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었던 마음을 깨우자 2001-12-13 20:42:07 read : 175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4월 22일
눅 24:30-35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평안이었습니다.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평안이 있을 찌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부활주일 하루만의 축제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어야 합니다. 부활주일을 지나고도 평안을 되찾지 못하고 기쁨을 도리어 상실하면 이것이 불 신앙이고 엠마오의 제자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고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열한 번 나타나셨고 네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의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사랑하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님을 사랑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신앙 회복
우리 교회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어 보이는 멋쟁이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 그리고 집사님들 중에 그런 분들이 참 많아요. 한 열살 정도 아래로 계산하면 적당한 분들이 너무 많으십니다.
할머니답지 않은 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아요? 젊은이보다도 더 열려진 사고와 싱싱한 의욕을 가지고 희망적 미래를 꿈꾸며 오히려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도전을 주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연세는 들었지만 신앙적으로는 파릇파릇한 청춘과 같은 신앙을 느낄 수 있는 분들이지요.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회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영적으로 회춘하시는 분들입니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이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봄을 맞이하고 그런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부활되기를 소원해봅니다.
교회마다 부활절이 되면 여러 행사를 하고, 여러 선물로 부활을 기념하지만 부활절에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주변에 전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있어야 할 자리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두 제자입니다. 그래도 많은 다른 제자들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지만 두 제자는 그곳을 떠납니다. 그처럼 분노가 치밀 때 성격적으로 참지 못하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인도가 있기 전에는 복된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성공의 제일 요소가 무엇일까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작은 약속입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큰 약속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자산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고어와 부시 사이에 TV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 토론에서 부시는 어떤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았습니다. 토론 후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누가 더 토론을 잘 했느냐?" 조사해보니 고어가 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지지율은 오히려 부시가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부시가 약속한 것을 지킬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폭넓은 지식, 폭넓은 약속보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조그만 책임이라도 힘써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부드럽게 사랑으로 감싸안으세요
14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쓸쓸한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 사명을 망각한 제자들에게 찾아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며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두 제자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까? 누가 와서 "네가 정말 신앙인이냐?"라고 말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너무 양심적이어서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서 "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너무 다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다그치기도 하고, 때로는 성도가 목회자를 다그치기도 하고, 성도들끼리 다그치기도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다그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갈등과 상처와 아픔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부족한 제자들을 다그치며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한 단계 한 단계 제자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러한 겸손한 사랑과 용서의 기초 위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이 이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세요
주님의 질문을 받고 글로바라 하는 제자가 자기들에게 벌어진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5절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오늘 이 아침 우리들의 심령에 찔림이 되는 순간, 신기하게도 신앙의 힘과 능력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주께서 고난받아야 영광이 된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고난이 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비 맞는 것을 염려하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삽니까? 아직도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정말 더디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새겨보고, 더 믿음의 도리를 따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여 나의 나 됨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두려우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포가 문을 두드릴 때 믿음으로 문을 열면 문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과 공포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는 비결
결국 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고 엠마오 근처에서 여관을 잡으면서 주님께 자기들과 함께 계셔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식사하실 때 주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 떡을 먹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들은 그때서야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는 몇 가지 비결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감사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30절에서 축사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인데 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신비하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서로 감사의 말을 할 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인의 최고 인격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삶이 없이는 행복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욕구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가지면 절대 창조적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철이 들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감사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순간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총을 실어 나르는 수레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떡을 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낯선 좋은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분과 사랑의 떡을 떼는 순간 그들은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낯선 분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떡을 함께 뗄 때 우리의 눈은 밝아지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 나눔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에 처한 이웃을 도우십시오. 낯선 사람일지라도 도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지. 다른 사람들이 돕겠지."하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어 하나님께서 알게 한 것이 아닐까요?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말은 단순히 착한 일 하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그 길이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을 만나는 매우 소중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족 사랑이 대단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씀씀이가 아주 달라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이 가족 내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가족 개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게 된 어려운 이웃을 봐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사랑이 가족을 넘어서면 더욱 큰 가정을 얻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긴 삼일 전에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사실을 진정으로 묵상하고, 말씀대로 자신의 사랑의 폭을 확대시켜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 진리에 대한 눈을 뜨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투구
지난 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를 한 애덤 킹(한국명 오인호·9세)에 대한 찬사입니다. 스무 번째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많은 행사가 열렸지만 킹군과 그를 입양한 찰스 로버트 킹 가족이 전한 감동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장애인을 포용해야 할 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킹은 태어날 때부터 무릎 아래가 없었고 손가락마저 붙어있는 중증장애자였습니다. 친부모마저 포기한 그를 미국인 킹씨 부부가 입양했습니다. 친자녀가 셋인데도 한국인 넷을 포함해 일곱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킹씨는 "지난 7년 간 아이들이 스물 한 번 수술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술회했습니다. 빨강 파랑의 티타늄 다리로 걸어나와 공을 던진 킹군은 내년엔 손가락 수술을 받을 거라고 했습니다.
킹군처럼 세상에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적지 않습니다. "오체 불만족’의 저자인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씨는 얼마 전 대학 후배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습니다. 선천성 사지절단 장애자인 그는 자신의 신체를 "초개성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낙천적인데, 요즘은 스포츠 평론가로 활약중이라고 합니다. 연전에는 하반신 없는 여성의 출산과 육아 스토리가 TV에 방영돼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이들이 장애와 불가능을 딛고 "홀로 서기"를 한 배경에는 주위의 따뜻한 보살핌과 정상인과 다름없이 대하는 열린 의식이 깔려있습니다. 장애인을 밝게 키워낸 부모들과 기꺼이 그들의 친구와 배우자가 되어 주는 사회야말로 "장애인 천국"이 아닐까요? 요즘은 신체장애 못지 않게 인격 장애인들까지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병들면 신체든 정신이든 온전할 수 없는 게 이치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떡을 떼어야 하고 이웃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도임을 내세우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겁고 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웃의 형편과 신앙과 사정을 살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큰 의미의 행복과 축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있고, 차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판자집에 살고, 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사실상 가난한 자일 것입니다.
