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새 사람을 입으라 2001-12-25 19:44:57 read : 165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골 3: 5∼11
이번 겨울은 추위가 유난히 심하고 늦게까지 갑니다. 그러나 곧 봄이 올 것입니다. 봄이 오면 우리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무겁고 두터운 겨울옷들을 벗고 가볍고 화사한 봄옷들을 입습니다.
골로새서 3장 앞부분에는 "벗어 버려라"는 말이 8절과 9절에 한 번씩, 두 번, "입어라"라는 말이 10절과 12절에 한 번씩, 역시 두 번 나옵니다.
바울은 무엇을 벗어버리고 무엇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넉 장으로 된 편지 성경인데 1장과 2장은 교리를 가르치는 내용이고 3장과 4장은 실천적 권면, 또는 윤리적 명령입니다.
바울의 편지 성경들은 대부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이론을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실천을 말합니다.
골로새서는 짧고 강하고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3장을 예로 들어보아도 1절 "위의 것을 찾으라" 5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9절 "서로 거짓말하지 말아라" 15절 "감사하는 자가 되라", 군대식 명령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쌍둥이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에베소서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골로새서는 단호한 느낌을 주는 것이 다른 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신앙이 좀 느슨해졌다. 조여야겠다'하는 생각이 들거든 골로새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벗어 버려라" "입어라"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갈아입어도 좋고 갈아입지 않아도 좋다"가 아닙니다. "꼭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아입지 않으면 성도로서 살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자, 바울을 무엇을 벗고 무엇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9절을 보세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1절을 보세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옷에는 외투, 겉옷, 바지, 저고리, 속옷, 양말, 액세서리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목록이 8절에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입의 부끄러운 말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목록은 12절 이하에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입니다.
옷을 입으면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매야 하는데 새 사람을 입을 때 마지막으로 매야할 것을 14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오늘 1부 예배에서는 교사 임명예배를 드리고 2부 예배에서는 졸업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의 교사는 학생들이 새 사람을 입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합니다.
졸업은 무엇입니까?
새 사람을 입기 위해 한 계단 더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입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조세형 씨가 믿음을 갖고 새 사람이 되어서 모두 기뻐했는데 다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세형 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먹세계를 휩쓸다가 법의 제재를 받게 된 분들이 믿음을 가지고 새 사람이 되었다며 간증도 하고 선교활동을 하다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다시 법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일들을 기억합니다. 모두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탈주범 신창원 씨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신창원 씨를 조사한 검찰 수사관이 크리스천으로 검찰 신우회 회원인데 신창원 씨는 이 수사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많으면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갑니다. 평생 이런 미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미움을 이제 버리니까 마음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편합니다."고 썼다고 합니다.
믿음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된 신창원 씨가 옛 사람을 완전히 벗고 온전한 새 사람을 입게 된다면 그가 탈옥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라고 바울은 3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땅의 일들에 대해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혈기에 대해 우리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아는데 이는 물질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죽이라"라는 극단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성경에, 더구나 구약도 아니고 신약에 죽이라는 명령이 나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죽이라는 것은 살인명령이 아닙니다. 살구명령(殺舊命令)입니다. 옛 것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은 죽음의 신앙입니다. 옛 사람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합니다. 십자가에 예수님만 달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옛 사람도 달려 있어야합니다.
어떤 분이 쉽지 않은 결단을 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아버지가 장로님으로 이 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인데 목사 안수를 받는 날 아침에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내가 죽는 날입니다. 저는 죽기가 싫어서 오늘 새벽까지 이 안수를 받을까 말까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죽기로 결심하고 이제 안수식장으로 나갑니다. 아버지, 이 아들이 잘 죽을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인 장로님도 "오냐, 나는 오늘이 아들 잃는 날이라고 생각하니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밤새 불을 끄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을 다 보았다. 잘 죽거라" 했다고 합니다.
3월이 되면 연회가 열리고 연회에서는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는데 안수 받는 목사님들이 이런 자세로 안수를 받으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분은 지금 차세대 한국교회의 리더라는 말을 들으며 아주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가운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하는 분이 있습니다.이 분은 자기의 주장을 별세신학, 또는 별세목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새 사람을 입고 거듭나야 합니다. 세례의식은 이런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졸업생들 가운데 대학을 졸업한 분들, 대학원을 졸업한 분들, 논문 쓰기 위해 수고 많이 하셨지요?
논문을 쓸 때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이던가요? 자료를 찾는 일입니다.
