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2001-12-13 20:51:46 read : 200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7월 8일
창 32:22-32
아름다운 만남들
지난 6월 22일 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는 5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모인 가운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성악가 세 사람의 공연이 화려하게 펼쳐졌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이른바 ‘세계 3대 테너"의 음악회 정도가 아닌 축제였습니다.
이날 밤, 거구(巨軀)의 파바로티와 도밍고 사이에 서서 당당히 노래를 부른 단구(短軀)의 카레라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41세가 되던 해 파리에서 공연 중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았으나 팬들이 기증한 골수를 이식하고 투병, 기적적으로 회생했던 입지전(立志傳)적인 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라이벌 관계였던 파바로티와 도밍고를 묶어 "빅3"로 엮어낸 화해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연주회 때마다 언제나 가운데 서서 빅3의 절묘한 조화를 연출, 감동 어린 한여름 밤의 꿈을 팬들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서로의 마음과 음성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 사람의 음악가들은 정말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만남을 갖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끝없는 만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남에는 의미 없는 만남, 쉽게 잊혀지고 마는 그야말로 찰나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또한 숙명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의무적인 만남,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없는 담판을 지어야만 되는 그런 만남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 있고, 그렇지 못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남으로 좋아지고 잘 된 경우도 많지만, 만남으로 불행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강도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만난다는 것은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만남을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남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만남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만남에서 가정이 이루어지고, 만남에서 형제가 있고, 만남에서 사회와 국가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보면서 아름다운 만남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급사회의 특징은 정글의 세계(jungle society)와 같습니다. 야수들의 세계처럼 잔인과 비정으로 얼룩진 약육강식의 원리가 좌우되는 사회입니다. 대화도 없고, 예절도 없습니다. 다만 먹느냐, 먹히느냐의 살벌한 싸움만이 있는 곳입니다. 이 보다 좀 발전된 사회를 중급사회입니다.
중급사회의 특징은 스포츠의 세계와 같습니다. 무법천지의 정글의 세계와는 달리 규칙에 따라 서로 다툽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우호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 하겠지만 여기에도 승자와 패자가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웃는 자가 있으면 그늘진 곳에서 우는 자가 있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고등 공동체의 특징은 심포니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즉 교향악과 같은 사회, 협동과 조화로 이뤄지는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심포니 사회는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공생 공존의 사회입니다. 잡음과 소음의 세계가 아니고 아름다운 소리, 화음의 세계입니다. 즉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되는 승자의 세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절제합니다. 인내합니다. 양보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곧 그것은 고등공동체의식으로의 인식 전환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만남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가지려고 했던 지난날의 야곱이 아닙니다. 재산을 오히려 내어놓습니다. 에서도 극구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33:9). 빼앗고 숨기고 움켜지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니라 지켜 주려고 합니다(33:12). 자기만 살겠다고 뒤에 남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앞서서 나갑니다(33:3)
자신이 변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면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기적적인 치료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기적적인 부자 되기를 바랍니다. 약한 사람 기적적인 은혜로 강력해지기를 바랍니다.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내 생활에서 어떤 기적이 가장 큰 기적이며 기적의 출발점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변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기적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시면 한사람이 변화되어 모든 사람이 변화되고 위기에 처했던 문제들이 해결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야심에 차 있기에 누구든지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고 이들을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일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안일을 위해서는 가족까지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주변에는 적들뿐이었습니다. 그의 장인과 처남들 자기 친형에서 모두다 자기의 대적들뿐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형이 원한을 품은 지 20년이 지났어도 안 풀릴 정도로 뼈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장자권도 하나님의 축복도 모조리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20년 만에 금의환향하고 있으나 그 앞에는 20년이 흘렀어도 원한을 풀지 못하고 칼을 갈아 오던 잔인한 성격의 에서가 마주 오고 있었고 극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든 수단을 강구해 왔으나 허사였습니다. 이때 그는 기도했습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 기도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기도의 싸움을 하다가 환도 뼈가 물러나 한쪽 다리를 못 쓸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변화 받았습니다. 새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28절)너를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누어 이기었노라. 하나님과 겨누었다 함은 기도의 승리였다 함이요, 사람과 더불어 겨누어 이기었다 함은 남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자기와의 싸움에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와 싸워 이기니 화평히 오고 기쁨이 오고 다함께 승리가 왔습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지말고 자기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말고 자기가 변화되면 됩니다. 세상 악하다 비판하지 말고 내가 선하면 세상도 선해집니다.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성공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동안, 행복을 추구하던 아내는 그 남편을 떠났고 자녀들은 엄마를 따라가 버려서 그 후 낭인 생활을 하다가 후에 자신을 뒤돌아보므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직 생존경쟁만 생각하고 달음질치던 생활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절박감,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느라 좌우를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은 아닙니까?
