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해변의 새벽 2001-12-24 20:57:42 read : 209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4-17)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은 이 책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 21장이 없었으면 성경이 이상하게 될 뻔했습니다. 20장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적인 지도자인 베드로는 결국은 실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결정적인 순간에 모른다고 부인하고 넘어진 사람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21장이 복음서 4권과 사도행전 사이에 들어감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모임을 이끌어가는 베드로의 리더쉽에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야 비로소
21장의 무대는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에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고기잡이를 통해서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예수님께서 실패한 그 베드로가 다시 고기나 낚는 어부가 되었을 그 순간에 다시 찾아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처음의 부르심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다른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도 또 이상하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인줄 알아본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이 사람은 늘 덤벙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주시라 하는 말을 듣자마자 바다에 풍덩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마구 오십 간쯤 되는 거리를 막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분 앞에 뵐 면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딱 선 순간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자신에 속고, 세상에 속고, 사람들에게 속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모든 비극적인 신앙의 일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만 합니다. 베드로도 그 앞에 선 순간 모든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베드로에게 개인적으로 오셔서 용서해 주시진 않으셨던 것이지요. "나는 주님을 모르노라" 저주하면서 부인한 그 이후로 일대일로 예수님을 대면하는 것은 이것이 최초였던 것 같습니다.
실패한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쭈삣쭈삣 서있는 베드로에게 "너희 중에 고기가 있느냐.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와 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떡과 고기를 구우면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선을 가져오라 하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일거리를 주어서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큰소리 치면서 주를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 중보 기도가 능력을 발휘해서 베드로는 비록 실패했지만, 영원히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베드로의 말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이미 유감이 없었습니다.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을 찾으시면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2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회복을 받기 전까지는 매우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지만, 문제는 자기 가슴속에 남아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스스로의 죄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고, 스스로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 회복을 위해서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 번째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을 갈릴리 호수 가운데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조반을 베푸셨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함께 식사하시는 것입니다. 식사의 의미는 교제이고 교제의 의미는 한가족이요, 형제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계속 저지르게 되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한없이 고통스러워 집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제일 큰 문제는 실제로는 주님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있던 베드로 자신의 문제를 보게 하시고, 그 문제를 치료해 주시는 방법이 바로 교제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하는 도중에서 베드로는 목이 메어서 식사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식사 자리에 앉자 그는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식탁의 경험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매일 식탁을 마주하며 주님과 함께 먹고, 자고, 동거하고 동행하였던 그 3년 동안이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조반을 다 먹고 나서 드디어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경계심도 많이 풀어지게 되었을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사도 베드로야"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물으셨겠습니까? 만약에 "사도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으면 베드로는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대사도, 믿음이 반석같은 사람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을 때 "네"하고 대답하면 주님이 "그런데 왜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느냐" 하고 물으실 것 같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제일 처음 그저 평범하게 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 그 그물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던, 물고기 몇 마리에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던, 허무한 많은 인생들 중에 한사람인 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던 그 때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그 분위기로 돌아간 것처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다 비우고 하나님 앞에 오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 영적인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면서 베드로의 껍질이 벗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복을 바라는 사람은 정직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껍질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체면이 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체면을 다 살려 주시면서 회복도 시켜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별 볼일 없는 가문의 고기 잡던 어부야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우선 만족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직하고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게 됨으로 내가 갖게 되었던 무슨 직함, 무슨 명함,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것들을 의지하면서, 자기가 그런 사람인 것처럼 그런 껍질에 둘러싸여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처음 자기가 섰었던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될 그 죄인의 진솔한 모습으로 서는 데 실패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회복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현재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 물음에 대해서만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난날의 잘못에 사로 잡혀 있는데, 주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물으셨습니다.
사도들 중에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이 두 사람인데,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실패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유다는 돈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팔았지만,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도 실패하고 가룟 유다도 실패했는데 그 실패는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회개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제사장의 담장 뜰에서 새벽닭이 울 때의 회개가 참된 회개이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의심이 됩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슬퍼하고 울었고, 그 돈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판돈이로다 하고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결국 베드로는 여기 있고, 가룟 유다는 목메어 죽음으로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는 그렇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의 실패를 후회했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네, 저는 주님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커다란 차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핵심적으로 묻고 계시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에 어떻게 실패했고, 어떤 일들로 해서 넘어졌고, 어떤 일들로 말미암아 내가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되었나가 아닌,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코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삶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사명은 그 양떼를 사랑하기 전에 주님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그 양떼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교회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그 교회들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 밀알의 중심적인 사명을 감당할 지도자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님께서 실패한 사람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한 사람을 불러서 영광스런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 삼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21장을 보면서 나같은 죄인이라도 소망을 갖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던 하나님, 우리도 새롭게 일으키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벽의 하나님
사도행전에 들어가면서 베드로를 특별히 부르셔서 이 사명을 맡겼던 것을 사도들은 늘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그에게 앞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유일한 사도였던 요한도 그 자리를 베드로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실패한 사람 베드로가 그 가운데 자리에 서서 교회를 대변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베풀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실패한 자들을 회복시켜서 사용하시는 생생한 간증을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죄인들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격려를 받게 했되었습니다. 그 사건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야 될 사건이었단 것입니다. 요즘 내가 하나님과 그렇게 껄끄러운 관계에 있고, 주님이 용서하셨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껍질에 둘러싸여서 크게 으시대면서도 그 마음에 곤고한 것은 어떻게 헤아리지를 못하는 그런 상황인데, 바로 오늘 설교말씀이야말로 나를 향하여 하는 것인데, 그 사건은 바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신 때가 새벽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나타나셔서, 대화를 하시면서, 아침을 드신 것입니다.
눈을 감고 묵상해 보십시오. 새벽 시간만큼 좋은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에 갈릴리 호숫가는 잔잔한데,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고요합니다. 아직까지 해가 퍼지지 않았으니까, 갈매기조차 날지 않고, 파도소리만 쏴- 쏴- 들려옵니다. 그리고 아무런 잡음이 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만 안개를 가르고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해변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 혼자 서 계셔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고, 그분만을 주목할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디베랴 바닷가로 다가오는 것 같은 기분으로 새벽 시간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당으로 걸어오는 길은 안개 낀 갈릴리 해변같이 생각하면서 새벽 기도 나오십시오. 멀리서 어렵게 나오면 나올수록 주님이 더 빨리 다가가서 밥상을 베풀어주시고 교제에로 부르시면서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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