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1. 4.22
본문 행 1:4-8
내용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어떻게 사셨는가 그리고 언제 다시 오시는가를 알려면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끔 성경은 제쳐두고 무신론자가 쓴 책을 읽거나 불교인이 쓴 책을 읽었노라며 예수님의 생애나 성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이 모든 판단과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설명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설명은 제자들의 설명이나 사도들의 설명은 제자들의 설명이나 사도들의 설명보다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8에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10을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상의 두 구절만으로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상의 두 구절만으로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 2대 독자 외아들 돌잔치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돌잔치 상을 차려놓고 아이 앞에 몇 가지 소품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연필, 실타래, 돈, 책 따위 등. 눈앞에 있는 것들을 살피다 책을 손으로 움켜쥐자 가족들이 손뼉을 치며 공부를 잘하겠다며
좋아했습니다. 잠시 후 책을 던지고 돈을 움켜쥐자 가족들은 더 탄성을 지르며 부자가 되겠다며 좋아했습니다. 돈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이번엔 실타래를 손으로 움켜잡자 가족들은 소리를 지르며 실타래처럼 명이 길겠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기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고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오신 뜻을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고 바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드디어 승천하신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4절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했고, 5절에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인생 성공에서도 필요하고 신앙생활에서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장(子張) '이 공자를 떠나면서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미덕을 가르쳐 주시지요 " 그러자 공자는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것이 제일이니라 " "어째서 참아야 합니까? "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이요 제후가 참으면 땅이 커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갈 것이요 형제가 참으면 집이 부귀할 것이요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같이 해로할 것이요 벗끼리 참으면 서로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요 자신이 참으면 화와 해가 없을 것이니라 "
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공자의 대답은 "천자가 참지 않으면 나라가 빈터로 변할 것이요 제후가 참지 않으면 몸조차 없어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지 않으면 법에 걸려 죽게 될 것이요 형제가 참지 않으면 각각 분거할 것이
요 부부가 참지 않으면 자식을 외롭게 할 것이요 벗끼리 참지 않으면 정의가 멀어질 것이요 자신이 참지 않으면 근심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라 "
참아야 성공하고 부부가 행복하고 형제가 화목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참아야 성공합니다.
인내를 휘포메노(hupomeno)라고 합니다. 그 뜻은 '…밑에 머무르다 '는 것입니다. 휘포모네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즐거운 견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란 힘들고 무거운 것에 짓눌리면서도 참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는 50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15을 보면 남아서 기다린 사람의 수를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나머지 380명은 기다리지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그곳 현장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 날 참고 기다리고 있던 120명만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열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 한살 때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 공에 맞아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말짱하던 아들이 앞을 못 보는 맹인이 되자 어머니는 화병으로 2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절망과 슬픔을 견디지 못해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하나 남은 혈육이었던 누나마저 공장일로 과로하다 죽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의 늪 속에 빠져있을 때 목사님을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기로 작정하고 갖지 못한 한가지 때문에 불평
하지 않고 가질 수 있게 된 열 가지 때문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세대에서 교육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72년 미국 피츠버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3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미국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영우 교수입니다(57세).
미국 부시 대통령은 강교수를 장애인정책보좌역(차관급)으로 발탁했습니다. 큰아들은 하버드 의대를 나와 현재 듀크대학 안과전공의로, 둘째는 듀크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입법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아들에게 늘 가르친 좌우명이 있
습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라, 자신감을 가져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시련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원망하고 자학했다면 오늘의 강영우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힘들어도 우리의 영원한 예루살렘이신 예수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일으키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 120명만 성령을 받았습니다.
2. 호기심을 버리라
6절을 보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 "라고. 주님의 대답이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고.
주경가 벵겔(Bengel)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 들어있는 시간 문제를 찾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다 "고 했습니다.
믿음과 호기심은 다릅니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겠습니다. 결혼하기 전의 남녀는 호기심 천지입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호기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늘 아내가 들고 다니는 핸드백 속이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방정맞게 핸드백 속을 뒤져볼 수도 없었습니다. 뭘 넣고 다닐까?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 어느 날 함께 밖에 나갔다가 공중전화를 걸겠다며 저더러 핸드백을 가지고 있으라며 맡겼습니
다. 저는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핸드백을 열고 드디어 국정감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속은 만물상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손수건, 입술에 바르는 루즈, 거울 달린 컴펙트, 휴지, 이쑤시개 두 개, 손톱칼, 동전지갑, 현찰 3만 8천 5백 8십원, 껌 반개, 제일 작은 성경찬송... 등. 결혼한 부부가 일평생 호기심으로 남편의 양복주머니를 뒤지고 아내의 핸드백을 뒤지며 살수는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게 됩니다.
성경을 호기심으로 읽지 말고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교회도 호기심으로 다니지 말고 믿음으로 다녀야 합니다. 예수도 호기심으로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오늘도 능력과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능력과 기적을 TV 호기심천국 프로그램에서 보는 것처럼 호기심 프로로 보면 안 됩니다. 병자가 고침 받고 죄인이 회개하고 삶이 변하는 것은 호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
는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과학은 호기심이 동기를 부여해 성립되지만 신앙은 믿음이 동기를 부여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려고 하지 말고 믿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배웅하기 위해 목사님이 현관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목사님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해도 그다지 신통한 설교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나가다가 "목사님 오늘 설교 죽 쑤셨
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용케 알아 맞추시는군요. 맞습니다. 제가 오늘 강대상에 올라가보니 교인들이 모두 병든 얼굴들이어서 죽을 쑤어 주었습니다. 권사님 죽 잡수신 소감이 어떻던가
요 "
여러분 설교도 호기심으로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으십시오.
3. 증인이 되리라
8절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셨다 "고 했습니다. 승천하시며 마지
막 남기신 말씀이 곧 "증인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증인을 헬라어로는 말투레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순교자라는 것입니다. 순교자적 각오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증인의 허위진술을 위증이라고 합니다. 증인은 침묵하면 안 되고 진신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해야 진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예수 믿어야 성공합니다
예수님이 하십니다 "라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내 가족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말해야 합니다.
산 예수를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위증입니다. 증인이 침묵하는 것은 증언거부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됩시다.
예수를 증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