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2001-12-13 20:45:53 read : 180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5월 20일
눅 15:11-24
여자에게 용서받지 못할 남자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나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올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기억 속에 남아 도저히 잊혀지지 않고 용납되지 않는 그런 일은 없습니까? 또한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아직까지 용서받지 못한 일은 없습니까? 어느 글에서 본 것인데 여자에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남자가 있다고 합니다. "눈이 단추만 해서 쌍꺼풀 수술을 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노출이 심한 여자만 보면 눈이 당구공처럼 커지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과거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머리카락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것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밥 많이 먹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반찬 투정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외박을 하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속옷을 뒤집어 입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남자들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에 담기 위해서 찾아 나섰습니다. 한 군인을 만나서 "세상에서 어느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황금 들녘으로 데리고 가면서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에는 이곳이 전쟁터였지만 평화로 이제는 황금 들녘이 되었기에 평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가는 그것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래도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혼 부부를 만나서 어느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림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문을 열자 오랫동안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 그 아내의 가슴에 안겨져 만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구나! 그러면서 그 엄마가 자기의 아이를 안고 있는 그 모습을 그렸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모든 사랑을 다 붓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그 사랑을 다 쏟아도 자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름답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엄마의 젖을 물고 젖을 통해서 전해지는 엄마의 사랑을 다 받아들이며 만족해하며 너무나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그 모습, 사랑의 관계가 완전히 형성된 그 모습이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신 그 크신 사랑과 용서를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드리며 사유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간들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그 아름다움이 예배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것들을 늘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는 것들은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시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일과 형편없는 모습의 두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볼 수가 있고, 반면에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이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을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추한 모습을 한번 봅니다. 탕자의 아버지의 사랑은 처음이나 끝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낳고 키워주는 부모에게 감사하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탕자는 집과 아버지의 곁을 떠나면 아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떠납니다. 부모님보다 재물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진정 나의 행복이 아니라, 재물이 나의 행복인줄 착각하고 떠난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정말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내리막길로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어떤 것을 드러낼 수 없는 형편까지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깨닫고 돌이킵니다. 돌이키고 보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보입니다. 돌이키고 보니까 부모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저 먼 거리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봅니다. 불쌍히 여기시면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목을 안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들의 상태가 최고로 더러워진 상태에 있습니다. 이 더러운 돼지보다 더 더러운 아들을 껴안고 내 아들이 돌아왔노라고 입을 맞추고 있는 이 장면, 저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돌아온 우리들을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돌아갔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탕자는 부모 품에 안기자마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입을 맞추고 목을 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가정을 떠나면서 내리막길로 향하는 흉한 모습이었지만, 여기서 돌이켜서 다시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돌아갑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지만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이 아버지의 사랑을 못 본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자기가 없어진 이후에 이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낄 수가 없습니다.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한 모습이 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지만 우리 가운데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예수를 잘못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동정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내적 확신의 외적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는 여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가 아니하는가로 선언하는 셈이 됩니다. 남을 존중하고 소중히 하며 넉넉히 용서하는 마음, 타인의 미숙함을 관용하는 아량,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과 능력이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앨버트 허버드는 "누구를 용서하거나 누구에게 용서를 받고 생기는, 사람의 입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기쁨이란 마치 하늘의 질투심마저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기분이다" 라고 말했으며,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이다" 라고 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죄는 취소될 수 없고 다만 용서될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얽어매지 말고 용서를 통해서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가만있어도 얽히고 꼬이는 게 일인데 거기다가 스스로 더 끌어들여 얽어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얽히고 꼬인 문제들을 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에 얽힌 우리들, 원한으로 묶인 우리들, 원망과 시기, 질투로 매여있는 우리들을 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모든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용서하지 못합니다. 힘이 있으면 보복하고 힘이 없으면 어디 두고보자 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삽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갚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용서입니다.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용서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용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란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교회가 용서를 말할 때 그 용서는 두 가지 차원의 용서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용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용서받은 감격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람의 용서입니다. 이 두 가지의 용서는 밀접한 관계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모든 사람에 대한 용서의 근원이며 뿌리라면, 사람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실천입니다.