물은 계속 퍼내야 샘 근원이 튼튼해지고 맑은 물이 더욱 생겨나듯이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정으로 삶과 사물을 보는 변화된 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떠질 때 우리의 눈이 변화되면 이웃도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에게 시야의 변화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구했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야곱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축복을 구했는데 그 축복은 소유의 넉넉함을 구하는 축복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구하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야곱은 세상적으로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자. 그는 이제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갈 길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형 에서를 만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원수였던 형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형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그처럼 내가 변화되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변화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도 나를 새롭게 만나주고 새로운 차원에서 대해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용서하는 마음은 건강의 제일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 착한 여러분들이 먼저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때로 별로 큰 일도 아닌데 화를 잘 내고 얼굴이 벌겋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일찍 뜨고 싶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진정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의 떡을 떼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서로를 위한 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랑과 위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위해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떡, 용서의 떡을 같이 떼어야 합니다.
한때 싸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당신이 외롭고 쓸쓸할 때 내가 당신의 위로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미로운 가사입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도 좋다고 많이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에서 위로가 되어주겠다는 것의 실체는 바로 마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 노래가 마약을 찬양하는 노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종류의 마약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신비한 효능을 가진 모습처럼 다가오지만 참된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를 이어주는 참된 위로는 서로 사랑의 떡, 용서의 떡을 떼는 것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어떤 축복, 다른 어떤 은총을 구하겠다는 것입니까? 단순하지만 사랑의 길, 용서의 길이 진짜 길인 줄 알고 그 길을 구하길 바랍니다.
물론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쉬운 경우도 있겠지만 용서는 대개 십자가를 동반하고 고뇌를 동반합니다. 그처럼 고뇌가 없는 용서는 진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한번 환경을 보십시오. 인생의 먹구름이 하나씩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3. 말씀을 듣고 뜨거워질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떡을 뗀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그 순간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제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님은 말씀 속에서 현존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말씀을 진지하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뜨거워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지하게 성경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을 받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지 말고, 자기 취향에 따라 변질시키지도 말고, 말씀 앞에 정직해지시고, 말씀으로 수술 받을 각오를 해 보십시오. 어떤 다른 희한한 신앙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앙은 선전이 아닙니다. 다만 진솔하고 겸허하게, 들으려는 심정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뜨거워 졌다는 것은 진리에 접촉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 졌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32) 뒤늦게나마 깨달은 두 사람의 고백은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을 상상할 때 인간의 마음은 싸늘해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식어진 인간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식어졌다면 말씀의 깊은 세계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쉬임 없이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드릴 때 가을볕에 잘 익은 열매처럼 속사람이 영글어 갈 것입니다. 마음도 가슴도 뜨거운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의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노상(路上)에서 숙소로 모시는 아름다운 인간미가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면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때 매사가 억지가 되고 억지로 하는 모든 일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오히려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 오면 기뻐서 날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먹어도 기쁩니다.
뜨거워진 마음은 사랑의 동력이 됩니다
찬바람 부는 인간의 싸늘한 마음에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눈 속에서 할미꽃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운 자만이 우정과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자, 친절하자"고 아무리 결의 대회를 열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마음에 열이 오르면 친절하지 말라고 해도 친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길가에 혼자 남겨두지 않고 숙소로 모셨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감화 받은 사람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합니다. 성령에 감동된 뜨거운 마음은 남의 처지를 그대로 보고만 넘기지 않습니다. 뜨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밤길을 홀로 가는 외로운 나그네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행하는 복된 신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만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마침내 영에 눈이 열려서 부활의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비전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용기가 생깁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어버린 절망의 예수가 아니라 무덤을 헤쳐 버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님을 그들은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하여 도망가던 제자들이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뜨거워진 마음은 그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극은 그들의 발걸음을 석양에 지는 낙조를 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더 이상해지는 서산을 향해 내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해뜨는 동쪽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행진은 해 지는 쪽을 향한 석양의 행진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벽의 여명을 찾아가는 새 아침의 행진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떠나왔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도시가 아니라 영광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 희망의 동산이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까? 이제 해뜨는 동쪽으로 여명의 아침을 향하여 힘차게 행군합시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전진형의 인간이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태웠고 그들이 외쳤던 부활의 소식을 싸늘한 대지에 훈훈한 열기를 일으켰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증거하는 그들의 행진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이 주님의 부활을 외치고 전진할 때 인류는 소생의 길을 되찾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말씀의 진리로 뜨거워진 기독신자의 발전과 전진을 가로막을 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우리의 행진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언제나 해뜨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하나님의 백성은 밤을 향하여 돌아가지 않습니다. 일이 좀 힘들고 고달프다고 해서 낙조를 향하여 엠마오로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식어버린 사람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이제 새벽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어둠을 뚫고 나가는 사람만이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된다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운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곧 엠마오를 거의 다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극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돌아가니까 정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두 제자도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을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까?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되지 않습니까?
신앙이란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은 커지고 문제는 작아져 보입니다.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동안 잠들었던 마음이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깨우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떨칠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의 터널을 잘 통과하고 나면, 이제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욕망으로 슬퍼하며 살던 존재에서 사랑으로 기뻐하며 사는 존재로 말입니다. 그렇게 거듭남, 그렇게 다시 태어남,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제 잠들었던 마음을 깨웁시다. 슬픔과 절망, 불확신한 자기의 미래와 불신앙의 터널을 통과하여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