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責望)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惻隱)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0)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는 연대로 따지면 주전 약 620년 경인 요시야 임금 때부터 예언사역을 시작하여 유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586년 이후에까지 예언활동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할 때에는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100여 년 전에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에 의해 망해버린 뒤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31장에서 본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읽은 본문 앞부분은 유다 나라에 대한 예언이고 바로 뒤편까지는 이미 망해버린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책망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를 깊이 생각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을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가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 북왕국 이스라엘이 그렇게 회개하면 여호와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말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범죄해서 망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벅찬 애정을 표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반역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책망하여 말할 때조차도 그를 깊이 생각하시고 나아가서 측은히 여기사 반드시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그들을 다루시는 일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향해 하시는 말씀 그 바로 앞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기도하는 가상적인 장면이었고 그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긍휼의 마음을 불붙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인식
우리는 종종 기도의 영이 메마르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냉담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우리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차갑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냉담해지신 것처럼 느껴질 때 사실은 하나님이 냉담해지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차가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탄식하며 내가 정녕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나를 돌이키소서 내가 돌아가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스라엘이 회개하며 드리는 이 기도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차례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이 고난을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셔서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주시고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인정해 주실 정도로 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죄가 없음에도 받는 애매한 고난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의 잘못과는 관계가 없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우리의 죄와는 상관 없이 순결한 가운데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경솔하게 스스로를 그런 경우라고 추켜세워서는 안됩니다. 비록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 겸손히 물으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 고난에 대해 더욱 안전한 접근이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책이고 진실한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모든 잘못된 관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첩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막힌 담을 헐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꾸어야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기 의에 빠져있는 사람들, 고난당하는 자신이 마치 욥의 분신이나 된 것처럼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고난 속에서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는 마음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한 자와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대한 소망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회개의 특징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회개였습니다. 단순히 너무 고통스러워서도 아니고 죄를 방치하는 것이 힘들어서도 아니고 다가올 심판이 무서워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과거에 대한 깊은 후회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돌이킴의 간절한 소원이 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회심이라고 불리우는 양면, 즉 한 쪽으로는 자신의 지난 죄를 깊이 회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가지는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우리가 오늘날 당하고 있는 많은 고난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죄 때문이라는 것으로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고 두 번째로는 우리들이 이대로는 살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야겠다고하는 강한 욕구를 가져야지만 그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바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어붙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다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실존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느끼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모든 관건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열려서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새겨지고 들려지는 어떠한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이 세상과 마귀가 끝없이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시험하고 그리고 때로는 이런 마귀와 세상의 공격이 없어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끊임없이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 가려고 합니다. 큰 은혜와 하나님을 향한 감격 속에서 살 때에는 거의 우리 속에 어떠한 죄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잠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독버섯이 솟아나듯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본성, 주님의 영예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하고 십자가를 지고 살기보다는 십자가를 타고 다니며 살고자 하는 사악한 우리의 옛 사람의 본성이 다시 솟아나는 것입니다.
깨뜨려진 마음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정말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충만하고 뜨거운 하나님과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처럼 죄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회개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은 말하기를 “살아있는 성도의 가장 일차적인 특징은 깨트려진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깨트려진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정말 자신이 잘못 살았기 때문에 '깨트려진' 마음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깨트려진 마음'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기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마음, 그 충만한 하나님과의 친교의 감격 속에서 살기를 사모하는 채워지지 않은 고통스러운 갈망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것은 오직 죄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성도일수록 그는 회개할 필요가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삶이 지향해야할 표준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준에 대한 집착이 그들의 삶을 더욱 온전하게 합니다. 한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는 그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잘 나타나며 그리고 그것은 회개의 깊이를 나타내줍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갈망하는가는 회개의 깊이를 보면 압니다. 회개의 깊이는 곧 사랑에 대한 갈망의 깊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오늘 이 에브라임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이 민족적인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였을 때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과 사랑으로 넘치는 마음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어떻게 입증되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관계를 인정하여 주신 것이고, 둘째는 그들을 깊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반문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것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에브라임은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느냐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빼어나서 훌륭한 직장에 취직해서 남들이 50만원 벌 때에 500만원 받고, 남들이 시내버스 타고 다닐 때에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수단이 좋으면 남들이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면서 살 때에 커다란 회사를 가지고 수많은 종업원들을 거느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에서 감자 몇 개, 고구마 몇 개 놓고 팔면서 살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학식을 많이 쌓아서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지성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살아가는 양태에 불과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 셋을 놓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천사들이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섬기던 그 세 천사가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천사는 땅에 있는 어느 나라에 가서 제왕 노릇을 하며 내 명령을 받들고 일하라, 두 번째는 너는 가서 경제계의 큰 별이 되어서 돈을 움직이면서 내가 시키는 데로 해라, 세 번째는 너는 저쪽 동네에 가서 똥을 푸면서 나를 섬겨라 했을 때 그들이 정신나간 천사들이 아니었더라면 그 천사들은 똑같은 정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서 똑같은 정신으로 제왕 노릇을 했을 것이고 큰 사업을 했을 것이고 똥을 펐을 것입니다.
똥을 푸는 천사는 자신은 똥을 푸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똑같이 불러서 명령하셨어도 자기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고 왕으로서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천사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 명령을 나누어주셨고 한 사명이 나에게 떨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왕이 되고 사업가가 된 천사들에게 열등감을 느꼈거나 다른 천사들이 그 세 번째 천사에게 우월감을 느꼈을 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느냐 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깨닫고 자기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아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결코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룩한 친교와 교통 속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발자취는 기도의 생애로 이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처럼 살고 사는 것처럼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들이 깊이 침체에 빠지고 천하보다도 귀한 구원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쁘지 않는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관계와 사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된 뉘우침으로 기도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는 내가 가장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누구도 너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리라."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친밀함이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없거나 매우 모자라기 때문에 우울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빨리 회복해야 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사랑입니다. 소낙비처럼 퍼붓는 그 사랑의 쏟아짐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도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회개로 기도의 문을 열고 이렇게 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빛 가운데 하나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