우리의 용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용서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어떠한 노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는 죄악의 짐에 매여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빚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이 용서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에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용서받은 감격과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 속에는 용서받은 감격이 더욱 풍성하여지고 교회 가운데는 형제가 하나되어 연합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십시오.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용서는 우리가 형제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새로운 삶 그 자체
하나님의 용서는 새로운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새로운 삶이 우리의 삶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반대인 낡은 삶은 어떤 것입니까? 분열·미움·적대감·비방·닫혀짐입니다. 새로운 삶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없던 일로 한다든지, 잊어버린다든지,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손해가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대방을 그 실수, 그 아픔, 그 원한에, 묶어놓지 않고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한 감정, 우리의 아픔, 우리의 선입견에 상대방을 묶어 놓습니다. 우리 자신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담을 쌓습니다. 결국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용서한 그를 우리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 소외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서는 악의 확산을 방지하고, 진정시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새 생명의 흐름입니다. 이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가시적인 행위는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용서를 거절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용서받은 자인 그리스도인은 우리 이웃의 채무 탕감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십자가 사랑의 최고 절정
용서는 십자가 사랑의 최고 절정이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반포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죄 용서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구하고, 또 남을 용서해야 할 필연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 기독교이며 십자가 중심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덕과 감정이 있다면 첫째 감사, 둘째는 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유(赦宥)의 감정입니다. 따라서 원수에 대한 용서는 우리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특징이며 기독교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길은 같은 형제의 과실을 용서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용서함을 받은 뜨거운 감격과 감사가 자신에게 넘쳐야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3:13절에서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기도할 때 남의 허물을 용서해 줘야 응답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남을 용서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에게 용서를 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요일 3:23-24). 예수님의 마음 깊은 데서 솟아나는 그 샘물이 전 세계를 적시고 사랑의 강이 우리 앞에서 늘 출렁이며 시원하게 해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러한 긍휼의 은총을 맛볼 때 무제한의 용서의 복을 받으며,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고, 삶에 풍부의 복을 받습니다. 복을 받되 근심을 겸하여 받지 않는 축복입니다(잠 10:22).
미 대륙 서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카드놀이를 하다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방을 쏴 죽였습니다. 그 결과 청년은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청년의 과거를 아는 마을 주민들은 그 청년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한번 기회를 줘야 한다고 여겼던 주민들은 사면 진정서를 꾸며 주지사에게 전달했습니다. 마침 기독교인이었던 주지사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년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사면장을 써서 포켓에 넣은 뒤 성직자 가운을 입고 형무소로 갔습니다. 주지사를 바라본 청년이 벌떡 일어나 철책으로 다가오더니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지릅니다.“가, 보기도 싫어 당신 같은 사람 몇 번이나 만났어. 나도 다 믿어봤어 소용없어”주지사는“젊은이 내가 가지고 온 것이 있으니 기회를 주게”하지만 청년은 무엇에 분노가 치밀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습니다."듣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꺼지란 말이야!”“젊은이 내가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소” “듣기 싫어요. 당장 나가요”
청년과 대화하는 일에 실패한 주지사는 섭섭하게 생각하며 돌아섰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들어서더니 청년에게 말했습니다.“이 미련한 사람아, 방금 그 분은 사면장을 갖고 당신을 용서하러 온 주지사였어”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청년은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끝내 한 번 돌아선 주지사의 마음을 더 이상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는 사형집행을 당하던 전날 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살인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죽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는 집 떠난 둘째 아들이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하고 돌아왔지만 어떤 것도 따져 묻거나 과거를 캐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그 아들을 받아들여 가슴에 안아 줍니다. 더구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런 아들을 위해 잔치를 마련합니다. 용서란 책임을 안 묻는 데서 머물지 않고 오히려 베풀어주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허물을 탓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생명을 주시고 보태주십니다. 이래서 독일 시인 하이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일’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뭐라고 써 둔 줄 아십니까? ‘낚시금지’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깊은 바다에 던지운 그 죄들을 낚아 올릴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에 대한 가장 큰 모욕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에 종노릇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다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분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즐겁게 살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용서에 대한 우리의 보답입니다.
결론
영화 "친구" 에서 보면 잘못한 학생들을 짐승을 잡아먹을 것처럼 사정없이 무자비하게 때리며 비인격적으로 몰아붙이는 선생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사랑스러운 방법으로 선도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한 인간이 변화되고 새사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수록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동료나 친구 사이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아픔과 갈등 속에 살아간다면 제 아무리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은 못 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고 기쁨을 맛보는 일입니다.
새벽에 남산을 달리면서 깨닫는 교훈이 있습니다. 왕복 7km를 달리다보면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여러 번 나타나게 됩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나면 반드시 내리막길을 경험하게 되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고 상쾌한 마음으로 빠른 속도로 달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왕복을 하게 될 때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오르막길이 내리막길로 바뀌게 됩니다. 내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고 나면 오르막길을 다 올라간 다음에 내리막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