감리교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이 되려면 매년 논문을 쓰고 시험을 치고 자격심사를 받아야하고 품행통과를 해야합니다. 며칠 전에 준회원 목사와 전도사님들의 논문 심사가 있었습니다. 논문을 심사할 때는 뒤의 참고문헌 목록을 먼저 봅니다. 자료를 얼마나 열심히 찾았나, 얼마나 좋은 자료를 사용했나 하는 것이 거기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은 그 이상의 열심을 가지고 위의 것을 찾아야합니다. 하늘 나라의 일, 예수님의 가르침, 이것을 바울은 위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닮으려고 해야합니다.
10절은 새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완전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애써야 하는데 요즘 사회에는 거꾸로동물을 닮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아파트를 분양하려면 먼저 모델 하우스를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선전을 합니다. "우리가 짓는 아파트는 이렇게 멋있고 살기 편합니다." 건축회사는 그 모델 하우스 그대로 지어야합니다. 완공된 아파트가 모델 하우스와 다르면 말썽이 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모델 하우스 그대로 우리의 삶을 건축해 가야합니다.
잘 알려진 중진 법조인 한 분이 쓴 수필을 읽었습니다. "나는 판사로 임명받아 처음에 어느 부장판사의 배석 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분은 참 훌륭한 분이었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이었고 법관으로도 훌륭한 분이었다." 그리고 그 분의 훌륭한 점들을 여러 가지 적었습니다.
수필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 뒤로 나는 법정에서 피고를 심문하는 방법, 재판을 진행하는 방법, 판결문의 문장, 나가서는 살아가는 자세 모두 그 분의 것을 닮으려고 애썼다. 얼마 전에 그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초임 판사 시절에 이런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참으로 축복된 일이었다"
닮을만한 사람, 내가 닮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축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쓸 수 있는 것은 그것보다 축복된 일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다보면 위의 것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새 사람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합니다.
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를 「공동번역 성경」은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참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제일 차원 높은 지식입니다. 예전에 신학을 학문의 여왕이라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막연하게 아는 것,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세하게 알고 정확하게 알고 안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실천적 지식을 말합니다. 새 사람이 가져야 하는 지식은 이런 것이 되어야합니다.
져스틴(Justi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기원후 165년에, 그러니까 1836년 전에 세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학문을 좋아해서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스토익 학파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했고 피타고라스의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내 마음 속에 진리의 불이 일어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철학이 과연 참 철학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게 된 뒤 자기가 공부한 것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호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기독교를 변호하는 사람을 호교론자(護敎論者)라고 하는데 호교론자들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져스틴입니다.
이 분은 나중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해 교회역사에 순교자 져스틴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지식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졸업생들은 '졸업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졸업이 없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더 힘써야 한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고 있는 간증집에 이런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연세가 좀 많은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권사님은 결혼하기 전에 농촌에서 살았는데 시집을 가보니 시어머니가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결혼한 다음 날부터 새벽기도회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한 번은 시어머니가 몸이 아파서 저녁예배에 못 나가게 되어 혼자 나가게 되었는데 '잘 되었다'하고서 이웃 마을에 놀러갔다가 예배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왔더니 시어머니가 "아가, 오늘 저녁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니?" "광고는 어떤 것들이 있었니?" 묻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에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빠짐없이 나가니까 교회의 권사님들이 "저 집은 이방자부(異邦子婦)를 보았는데 어쩌면 저렇게 믿음이 좋을꼬? 참 축복 받은 집이다"라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며느리를 예전 농촌교회에서는 '이방자부'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예배에는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생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니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을까?'
어느 날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거듭난다는 것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로구나!'
하나 더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려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껍질이 조금씩 갈라지면서 병아리가 빠져 나옵니다. '아, 거듭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로구나! 나는 지금 병아리가 나오려고 껍질이 조금 갈라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구나! 어서 이 껍질에서 벗어나서 저 병아리처럼 자유롭게 삐악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어야겠다'
그렇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병아리가 달걀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교사들은 어미 닭의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학교교육은 기계로 부화시키는 인공부화일 수도 있는데 교회교육은 인공부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사가 사랑으로 품어서 깨도록 해야합니다.
이 분은 자기 믿음을 "콩나물 시루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밑에 구멍들이 있어서 물은 다 빠져나가지만 콩나물은 자랍니다. 교회에서 듣는 것, 배우는 것 다 빠져나가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자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콩나물 시루 안의 콩나물들이지요. 믿음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지는 않지만 그러나 자라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꼭 입어야합니다.
새 사람을 입지 않는 것은 나비가 되어 날지 않고 애벌레로 머물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비, 얼마나 예쁩니까? 반대로 애벌레,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병아리가 되어 달걀을 깨뜨리고 나오지 않고 옛 사람이라는 달걀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달걀은 먹을 수도 없습니다.
졸업생들, 새 사람을 입고 힘찬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옛 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 새 사람을 입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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