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01일 (목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2001-12-24 20:50:21   read : 195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행22:7-1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다루는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에 있어서는 상당히 강하다'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들어 올 때는 견디지 못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 생활의 강점 그런 것들이 훌륭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각자 남이 갖지 못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에 강점이 있습니다. 30년 동안 새벽 기도를 안 빠지고 나왔다든지, 어떤 일이 있어도 수요 예배까지도 빠진 적이 없다든지 성가대를 했는데 15년 동안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든지 말하자면 그런 등등의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강점을 갖기 위해서 사람들은 굉장히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룹니다. 말 한마디 간단히 하기 쉽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남이 모르는 신앙적인 분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들이 잘못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행동을 나무라신 적이 없습니다. 금식하는 것을 나무라셨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을 비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고 보다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내면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깊이 하면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생각 속에서도 갖게 되고 삶 속에서도 갖게 되고 인식 속에서도 가지게 됩니다. 신앙 생활도 몰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간증거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바 예수에 미쳤다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가 불명확한 사람인 것입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고 믿었던 사람들은 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붙잡혀 가서 심문을 받을 때 그러했습니다.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했더니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이렇게 결박당한 것 이외에는 여러분도 다 나처럼 미치기를 원합니다" 예수에 매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내 신앙 생활에서 이것만은 지키려고 노력을 했다든지 하면서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신앙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추구는 사라지고 자신의 신앙적 추구 하나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이런 신앙의 삶은 살아 내야 하겠다고 하는 자기 암시적인 신앙의 추구가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선행과 어떠한 고상한 목표도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자기 속에 하나씩 둘씩 쌓여 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굉장히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기 의가 쌓여지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수준이 높든지 낮든지 각기 나름대로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짝을 맞추고 마치 블럭을 끼워 맞추듯이 맞추게끔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조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높이 쌓이면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해답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꾸 쌓입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이 속에서 쌓이니까 그 다음에는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 될 리가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완전히 반대편을 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잘못하면 성령을 받아도 안 깨집니다.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마음속에서 이런 무서운 것들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인 줄 알고 그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것이 편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나 문제는 그 한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는 곧 그것을 무너뜨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제껏 신앙 생활하며 살아 왔던 그러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무너뜨리도록 허락해 버리면 그러면 자기는 어디에 거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아집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입니다. 부서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격렬하게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고 격렬하지 않게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이 허무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집들이 허물어져 가는 경험들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신앙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신앙의 경험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이 감동을 받고 그 말씀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 세워진 것들이 무너지고 깨뜨려지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면 좋을 것 같은 신앙 생활을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적인 진전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알 못 낳는 닭처럼 오래된 사람들만 잔뜩 모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니까 자꾸 올라갑니다. 권찰에서 집사, 집사에서 안수 집사, 장로, 이렇게 자꾸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자꾸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인식의 중요성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그것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허물어져 깨어져야 할 것들 속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리 아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 속에 있는 잘못되어진 신앙의 구조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아니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정직해져야 합니다.