일생을 남보다 앞서 가려는 투쟁으로 산 야곱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이라는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의 전형입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나면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라는 뜻의 야곱이 된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 이전에 태 속에서부터 열심히 싸웠고 태어나면서도 먼저 나오겠다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계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끝내는 한 집에 있지 못하고 도망을 치고 맙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하여 14년 동안이나 일을 해줍니다. 그는 재산을 얻기 위하여 많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외삼촌 라반과 외사촌 형제들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 결과 야반도주해야 하는 갈등과 원망을 듣게됩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는 한가지 목적, 즉 남보다 앞서는 것, 장자가 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부모, 형제, 친척 모두를 이용했고 끝내는 원수가 되면서도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서도 14년이란 세월을 아무 보수도 없이 일을 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야곱은 집념의 사람이요. 추진력과 재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줄도 알고 도전할 줄도 아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사람, 결과로 본다면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고 성공하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잃었고, 형제를 잃었고, 이웃을 잃었습니다. 진정으로 주변에서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를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칼을 갈고 있는 형 에서가 있었을 뿐입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생을 산 결과 앞서보고 얻어보지만 그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와 만족, 기쁨과 행복이 없었습니다.
강가에 홀로 서 있는 야곱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명예, 성공, 성취, 재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이 모든 것을 얻었고 성취했지만 그에게는 칼을 갈고 있는 형과의 갈등과 원망과 원한, 끝없는 투쟁으로 인한 내적인 허무함과 두려움들,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과 기쁨, 행복함과 계속되는 투쟁과 갈등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는 것인가요? 이제 야곱은 지금까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토록 쥐고 싶어서 갈망했던 것들, 움켜졌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고 있습니다. 칼을 들고 마주쳐 오는 형과 군사들 앞에 14년을 수고하며 얻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보냅니다. 20년을 고생하며 모아 그토록 소중하던 재산들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날 때와 같이 혼자 남아 강가에 홀로 서서 인생을 뒤돌아봅니다. 야곱이 한 밤중에 얍복 강가에서 모든 것을 놓고 홀로 서서 인생을 뒤돌아보았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은 가지 않고 얍복강가에 남아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순간에 야곱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의 전 생애에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형도 아버지도 속이는 아주 간교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물려받아서 믿었을 뿐이고 또 그가 믿는 것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쓰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기도도 했지만 그가 한 기도는 그가 아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흥미를 가진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만으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체험, 이 야곱이 겪은 회심의 체험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의 회심에는 어떤 체험이 있습니까?
회심은 항상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24절) 회심은 항상 개인적으로 일어납니다. 즉 회심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홀로"라는 이 외로움 혹은 고독 같은 상황 속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홀로 떨어지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야말로 이 홀로 떨어지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환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집단화, 대중화되면서 우리는 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사람과는 떨어질 수 있을지라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혹은 많은 오락기구들로 인하여 우리는 홀로 있는 느낌을 거의 받기가 어려운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점점 개인이 무시되고 집단화, 조직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커다란 방해가 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커다란 신앙의 전기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홀로 떨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홀로 되는 상황까지 오기에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많은,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을 동원하십니다.
