가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섬기
는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깨닫는 만큼 하나님을 알 게 되
고, 깨닫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
리 넓고 크고 깊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
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랑해주어도 사랑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
람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랑에 굶주려 살게 됩니다. 오
늘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 중에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
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아버지가 언제 나를 사랑해준 적이 있느냐고 대들기도 합니다. 우
리 나라 사람들은 서구의 사람들처럼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사랑하기 때문
에 그 깊은 사랑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수
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한국의 부모님들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속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
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녀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습니다. 더구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머니께
서도 자녀들을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공부시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
고, 얼마나 나를 좋아하시는지,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냥 옆에 계시
기만 해도 좋았고,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의 사랑이 항상 고맙게 느껴져서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전할 때 어떨 때입니까? 사실은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사랑에 대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비천한 여종을 사랑한 어느 한 왕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왕은 다
른 여느 왕과 다름없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 누구도 함부
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정적을 숙청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서운 왕이 비천한 한 여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여종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까? 왕이 신분이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여종을 궁정으로 데려와 화려한 왕관을 씌우고 여왕 옷을 입힌다면, 그녀는 이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왕의 요구를 거절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렇게 한다
고 해서 그 여종이 왕을 진정으로 사랑할까요?
물론 여종은 왕을 사랑한다고 말하겠지만, 정말로 왕을 마음속 깊이 사랑할까요? 혹시 왕
과 함께 살지만 두려움 속에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궁전에서 사는 여종
은 과연 행복할까? 이러한 사실은 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일 왕이 여종이 사는 작은 오두막집을 찾아가면서 휘하의 장병들을 데리고 화려한 행차
를 한다면 오히려 여종을 겁먹을 것입니다. 왕은 겁에 질린 하인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원합니다. 종속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 말입니다. 왕은 여종이 자신
이 왕인 것을 잊어버리고, 또 그녀 자신도 하찮은 여종인 사실을 잊어버리고 오직 사랑하기
만을 바랍니다.
"사랑만이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
니다. 여종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녀를 여왕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에 왕은 비천한 신분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거지처럼 옷을 입고
여종이 사는 오두막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일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었습니다. 즉 왕의 새로
운 신분이었습니다. 왕은 여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왕좌를 포기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이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보일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우
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찬송가 404장을 부르는 것
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까? 다른 것은 없습니까?
물론 우리가 생각하면 다른 많은 좋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
합니다. 아들을 주었다면 나머지는 다 선물로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
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였습
니다. 예수님을 주셨다면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들은 부스러기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
다. 아들을 주었는데 아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부귀도 당연히 우리의 것입니다.
미리 준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려면 우리 결혼하자 해서 결혼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가 되어 온
것입니다. 수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순간에 반지를 끼는 것이지요. 과거의
모든 순간이 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성경 창3:15을 보면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 모든 내용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내용입니
다.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오실, 그리고 오신 이야기입니다.
가장 필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 약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배
아픈 약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인간에게는 세상의 좋은 집 옷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라면
그렇게 해야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죄를 속죄할 어린양이 필요 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분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요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구세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입니다.
이사야는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
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관광지에서 돌아
오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내리막길에 들어선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
막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눈동자에서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 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는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 길을 한 개, 두 개, 잘 운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저 앞에 자신들의 마을이 보입니다. 이제 마을 모퉁이 어디엔가 버스가 자연
히 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을 입구 신작로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피하라고 소리까지 쳐댔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처럼 보였
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
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기 시
작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 하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둬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이예요." 마
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독생자 아들을 주시면서 힘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상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나 이 아들을 선물로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큰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저와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
세 잡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마음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
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 중에
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닫지 못해서 기쁨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행복할까요? 많이 가진 사람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입니까? 남들이 생각할 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을 느끼
는 만큼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
록 허름한 집에 살며 시레기 나물 죽을 끓여먹고 살아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사는 사람
은 참으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은 필리핀 사람이고,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일본사람이라
고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각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깊이 깨닫
고 느낄 때, 진정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십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느끼며 사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받은 하나
님의 은혜는 참으로 많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오늘 본문 8절-9절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우리에게 제
물로 바친 것이 선물입니다.
왜 선물이라고 하였을까요? 선물은 받는 자의 몫입니다. 감사할 수 있고 안 받을 수도 있
습니다. 예수 믿는 것! 모두 믿지 않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항상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이곳에 나타나면 많은 사람이 믿을
텐데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커서 보니 참 어린아이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수 믿으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볼펜을 1,000원을 주고 샀으면 1,000원 짜리입니다. 손목 시계를 10만원을 주고 샀
으면 10만원짜리입니다. 재벌 그룹 회장댁 사모님이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반지를 몇 억씩
주고 샀답니다. 그 반지는 몇 억 짜리니 조심스럽게 보관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의 목숨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나와 여러분 우리 값
은 얼마가 되는 것입니까?
독생자만큼의 값, 즉 몇 억 짜리가 아니라 "예수님 짜리"가 되는 것 아닙니까?
선물을 얻은 사람은 그 값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그래서 인생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산몸입니다. 달라요! 이게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들여 마시십시오. 바위처럼 무거운 인생의 짐도 조그마한 조약돌을
두 손에 든 것처럼 가볍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고 감사가 절로 나올 것입니다. 이왕 예수를 믿으려면 이 사랑이 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세
상도 작아 보이고 문제도 작아 보이는 경지를 터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면서 낮고 천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입니다. 하나님은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
해 태초부터 세상 끝날 까지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
이요 깊이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