    스데반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던 사람들이 이상한 것은 그 설교가 마음에 안 들면 말로 반박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반박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질서 정연하게 성경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잘 하던 그들이 그것을 말로 못하고 돌멩이를 든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풀려서 다가오는데 내 마음의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해서 튀는 반감과, 말씀을 말씀답게 풀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올바르게 풀렸는데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부 반응들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에 대해서 자기를 화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잘못 풀려서 자신에게 전해질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반감은 말씀이 그렇게 풀려지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일이 훼방 받고 있다는 거룩한 번민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런데 오늘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정반대의 장면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이야기는 9장 이후에서부터 나옵니다. 물론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7장에 나오지만 9장에 나오고 15장까지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온 후 16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9장에서부터 28장까지니까 전체 19장밖에 안 되는데 그 가운데 바울의 설교가 몇 번나옵니다. 바울이 공중을 향해서 이방인을 향해서 또 심문을 받으면서 한 설교도 있고 여러 가지 변증과 설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개 안 되는 설교 가운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많이 있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사도 바울의 신학, 신앙, 삶, 삶의 목표, 인격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뒤바꿔 놓았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되어 있는 바울의 사상과 신학과 설교를 다 벗겨 놓으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극적인 체험 그것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체험이 얼마나 깊이 깊이 사도 바울을 움직였는지 설교 할 때마다 거의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떤 체험이었습니까?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이 성행한다고 하니까 그곳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갔는데 한낮에 정오쯤 하늘로서 태양보다 더 큰 빛이 비추면서 자기를 둘러쌌습니다.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하는 바울의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답변이 들렸습니다. 그 때 사울이 말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그는 다메섹을 향해 달려 갈 때까지는 무엇을 해야할지를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인생이 캄캄해졌습니다. 인생의 시간표에 없던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예수가 나타나니까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인생에 대한 인식, 인생에 대한 약도를 가지고는 인생의 길을 찾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가 여러분의 인생에 혼란을 준 적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혼란에 처했습니까?
    한 단계 더 나가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난 지 8일만에 결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갈 때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나 다메섹에서 사울이 만난 만남이나 만남은 같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울이 만났습니다. 인격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섬기던 시므온과 안나가 아이를 받았을 때에 그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만남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가 구속자로 오신 아기 예수라는 것을 발견할 때 "하나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옵나이까?"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이상한 결과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인데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사울이 알고 있었던 예수와, 시므온과 안나가 알고 있었던 예수가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쪽은 예수를 만났을 때 말하자면 캄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살아 온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인 줄 알았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경건하고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삶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 경건한 사울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의외의 것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얼마나 컸는지 자기의 신앙의 세계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니 이제껏 가지고 있던 자기 속의 이 신앙의 모든 틀들이 다 거짓말인 것으로 다 가짜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자기는 이제 자기 나름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신앙의 구조가 아무 것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그는 말하기를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자 소망하던 모든 일들이 성취되던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 양측의 사람들은 서로가 알고 있던 그 예수가 조금도 공통점이 없던 예수였습니다. 그 때 이런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찾아오시니까 온통 다 충격이었습니다. 다 부서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사울보다는 예수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알고 있는 그 부분 때문에 여러분들이 바울과 같은 체험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몰랐는데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무너졌고 여러분들은 대부분에서는 바울보다 그리스도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서는 도무지 무너지지 않으니까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생각을 정리해 놓고 있으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에 시므온과 안나처럼 반응하게 될 것이냐 아니면 스데반을 돌로 친 사람들처럼 반응하게 될 것이냐라고 하는 차이입니다. 이렇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입증되어지고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기의 잘못 쌓여진 신앙 인식과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기를 원할 뿐이노라고 하는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확인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도 취사선택해서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깊이 감격했던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면 그들은 말할 수 없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으니까 돌멩이를 들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돌멩이를 던져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의인을 죽이게 되기까지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의 살인범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는데 하나님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행하니까 엄청나게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잘못된 신앙에 대한 인식과 잘못 쌓여진 신앙의 구조물 때문에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미명하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삶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불순종하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맺음말
    사울이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이 순간에 비로소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 변하여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순간도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만을 붙들며 사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라는 그 고백을 할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바로 이 물음 속에서 철저히 무너져 버리고 그 다음에 완벽하게 무너진 그 속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건축하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무지한 우리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 속에 허물어지기를 싫어하는 모든 사악한 것들을 주님께서 새롭게 허물어뜨려 주시는 은혜를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은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깨어진 마음과 기도
    순종과 거룩한 영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할 때
    부활하신 몸에 남은 고난의 흔적
    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기이한 은혜에 감사하라
    염려와 기도(빌4:6-7)
    내게 나아와 들으라(사55:3)
    회개가 기도의 문을 연다
    새 사람을 입으라
    은혜 받기 위한 두 가지 준비
    말씀의 미각(味覺)이 사라졌습니까?(시119:
    복음을 위하여(행21:13)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