야곱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 야곱이 홀로 있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에서의 위협이 있고서야 홀로 된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자기의 모든 재산으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이런 자신이 가진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이 모든 재산과 아내와 자식들은 영원히 내 것이라고 야곱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모든 것들을 그로부터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분리작업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런 작업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일들과 재산이 있고, 또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바빠서, 또 너무 행복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지금 생각하기에는 나는 너무 바쁘고 아직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불치의 병이 났다고 하면 나의 많은 것들이 이제 나로부터 분리되어질 것입니다. 먼저 그 많은 일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일로부터 분리, 재산으로부터의 분리, 그 다음에 친구로부터도 분리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얼마나 고독한 지 모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정말 엉엉 울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세상을 다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어떨 때는 고독과 배신감에 이를 갈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꼭 병으로만이 아닙니다. 직장을 잃어버림으로 우리는 이런 홀로되는 분리를 경험합니다. 사업에 실패함으로 우리는 이런 홀로됨을 경험합니다. 자식으로 인하여도 우리는 이런 홀로됨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으로 인하여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나는 정말 홀로 남았구나. 나의 이 아픔을 누가 대신 해줄 수 없구나!"하는 무서운 현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눈치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자기의 영혼도 잃어버린 채, 빠져있는 그것들로부터 그의 영혼을 건져내시려고 이런 일들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개인 개인으로 취급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오직 내 자신 하나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각자 각자에게 우리의 인생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야곱처럼 우리는 홀로 남게 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오직, 나 개인만이 서 있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고독하고 아플지라도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재물이나 아내나 자식, 그리고 세상 자랑이나, 친구들을 사랑하되 그것들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그것들에 빠져서 영혼의 중요성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회심은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인도해주는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이 체험한 중요한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한 인간이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이 일을 체험한 야곱은 체험하기 전과 아주 달라졌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은 어떤 원리나 힘이 아니라 한 인격이시고, 그래서 우리와 말할 수 있고 우리의 아픔을 알 수 있으며, 우리와 용무가 있으신 분이시오, 우리를 바라다보고 계신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했을 때, 야곱은 모든 것이 바꾸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법칙이 아니십니다. 어떤 원리나 신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파하시고 기뻐하시고 그리고 말씀하시고 간섭하시고 심지어 여러분들과 씨름도 하신 하나님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오는 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이 야곱은 자기의 소유와 자신을 잃어버릴까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 재산을 나누고, 에서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도 선물을 보내고, 기도도 해보고, 이렇게 저렇게 정말 불안해서 어쩔 수 모르는 야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이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에 야곱은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인 가축들, 소 떼와 양떼들, 그 고생해서 얻은 재산, 심지어는 그의 처자식들에 대해서도 다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체험, 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면서 그는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에게는 "이제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소서" 이 기도만 남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에서를 피하게 해주십시오. 이 재산을 지켜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날이 새는 지도 몰랐고,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는데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 이제 당신이 중요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잃고서라도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말들은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이 누구신 줄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의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이 없어지는데 꼭 한가지만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 사람이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사해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죽음과 사망에서 자기를 건지실 분은 그리스도뿐이란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 된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분이 그리스도뿐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도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헛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도 그리스도가 최고입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그의 모든 말씀을 모두 다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체험에는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
야곱은 이 체험 후에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겉도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양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이 바꾸어졌고, 그의 행동이 바꾸어졌습니다. 야곱의 행위가 이 창세기 32장을 분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달라집니다. 옛날에는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쓰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옛날에는 참으로 어려울 때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편안할 때도 기도합니다. 언제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웃과 분쟁하며 이웃에게 말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이웃과 화목하면서 이웃에게 칭찬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야곱을 보면 옛날의 야곱이 아닌 지를 압니다. 물론 그가 완전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못살아서 가난해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못산 것이 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삶의 스타일이 바뀌었고, 목적이 바꾸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바울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져서 절뚝절뚝 걷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아주 평온했습니다. 아주 감사했습니다. 저 멀리 영원한 것 속에서, 옛날에는 그 영원이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던 것이, 이제 거기서 빛이 비춰옵니다. 인생이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과 자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브니엘의 체험이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끊어지고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독하고 아플지라도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 매달려보십시오. 진정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막혀있는 그 순간이 사실은 전혀 다른 놀라운 해결의 열쇠를 얻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리의 체험이 아플 수도 있고, 분노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인생에 무엇인가 이루어 놓은 사람일수록 깨어지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일수록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병인 것입니다. 요령 피우고 거짓말하고 힘껏 뛰면 되니까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늘 그럽니다. "하나님은 뒷전에 계십시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매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늘 관념의 하나님으로 추상의 하나님으로 필요의 하나님으로 액세서리의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야곱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야곱의 이전까지의 삶은 자기가 싸우고 생존경쟁하고 발버둥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매달립니다. 여기서 신앙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신앙은 발버둥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싸우고 내가 꾀를 부리고 내가 쟁취하고 내가 몸부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달리는 것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발버둥이 무엇입니까? 생존경쟁이 무엇입니까? 내 수단, 내 방법을 통해서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우리들의 발버둥이 통하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현장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순풍에 돛이 아니라 차라리 위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천사에게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축복하기 전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깨졌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매달립니다 하고 매달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고 중요한 장면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이런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물건들을 보면 전도체가 있고 부전도체가 있습니다. 전기가 통하는 물건이 있고, 통하지 않는 물건이 있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통하는 사람이 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통하고 통하지 않습니까?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흐르지 않습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찾지 못합니다.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봐주지 않습니다.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깨어졌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천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제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네가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 내가 너를 봐줬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봐주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상기하지만 이 싸움은 야곱이 발버둥치고 몸부림해서 그래서 싸워 이긴 싸움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야곱이 힘이 세서 이긴 싸움이 아닙니다. 항복하고 매달림으로써 이긴 싸움입니다, 여러분. 내 수단을 포기하고 자기 자아 속에 들어있는 깨어질 수 없는 그 견고한 자아가 깨어지고 자기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런 항복을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를 붙들어 주소서 했을 때 하나님께 얻은 승리인 것입니다. 항복함으로 얻은 승리! 깊은 신앙의 명제입니다. 내가 깨어짐으로 얻은 승리, 내가 부서짐으로 받은 축복, 우리 신앙의 명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 왔고 살아가고 있고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왔습니까? 남보다 앞서보려고 했던 성공에 개한 집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도 얻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 재물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해야된다는 욕구들, 이러한 것들을 얻는 과정에서 부모 형제와 이웃들을 아프게 하고 외면했던 삶들, 그 결과 남는 것은 미움과 이별, 원망과 원한, 끝없는 투쟁, 두려움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이제는 한 번쯤 인생에 강가에 홀로 서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우리 모두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 봅시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그 분과 함께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 결과로 주어지는 변화를 경험해봅시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이전에 살아왔던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그 삶이 변화되지 아니하고, 가치관이 변화되지 아니하고 생각이 변화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깨어져야 될 사람이 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일 해야 될 사람이 하나님 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달란트를 묻어두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런 비상한 수단으로 그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바꾸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얍복강 나루터로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환도뼈가 부러져 절뚝절뚝 절면서 이스라엘이 된 사람도 있지만 절지 않고도 이스라엘이 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야곱의 문제는 실은 그 화난 형 에서의 문제가 아니고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주시니까 에서의 감정도 눈 녹는 것처럼 녹아서 두 팔을 벌리고 기뻐 반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문제나 아내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리가 멀다고요? 아닙니다. 가난하다고요? 돈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 일하는 데 아내의 문제도 남편의 문제도 무슨 바쁜 문제도 돈이 없는 문제도 다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은 다 야곱의 변명일 뿐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나는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야곱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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